< 『해외편 - 218』 >
『해외편 - 218』
서로 다른 구단을 응원하는 팬들의 환호와 야유 사이에 톰 크라비츠가 타석에 들어섰다.
외야 자원이지만, 오늘은 지명 타자로 2번 타순에 배치가 된 톰 크라비츠는 정교한 타격, 수준 이상의 파워, 빠른 발까지 고루 갖춘 타자다.
현재 뉴욕 양키스 외야수들과의 주전 경쟁에서 이겨낼 정도로 수비력이 뛰어나지 못했기에 4번째 외야수라는 말을 듣고 있지만, 다른 메이저리그 구단이었다면 충분히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남을 정도의 선수인 건 확실하다.
다시 말하면 톰 크라비츠 정도의 외야수를 지명 타자로 쓰는 뉴욕 양키스의 선수층을 보고 있으면 어째서 양키스를 악의 제국이라 부르는지 충분히 알만했다.
우타자인 톰 크라비츠는 양발을 크게 넓히고 서서 상체를 약간 구부정하게 구부린 자세에서 배트를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 서 있었다.
바깥쪽보다 몸 쪽에 강한 타자.
타격 자세 때문인지 톰 크라비츠는 몸 쪽 공에 유독 강했다.
당연히 그를 상대하는 투수와 포수는 바깥쪽 승부를 많이 가져간다.
당연한 일이고, 그래야 하는 승부다.
형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초구를 바깥쪽을 살짝 걸치는 컷 패스트볼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기에 원하는 구종, 코스로 초구를 던졌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선언에 톰 크라비츠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배트를 휘두르면 충분히 닿을 거리이긴 했지만, 제대로 된 타격을 하기엔 확실하게 노리고 들어가야만 하는 거리다.
십중팔구는 제대로 된 안타보다는 범타가 나올 코스였기에 톰 크라비츠의 인상이 찌푸려진 거다.
타자와 투수는 거리 싸움에서도 반드시 우위를 점해야만 한다.
얼마나 공을 타자 몸 쪽으로 붙일 것인가, 어느 정도까지 뺄 것인가.
높은가, 낮은가.
이런 거리 싸움에 능한 투수는 타자를 상대로 쉽게 안타를 내주지 않는다.
단순하게 본다면 타자는 자신의 타격 자세만으로도 어디에 강하고, 어디에 약한지를 다 드러낸다.
하지만, 공을 던질 때마다 원하는 코스에 자신 있게 넣을 수 있는 투수는 얼마 없다.
퍼어어엉!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몸 쪽을 아슬아슬하게 찌르고 들어갔다.
구속도 101마일이 나오면서 톰 크라비츠가 아무리 몸 쪽에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쉽게 타격을 할 수 없었다.
타자에게 극도로 불리한 투 스트라이크 노볼 상황.
배트를 짧게 쥔 톰 크라비츠는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타격 자세를 유지했다.
여기서 제로백 슬라이더를 던지는 건 타자에게 너무나도 쉽다.
지금으로서는 쉽게 공략할 수 없는 공이지만 타자가 예상하고 있는 공을 던져주는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다. 이미 앞선 타자에게 예상 가능한 투구를 해주면서 기싸움에서는 확실하게 우위를 점했으니 이제는 다른 패턴을 하나 더 집어넣어야 한다.
여기서 타자의 허를 찌르는 공이 무엇일까?
가장 좋은 건 12to6커브다.
움찔.
퍼- 엉.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톰 크라비츠의 표정이 돌덩어리처럼 굳어 있는 게 보였다.
어떻게든 내가 던지는 공을 치겠다고 번뜩이던 눈동자는 황당함, 야속함, 억울함 등의 감정들이 물들어 있었다.
이걸로 두 번째 타자를 통해 오늘 경기에서 내가 우직할 정도의 패스트볼만 던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뉴욕 양키스 타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지금까지 결정구는 제로백 슬라이더라는 공식을 철저하게 파괴한 거다.
세 번째 타자가 들어섰다.
뉴욕 양키스의 3번 타자라는 자부심을 가슴에 매달고 뛰는 저메인 샘슨은 거구의 1루수로 매년 홈런왕을 노려볼 만큼 파워가 뛰어난 타자다.
단순히 파워만 있어서는 절대 양키스의 3번 타자 자리를 지켜낼 수 없다.
유연한 배팅 능력은 언제든 타구를 배트에 맞추며 타점을 생산해내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다.
타점 괴물.
저메인 샘슨의 별명으로 다른 건 몰라도 메이저리그에서 그만큼 득점권 타점이 높은 타자는 없다.
부웅-!
초구부터 힘껏 배트를 휘두른 저메인 샘슨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패스트볼을 노리고 들어왔는데, 내가 던진 초구는 파워커브였다.
두 번째 공도 저메인 샘슨은 파워 넘치는 풀스윙을 보여줬다.
체인지업이었기에 타이밍을 완벽하게 뺏어버렸다.
이제 결정구를 던져야 할 때.
