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217화 (217/221)

< 『해외편 - 217』 >

『해외편 - 217』

월드 시리즈의 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11월을 코앞에 둔 차가운 공기와 바람은 옷깃을 여며야 했지만, 양키 스타디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관중들의 흥분한 체온은 얇은 겉옷마저 벗어 던지게 만들었다.

몇몇 관중들은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반팔을 입고 있기도 했는데, 몇 자리 옆에 제법 두툼한 점퍼를 입고 있는 여성 관중과 너무나도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경기장을 찾은 일부 팬들에게는 월드 시리즈가 주는 뜨거운 무언가가 가득했다.

관중석에 앉은 팬들은 흥분으로 온 몸이 달아올랐다면, 더그아웃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선수들은 곧 깨져버릴 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마냥 모두가 경직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월드 시리즈라는 무대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선수들은 모두 제각각의 행동으로 긴장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신 아랫입술을 질겅거리는 선수, 손톱을 물어뜯는 선수, 한쪽 다리를 보기 흉할 정도로 떨고 있는 선수, 쉬질 않고 손을 움직이거나, 잔뜩 차오른 땀을 연신 유니폼 하의에 닦아대는 선수, 목이 타는지 물만 들이키는 선수 등등 각양각색이었다.

확실히 나 역시도 경기가 시작되자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긴장감이 들긴 했다.

그러나.

“후아! 후아! 후아!”

계속해서 숨을 토해내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대고, 양손을 쥐락펴락하는 형수를 보니 나는 전혀 긴장되지 않게 보일 것만 같았다.

“으흐흐흐흐흐흐… 이제 시작이다. 월시, 월시… 흐흐흐흐흐흐!”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흘려대는 형수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그라운드로 시선을 옮겼다.

마운드 위에는 뉴욕 양키스의 에이스, 젬마 가르시아가 서 있었다.

악동 젬마 가르시아.

내년이면 서른 살이 되는 젬마 가르시아는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마이애미 말린스의 지명을 받으며 메이저리그 생활을 시작했다.

그게 벌써 12년 전의 일이다.

드래프트 당시 평균 93마일의 패스트볼을 던지면서 강속구 투수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는데, 그 때 젬마 가르시아의 나이가 고작 17살이었으니 그에 대한 메이저리그 구단의 관심은 실로 대단했다고 한다.

신체적 조건, 볼 컨트롤 능력, 체력, 구위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젬마 가르시아의 성공에는 어느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어딜 가더라도 충분히 에이스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었고, 실제로 1년 만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젬마 가르시아는 데뷔시즌 12승을 거두며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렸다.

하지만, 일찍 성공한 것이 독이 된 대표적 케이스가 바로 젬마 가르시아다.

어린 나이에 모두가 떠받들어주는 메이저리거가 된 젬마 가르시아는 흔한 말로 천지분간 못하고 제 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찾아온 여성 팬들과 낯뜨거운 애정 행각으로 여러 번 망신을 당했고, 폭행 시비도 자주 일으켰다. 연봉을 더 달라며 구단에 땡깡을 부리기도 했고, 실제로 태업까지 하면서 반항기를 여실 없이 보여줬다. 클럽 하우스에서 동료 선수와 주먹다짐을 하거나, 나이 어리고 예쁜 클러비에게 성희롱을 하다가 고소를 당한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거리라면 금지 약물에 손을 대지 않은 것 정도?

그 외에는 말 그대로 구제불능의 문제 선수라는 꼬리표가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온갖 구설수에 오르면서도 젬마 가르시아의 성적은 매년 향상됐고, 최고 17승을 찍기도 했다.

오직 하나, 실력이 있기 때문에 당시 최하위의 성적으로 리그를 전전하던 마이애미 말린스로서는 젬마 가르시아를 버릴 수가 없었다. 여기에 언론 플레이를 무척이나 잘했기에 항상 최악의 징계를 요리조리 잘 피하는 선수로도 유명했다.

오죽했으면 한 때는 미국 내에서 온갖 사고를 치더라도 젬마 가르시아처럼 반성하는 모습만 보이면 된다라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였다.

