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216』 >
『해외편 - 216』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이해할 수 없는 거라니까.”
LA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형수가 그렇게 말하며 음료수를 마셨다.
“그러게.”
형수의 말에 대꾸를 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송종섭에게 들은 말이 아직까지도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혜영이 첫사랑이 너라더라.’
결혼식을 마치고 가볍게 뒤풀이를 하는 자리에서 송종섭이 내게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정혜영에게 내가 첫 사랑이었을 줄이야.
당시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뭐야? 그 표정은? 나도 임마 여자라면 질리도록 만나보고 다녔던 놈이야. 고작 풋내나 풍기는 첫사랑 따위에 내가 뭐 눈이라도 꿈뻑할 것 같냐? 그리고 너 같은 샌님이 혜영이 마음을 알지도 못했을 것 같기도 했고. 왜 모른 척 했냐고? 그렇다고 사진 보여주면서 혜영이 아냐고 묻는 게 더 웃기지 않냐?’
송종섭의 말이 맞다.
나 같아도 송종섭처럼 행동했을 것 같긴 했다.
그리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처음 날 보고 너무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했던 정혜영이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인사를 했고, 송종섭과 다정하게 손을 잡았다.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행동?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정혜영은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할 여자가 아니었고, 그 모습을 지켜본 나 역시도 진심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일 거다.
송종섭도 정혜영이 첫사랑인 나를 완벽하게 잊었다는 걸 알기에 웃으며 내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거다.
동시에 모든 사실을 오픈함으로써 나와 정혜영, 그리고 송종섭 사이의 찜찜함을 털어낸 거다.
“종섭이 새끼 많이 변하긴 했더라. 솔직히 나는 처음 종섭이 얼굴 봤을 때, 엄청 당황했다. 무엇보다 지혁이 네가 그딴 새끼랑 왜 연락을 했는지, 결혼식까지 와야 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는데… 변한 모습을 보니까 네 말대로 동창이라는 기분이 들긴 하더라.”
“어쩌면 우리보다 더 치열하게 야구를 하는 사람이 종섭이일지 모르지.”
내 말에 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결혼을 해서?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라서?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오랜 방황 끝에 삶의 목적과 꿈을 찾았기 때문일 거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송종섭으로서는 당연히 나와 형수보다 더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운동 선수의 생명력을 생각하면 재능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뒤늦은 스타트는 절박할 수밖에 없다.
“잘 됐으면 좋겠다.”
형수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욕을 하던 형수가 진심으로 송종섭이 잘 되길 바라는 모습을 보니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인 보람이 느껴졌다.
@
10월 18일 수요일.
드디어 챔피언 시리즈 1차전이다.
2년 연속 챔피언 시리즈에 진출한 LA 다저스의 선수단 분위기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작년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기존 선수들의 분위기는 작년 LA 다저스의 패배를 잘 알고 있는 이적 선수들에게도 충분히 전해졌다.
쇄애애애애액!
퍼어- 어엉!
“좋아! 이런 공은 절대 누구도! 아무도! 못 친다!”
형수가 만족스럽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컨디션은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최상이었다.
더욱이 오늘은 부모님과 안젤라가 경기장에 찾아오기도 했으니 평소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야 했다.
지난 디비전 시리즈에는 도저히 스케줄을 조정할 수 없어서 경기장을 찾아오지 못했던 안젤라였다. 얼마나 미안했으면 전화, 문자, 그리고 오늘 잠깐 시간을 내서 만나는 자리에서도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한 그녀였다.
거기에 한국에서 날아온 부모님은 LA 다저스가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면 그 경기들마저 모두 경기장에서 직접 응원을 하겠다고 말했으니 더욱더 월드 시리즈 진출은 물론, 우승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내야만 했다.
“시간 됐다. 가자!”
형수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비장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려한 행사가 경기 전 펼쳐졌고, 다저 스타디움을 꽉 채운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마운드에 올라갔다.
상대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다.
메이저리그 그 어떤 구단보다 가을 야구에 강한 면모를 보이는 팀이었기에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
확실하게 기선 제압을 한다.
작년과 같은 일은 절대 되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만 했다.
《NLCS 1차전! LA 다저스 승리!》
《LA 다저스 슈퍼 에이스 차지혁! NLCS 1차전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완벽 제압!》
《가을 좀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불안한 출발! NLCS 2차전에서도 LA 다저스에 완패!》
《충격의 3연패! 홈에서도 패배를 끊지 못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NLCS 4차전에서 간신히 명예 회복을 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반격에 성공할 것인가!》
《양 팀 선발 투수가 무너진 5차전! 막강 화력을 앞세운 LA 다저스 최종 승리!》
《작년의 패배를 확실하게 갚아 준 LA 다저스! 월드 시리즈 진출!》
《LA 다저스와 뉴욕 양키스의 WS! 그 승자는?》
내셔널리그 챔피언에 오른 LA 다저스.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에 오른 뉴욕 양키스.
이제 마지막까지 왔다.
대망의 월드 시리즈.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뉴욕 양키스가 올라오길 바란 나와 형수였지만, 아쉽게도 뉴욕 양키스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4연승으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너무나도 손쉽게 격파하고 미리 월드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구단 일정보다 하루를 앞당겨 먼저 뉴욕에 도착해 있었다.
“여보, 나 괜찮죠?”
레스토랑 입구에서 엄마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엄마의 모습을 꼼꼼하게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을 봐도 괜찮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그래도 처음 만나는 자리니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살짝 긴장한 듯 한 엄마의 모습에 아버지는 간단하게 식사만 하는 자리니까 너무 부담 갖거나 긴장할 것 없다며 다독였다.