‘1회 초는 완벽하게 끝낸다.’
1, 2, 3번 타자 모두 삼구삼진이 목표.
이제 목표까지 남은 건 단 하나의 공.
제로백 슬라이더? 12to6커브?
모두가 내가 무슨 공을 던질지 궁금해 하겠지.
그 중에서도 가장 긴장하고 있을 사람은 역시 저메인 샘슨이다.
형수와 사인을 주고받은 이후 천천히 와인드업을 하고 힘차게 공을 던졌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액-!
공기와 바람의 저항을 무시하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는 야구공.
저메인 샘슨은 눈 깜짝 할 사이에 홈플레이트 앞까지 도달한 공을 향해 온 몸을 쥐어짜듯 비틀며 배트를 휘둘렀다.
‘늦었어.’
쇄애애애액!
퍼어- 어어엉!
부우웅!
“스윙! 타자 아아아아- 웃!”
얄미울 정도로 커다랗게 소리를 치는 주심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저메인 샘슨은 포수 미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라이징 패스트볼.
내가 과연 몇 사람이나 생각을 했을까?
마운드를 내려오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는데, 동시에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래, 네가 주인공이다!”
형수의 말에 무슨 소리인가 싶었더니 녀석이 고갯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대형 스크린에서 내 모습이 실시간으로 보여지고 있었다.
그제야 갑작스런 관중들의 함성 소리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저스 차지혁! 1회 말 뉴욕 양키스 타자들을 모두 삼구삼진으로 기선 제압! 이런 타이틀과 함께 방금 웃었던 모습이 내일 신문 메인을 장식할 것 같지 않냐? 여기저기서 마성의 미소니 어쩌니 하면서 엄청 추켜세워 주겠네! 흐흐흐! 솔직히 말해봐? 일부러 연출한 거지?”
형수의 시답잖은 소리에 피식 웃고는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버렸다.
월드 시리즈는 이제 시작했지만, 기분 상으로는 벌써 절반을 치른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1회를 마치고 난 지금의 컨디션은 정말 최고였다.
‘다시 한 번 퍼펙트 삼진 게임을 해봐?’
컨디션이 너무 좋다보니 나도 모르게 실없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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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정말 꿈만 같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한국 선수가 그것도 선발 투수가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세 타자 연속 삼구삼진을 잡을 날이 올 줄이야! 후아! 후아! 온 몸이 흥분으로 떨려서 미칠 것만 같습니다! 이런 경기를 직접 제 눈으로 볼 수 있다니… 후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차동호 기자 역시 잔뜩 흥분한 후배와 같은 상태였다.
그 동안 차지혁의 경기를 단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지켜봤던 차동호 기자였지만, 오늘과 같은 흥분감은 없었다.
한국 프로무대 데뷔전, 한국 시리즈, 메이저리그 데뷔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올림픽 결승전, 지금까지 차지혁이 세웠던 각종 기록들의 경기들까지 대부분의 경기들을 모두 현장에서 지켜봤지만 이 정도의 흥분감과 설렘은 없었다.
아니, 항상 중요한 경기, 각종 기록을 세웠던 경기마다 차동호 기자는 최고의 경기를 봤다고 자부했고, 자신했었다.
‘자신이 선발로 등판하는 대부분의 경기마다 이런 엄청난 흥분감을 주는 투수는 인류 역사상 오직 단 한 명, 차지혁 선수 밖에 없을 거다!’
야구부 전문 기자가 된 것이 이렇게 행복할 줄은 몰랐다.
따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타구가 빠른 속도로 3루수의 머리 위를 꿰뚫고 지나갔다.
1회 초 LA 다저스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냈던 젬마 가르시아가 2회 초 선두 타자인 데니스 플린에게 2루타를 맞으면서 시작했다.
“젬마 가르시아가 흔들리는 모양인데요?”
“그렇겠지. 차지혁을 상대하는 투수들은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맞상대 하는 투수를 질리게 만들고, 압박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투수가 차지혁이다.
차지혁의 호투만큼이나 훌륭한 공을 던지는 상대 투수들도 있지만, 오늘만큼은 확연하게 달랐다.
세 타자 연속 삼구삼진이라는 무결점의 투구 내용과 월드 시리즈라는 큰 경기를 생각하면 상대 투수는 숨이 컥컥 막힐 정도의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딱!
마이크 트라웃의 타구가 다시 2루수 옆을 스치고 지나가며 순식간에 무사 1, 3루가 되고 말았다.
젬마 가르시아가 무리하게 바깥쪽으로 구겨 넣으려던 공이 슬쩍 밀어 친 배트에 정확하게 맞아 나갔다. 이는 큰 배팅을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진루타를 만들어 내겠다는 마이크 트라웃의 노력의 산물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건 1회 초 자신 있게 공을 던졌던 젬마 가르시아의 피칭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차라리 1회 초와 마찬가지로 칠 때면 쳐보라는 식으로 던졌다면?