야구 관계자들과 팬들은 젬마 가르시아가 올바른 인성만 지녔어도 여러 번 사이영상도 타며 리그를 대표하는 대투수가 되었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5년 동안 마이애미 말린스에서 온갖 사고를 치면서도 팀내 최고의 성적을 유지하던 젬마 가르시아에게 사고가 일어났다.

총기 사고였고, 그 사고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젬마 가르시아는 선수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치명적인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언제고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혀를 찼고, 그동안 컨트롤이 불가능한 행동으로 구단의 이미지를 추락시킨 젬마 가르시아는 사고 직후 곧바로 마이애미 말린스에서 방출을 당하며 야구 인생이 끝났다는 판정을 받았다.

수술, 그리고 재활.

젬마 가르시아가 다시 돌아온 건 3년 전이다.

모두가 회생 불가능이라 여겼던 부상을 이겨내고 젬마 가르시아는 뉴욕 양키스와 계약을 하며 자신의 재기를 알렸다.

메이저리그 구단 중 가장 엄격한 규율과 규칙을 가지고 있는 뉴욕 양키스에서 통제 불가능한 악동 젬마 가르시아와 계약을 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비난을 했지만, 사고 이후 완전히 뒤집혀버린 자신의 상황에 깨달은 것이 많았는지 더 이상 예전의 악동 젬마 가르시아가 아니었다.

재기 시즌 6승을 거두며 확실히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듬해 12승을 거두었고, 올 시즌 자신의 커리어 하이였던 17승을 다시 한 번 쌓으면서 완벽하게 부활을 한 젬마 가르시아는 뉴욕 양키스의 에이스로 확실하게 거듭 난 상태였다.

오늘 컨디션은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한창 잘 나가던 시기에 지구 하위권을 맴돌던 마이애미 말린스에서 공을 던졌으니 젬마 가르시아에게도 월드 시리즈는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그런 월드 시리즈에서 1차전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오르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얼마나 컨디션 관리를 잘 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히 알 만했다.

쇄애애애액!

퍼어엉!

“스트라이크!”

1번 타자 던컨 카레라스가 몸 쪽을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오는 패스트볼을 지켜봤다.

최고 100마일이 넘는 공을 던졌던 젬마 가르시아였지만, 올 시즌 그가 던진 최고 구속은 97마일.

방금 던진 공도 94마일 밖에 되지 않았으니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구속이 떨어졌다. 그러나 젬마 가르시아의 패스트볼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구위를 자랑했는데, 그의 공을 받아본 포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흡사 돌덩어리가 날아오는 느낌이라며 일반적인 구속의 공과는 비교를 하기 힘들다 말할 정도였다.

“정말 착실하게 마음잡았을까? 솔직히 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본다. 젬마 가르시아는 분명 또 사고 친다.”

형수의 말에 가장 먼저 송종섭이 떠올랐다.

“송종섭도 마음잡았잖아.”

송종섭을 언급하자 형수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종섭이랑은 다르지. 그 새끼는 원래 양아치였으니까 이제라도 새사람이 되겠다고 마음을 잡았지만, 젬마 가르시아는 실력을 믿고 제 멋대로 살았던 놈이라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아쉬워서 바짝 엎드리고 있지만 아마 내년 시즌에도 올해처럼 성적 좀 나오면 옛날 버릇 나오지 않겠어?”

형수의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도대체 저런 논리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리고 말 그대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반대로 사람만큼 쉽게 변하는 존재도 또 없었다.

설령, 젬마 가르시아가 그렇다 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당장은 젬마 가르시아가 던지는 공을 어떻게 타격해서 점수를 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따악!

2스트라이크 1볼 상황에서 던컨 카레라스가 때린 커브가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올스타 유격수, 아드리안 론돈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가며 아웃되고 말았다.

“호랑이 없는 산에 늑대가 왕 노릇한다고 하더니 바렛이 떠나니까 아드리안 론돈 수비가 괜히 멋져 보이네!”

멋져 보이는게 아니라 실제로 이번 수비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대단했다.

3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꿰뚫고 나갈 강습 타구를 아드리안 론돈이 그림 같은 호수비로 잡아 낸 거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공격력을 가지고 있는 유격수 아드리안 론돈의 지금과 같은 수비는 시즌 내내 5번이나 나올까 말까 할 정도였으니 결과적으로는 안타성 타구를 치고도 아웃당한 던컨 카레라스가 운이 없는 셈이다.