“지혁아, 네가 앞장 서라.”
아버지의 말에 나는 알겠다며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서 있던 깔끔한 차림의 매니저에게 예약자의 이름을 말하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서 도착한 곳은 레스토랑 내에 몇 개 없는 룸 중 하나였다.
똑똑!
“일행 분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매니저는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문을 열어줬다.
열린 문을 통해 룸으로 들어서자 하얀 색의 투피스 정장을 차려입은 안젤라와 그녀의 핸드폰에서 봤던 아름다운 여자가 함께 서 있었다.
“메리 로메이언입니다.”
23살 때부터 5살짜리 조카를 홀로 키운 대단한 여자다.
구단 일정보다 하루 일찍 뉴욕에 온 이유는 바로 안젤라에게는 이모이자 엄마이며, 친구나 다름없는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인 그녀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 시리즈.
조금 과장해서 한국은 이미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9시 뉴스에서도 특집으로 다룰 정도로 대대적인 보도가 연일 나가고 있었다.
메이저리그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뉴욕 양키스가 먼저 떠오르고, 뉴욕 양키스는 메이저리그 그 자체이기도 했으니 그런 구단을 상대로 한국 선수가 월드 시리즈 1차전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다니 떠들썩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메이저리그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높여 놓은 선배들은 있었어도 월드 시리즈와 같은 엄청난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부각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 한국의 반응도 이해는 갔다.
“부담… 되는 건 아니지?”
형수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한국 상황이 어떻든 여긴 미국이다.
그리고 매일 같이 해오던 야구를 할 뿐이다.
물론, 월드 시리즈라는 꿈의 무대에 선발 투수로 선다는 게 긴장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위축되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설렘, 흥분, 기대 등등.
대체적으로 좋은 감정들이 대부분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너야 뭐 걱정할 것 없지.”
말을 하는 형수가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월드 시리즈 1차전 선발 라인업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고, 타순도 무려 6번 타자다.
비록, 말석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타선의 중심이었으니 거기에서 오는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타자의 경우 짧으면 3번, 길면 4번에서 5번 정도 타석에 서니 그 기회 동안에 제대로 된 타격을 보여주지 못하면 스스로 조급해지고, 위축될 수밖에 없다.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 시리즈를 통해 좋은 모습을 보였다 하더라도 월드 시리즈에서 빈타에 허덕이는 타자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으니 억울하더라도 앞전의 영광들은 모두 잊어야만 한다.
“후우~! 와~ 이거 생각보다 진짜 무지하게 떨리네. 돌아버리겠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진정이 되질 않는다. 후우우!”
형수가 솔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털어놓았다.
챔피언 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월드 시리즈에 진출한다고 그렇게 좋아하며 뉴욕 양키스를 발라버리겠다느니, 제국을 무너트리겠다며 호언장담을 하던 형수였는데.
“시즌 시리즈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엔 힘들겠지?”
내 말에 형수가 눈을 부라렸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당연히 힘들지!”
하긴, 내가 생각해도 힘들 것 같긴 했다.
“상견례는 잘 했냐?”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그리고 상견례 아니라고 했잖아.”
“최대한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리려고 하는 거야. 그리고 부모님끼리 만났으면 그게 상견례지 뭐 다른 게 상견례냐?”
딱히 틀린 소리 같지는 않았기에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하기로 했는데?”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형수의 말대로 부모님과 메리 이모가 만난 자리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왔었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는 하루라도 일찍 결혼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부모님이다. 그런 생각을 슬쩍 밝히자 의외로 메리 이모 역시도 안젤라가 일찍 결혼하길 원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이유는 단 하나,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안젤라가 외로워 한다는 거였다.
아무리 이모라는 존재가 곁에서 보살펴줬다고 하더라도 부모의 자리를 대신 할 수는 없었고, 안젤라의 가슴 깊은 곳에 담겨져 있는 외로움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뿐이라 여긴다고 말했다.
눈물을 보이며 이야기를 하는 메리 이모로 인해 안젤라와 엄마 역시 눈물을 흘리며 순식간에 세 여자는 하나가 된 듯 급격하게 감정을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와 아버지만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안젤라가 처음으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나와 결혼을 하게 되면 연예계 생활을 그만두겠다는 것.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나와 부모님은 생각해보지 못했던 발언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의외로 메리 이모와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던지 의외로 담담하게 듣고 있었다.
놀라움은 잠시였고 세계적인 대스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과감하게 포기하겠다는 안젤라의 말에 부모님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식사가 끝나는 동안 안젤라의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마지막으로 형수의 말과 다르게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명확하게 결혼 날짜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빨랑빨랑 프로포즈부터 해. 그래야 결혼 날짜를 잡을 것 아냐? 설마 안젤라와 연예만 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렇지 않아도 프로포즈 할 생각이야.”
“오! 언제?”
“월드 시리즈가 끝나는 날.”
“모양새가 좋으려면 무조건 우승해야겠네! 우승도 못하고 프로포즈하면 좀 그럴 테니까. 흐흐흐흐!”
“당연히 우승해야지. 반지를 마련하려면.”
“뭐? 반지?”
“프로포즈 반지 말이야.”
“…너, 설마?”
형수가 놀라는 사이 드디어 경기 시작 시간이 다 되었다.
“가자. 우리의 첫 번째 월드 시리즈를 향해서.”
형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앞장서서 걸었다.
내 생에 첫 번째 월드 시리즈.
그 첫 경기가 이제 막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 『해외편 - 216』 > 끝
ⓒ 독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