‘억지로 스트라이크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기에 구위도 더 좋았을 테고, 무엇보다 트라웃의 타구가 저렇게 안타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줄어들었겠지.’
“여기서 무조건 한 번 끊고 가겠죠?”
후배의 말에 차동호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생각대로 뉴욕 양키스 더그아웃에서 투수 코치가 마운드로 올라갔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엿듣지 않아도 알만했다.
긴장하지 마라, 안타를 맞든, 홈런을 맞든 상관없으니 1회 초처럼 자신 있게 공을 던져라, 점수를 1, 2점 준다고 경기가 끝나는 게 아니니 최대한 긴 이닝을 소화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아웃 카운트를 잡아라 등등.
투수 코치가 젬마 가르시아의 압박을 끊고, 자신감을 넣기 위해 애를 쓸 거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까?
누구 못지않게 어린 나이에 대성공을 이뤘던 젬마 가르시아지만, 부상과 재활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 겨우 재기에 성공한 그가 흔들림 없이 생애 첫 월드 시리즈 마운드에서 자신 있게 공을 던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이번이 중요해.”
차동호 기자는 타석으로 들어서는 장형수를 바라보며 주먹을 힘껏 쥐었다.
‘큰 것 한 방보다는 연속 안타 상황을 이어나갈 수 있는 안타가 더 좋겠지.’
점수를 생각한다면 홈런이 더 낫겠지만, 젬마 가르시아를 2회 만에 완전히 무너트리기엔 연속 안타가 더 효과적이라 생각하는 차동호 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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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월드 시리즈를 꿈꿨다.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야구를 시작하면서부터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을 하기까지 반드시 월드 시리즈 무대에 나간다는 희망과 꿈을 키워왔다.
‘모든 게 지혁이 덕분이야.’
이토록 이른 시간에 월드 시리즈 무대를 밟을 수 있는 건 누가 뭐라 하더라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차지혁 덕분이다. 스스로 메이저리거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월드 시리즈라는 무대가 단순한 개인의 노력만으로 밟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형수는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영광을 차지혁에게 돌릴 수 있었다.
자신의 또래들 중 최고의 자리에만 머물고 있는 차지혁을 볼 때면 솔직히 부럽기도 하고, 질투와 시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나마 포지션의 차이가 유일한 위안으로 형수를 달랠 수 있었다.
항상 메인 주인공으로 모두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차지혁으로 인해 서운하기도 했고, 짜증도 났지만 이제는 그러한 감정도 모조리 뿌리째 뽑혀져 나갔다.
경외의 대상.
친구지만 차지혁은 분명 자신과 그 그릇의 크기부터가 다른 선수라는 걸 확실하게 인지하고 나니 오히려 자꾸만 감추고, 숨겨야만 했던 감정들이 시원스럽게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는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이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형수는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다.
포수 마스크를 벗는 그 순간까지 차지혁의 공을 받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오늘 지혁이 컨디션은 정말 최고다! 이런 날 타자로서 내가 도움이 되는 일은 득점 밖에 없어!’
타석에 선 형수는 평소보다 배트를 살짝 짧게 잡았다.
빠른 공에 강점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어설프게 타격을 했다가 더블 플레이를 당해 젬마 가르시아의 기를 살리고, 반대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다저스 타자들의 기를 꺾을 순 없었다.
짧은 단타라도 좋다.
내야를 뚫고 나가는 안타면 충분하다.
‘승부는 빠른 볼! 반드시 젬마 가르시아는 빠른 볼로 날 잡으려고 할 거야!’
형수는 침착하게 자신만의 타격 공간을 설정해놓고, 패스트볼을 기다렸다.
쇄애애액.
퍼어어엉!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원하던 빠른 볼이 날아왔지만, 코스가 몸 쪽 낮은 곳이었기에 배트를 휘두를 수가 없었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탄탄한 양키스의 내야진에 걸려 더블 플레이를 당할 테니까.
2구는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고 배트를 유인해 내야 땅볼을 만들려는 공이었다.
스트라이크 하나, 볼 하나.
3구는 몸 쪽으로 공 한 개 가량 더 들어오는 패스트볼로 볼 선언을 받았다.
마운드 위에 서 있는 젬마 가르시아가 이를 깨물며 표정을 굳혔다.
컨트롤이 안 됐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이어진 네 번째 공에 형수가 눈을 번뜩이며 배트를 휘둘렀다.
높은 코스, 그리고 패스트볼.
이거면 충분했다.
과하게 힘을 넣을 필요 없이 가볍게 배트를 휘둘러서 정확하게 공을 타격하는 것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딱!
타구가 곧장 젬마 가르시아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며 2루 베이스 위를 관통했다.
-와아아아아아!
관중들의 함성을 들으며 형수는 오른손을 불끈 쥐었다.
‘됐다! 해냈어!’
홈런을 쳤을 때보다도 더 짜릿한 성취감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월드 시리즈 첫 번째 안타였기에 더욱더 기분이 좋았다.
< 『해외편 - 21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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