반대로 안타나 다름없는 타구가 수비의 도움으로 아웃이 되었으니 젬마 가르시아의 투구는 더욱더 자신감이 붙을 수밖에 없게 됐다.

내 예상대로 젬마 가르시아는 수비를 믿고 마음껏 투구를 했다.

월드 시리즈가 주는 긴장감을 첫 타자를 상대로 날려버린 셈이다.

딱!

높이 뜬 타구가 중견수에게 잡히면서 코리 시거를 끝으로 삼자범퇴, 1회 초 LA 다저스의 공격이 끝나고 말았다.

‘오늘 경기 쉽지는 않겠네.’

생각 외로 LA 다저스 타자들이 고전을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뉴욕 양키스 타자들이라고 쉽게 경기를 할 생각은 없을 거다.

“가자!”

포수 장비를 모두 착용한 형수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앞장섰다.

수비를 나가는 야수들도 한 명, 한 명 나를 향해 직접적으로 응원을 하거나, 눈빛만 보내며 격려를 해주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니, 슈퍼 에이스니 어쩌니 떠들어대도 고작 22살의 메이저리그 2년 차 투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야수들로서는 선배로서 내가 긴장하지 않게끔 하려는 눈치였다.

그렇게 선 마운드.

‘이 정도였던가?’

1회 말, 뉴욕 양키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마운드에 오르자 사방에서 옥죄여오는 압박감이 어마어마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긴장감이 온 몸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올림픽 결승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게 월드 시리즈의 마운드라는 건가?’

그래, 이 정도는 되야지.

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을 꿔봤을 월드 시리즈 아닌가.

이런 긴장감도 없다면 월드 시리즈가 너무 시시할 것 같았다.

“후우우우!”

깊게 숨을 토해내며 끈끈하게 달라붙은 긴장감을 털어냈다.

아직까지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지만, 공을 힘껏 움켜잡으니 어느 정도 안정감이 들었다.

“차지혁! 파이티이이잉-!”

포수 마스크를 옆에 내려놓고 형수가 커다랗게 고함을 내질렀다.

단 한 번도 저런 적이 없었기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그것이 형수 나름대로 긴장을 풀기 위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자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저렇게 든든하게 나와 함께 호흡을 맞추는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힘이 났다.

연습투구를 하며 어깨에 내려앉아 있던 긴장감을 어느 정도 해소시키자 주심이 경기를 진행시켰다.

타석에 들어서는 뉴욕 양키스의 1번 타자는 올스타 출신의 호르헤 마테오.

유격수 아드리안 론돈과 함께 키스톤 콤비로 탄탄한 내야를 책임지고 있는 선수다.

타율, 출루율, 도루 어느 것 하나 팀 타순의 선봉장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호르헤 마테오였기에 초구부터 확실하게 기를 꺾어놔야만 했다.

타자의 기를 꺾을 수 있는 최고의 공.

쇄애애애애애액!

퍼어어- 어엉!

“스트라이크!”

100마일이 넘어가는 포심 패스트볼.

한복판으로 들어온 강속구에 호르헤 마테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게 보였다.

삼구삼진으로 간다.

등 뒤를 지키고 있는 야수들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투수로서 상대 타자들의 기를 확실하게 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투수 본인 스스로 위력적인 공을 던져 주는 거다.

쇄애애애애액!

퍼어- 어엉!

“스트라이크!”

타자 몸 쪽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하게 날아오는 패스트볼에 호르헤 마테오는 몸을 움찔하기만 할 뿐, 감히 배트를 휘두를 생각조차 못했다.

그리고 이어진 3구.

누구나 예상하는 그 공.

어렵지 않게 예상하면서도 절대 칠 수 없는 바로 그 공.

부- 웅!

“스윙! 타자 아아- 웃!”

제로백 슬라이더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난 호르헤 마테오의 구겨진 표정이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만족스럽게 보였다.

삼구삼진으로 호르헤 마테오가 물러나자 뉴욕까지 원정 응원을 온 LA 다저스 팬들의 환호성이 양키 스타디움을 장악해나갔다.

일부 뉴욕 양키스 홈팬들이 야유를 보내긴 했지만, 신경조차 쓸 필요 없는 작은 소리에 불과했다.

< 『해외편 - 217』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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