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215』 >
『해외편 - 215』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디비전 시리즈 1, 2차전을 승리로 마감한 LA 다저스는 하루를 휴식하고 펫코 파크(Petco Park)로 향했다.
쉽게 대승을 거둔 1차전.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이뤄진 짜릿한 역전승의 2차전.
1, 2차전의 승리는 LA 다저스 선수단의 분위기를 최고조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기분 좋은 휴식을 끝내고 이어진 3차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기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는 1차전 선발이었다가 취소가 되었던 맥스 프리드를 마운드에 올렸다.
정말 허리 통증이 있었던 건지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맥스 프리드의 컨디션이 썩 좋아보이진 않았고, 결국은 5이닝 동안 1실점을 하고 나서야 마운드를 불펜으로 넘기고 내려갔다.
반면, 승리의 기운을 이어받아 펫코 파크 마운드에 오른 LA 다저스의 3선발 존 로더키는 단순 차례로만 3선발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건지, 디비전 시리즈 승리에 대한 의욕이 강했던 건지 7이닝 동안 단 하나의 안타도 내주지 않는 엄청난 호투를 보였다.
오늘 지면 끝난다.
이 한 가지만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타석에 들어선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타자들이었지만, 존 로더키의 신들린 듯 한 피칭 앞에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최종 결과 3:1.
LA 다저스가 디비전 시리즈에서 3연승을 달리며 모두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챔피언 시리즈 진출을 확정 지었다.
LA 다저스가 3경기만으로 챔피언 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은 것과 다르게 워싱턴 내셔널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디비전 시리즈는 승패를 나눠가지며 매 경기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2차전을 제외하면 긴장감과는 거리가 멀었던 LA 다저스의 경기보다는 승부의 향방을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워싱턴 내셔널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경기가 몇 배는 더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쳤다.
-세바스티안 로버츠! 좌중간 펜스를 넘기는 홈런으로 다시 한 번 동점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8회 말에 터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주전 포수 세바스티안 로버츠의 동점 홈런은 디비전 시리즈 8번째 동점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렇지! 가을 좀비가 이렇게 쉽게 무너져선 말이 안 되지! 흐흐흐!”
영화관에 온 사람처럼 팝콘까지 옆에 끼고 TV를 보는 형수였다.
워싱턴 홈에서 1승 1패를 나란히 주고받은 두 팀은 세인트루이스 홈에서 워싱턴이 먼저 승리를 챙기면서 챔피언 시리즈 진출에 크게 다가간 상태였다.
더군다나 현재 펼쳐지고 있는 4차전은 8회 초까지 1점 차이로 카디널스가 뒤지고 있었기에 아웃 카운트 하나, 하나가 무척이나 중요한 상태였다.
그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세바스티안 로버츠가 동점 홈런을 터트린 것이다.
승부의 추를 다시 원점으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동점 홈런이 터지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홈팬들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동점에 만족하며 8회 말 카디널스의 공격이 끝났고, 경기는 9회로 넘어갔다.
오늘 경기에서 끝내고자 하는 워싱턴 내셔널스와 어떻게든 마지막 5차전까지 승부를 가져가야만 하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총력전은 결국 연장까지 이어졌다.
점수를 뽑지 못한 10회가 지나고 11회가 되자 다시 한 번 워싱턴 내셔널스가 추가 점수를 내며 우위에 섰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괜히 가을 좀비가 아니었다.
또 다시 동점을 만들며 12회 연장으로 경기를 이끌었고, 13회, 14회까지 접전을 벌이며 투수력을 모두 소모하고 나서야 15회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간판타자 더그레이 세인트가 투런 홈런을 터트리며 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
2승 2패.
LA 다저스 입장에서는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연장 15회까지 가는 혈투가 끝나고 하루의 휴식을 취한 후에 최후의 5차전이 벌어졌다.
어느 한 쪽도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경기.
-지미 곤잘레즈! 좌중간을 꿰뚫는 끝내기 2루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챔피언십시리즈에 극적으로 진출합니다!
“아휴~! 저 지긋지긋한 좀비 새끼들! 죽지도 않고 또 바득바득 살아서 올라오네! 진짜 징그럽다! 징그러!”
형수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차라리 잘 됐지.”
“뭐가?”
내 말에 형수가 무슨 소리냐는 듯 날 바라봤다.
“작년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됐잖아.”
“그건 그렇네? 생각해보니까 네 말대로 차라리 잘 됐네! 작년에 카디널스에게 패배하면서 월드 시리즈 진출이 좌절됐던 걸 생각해서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똑같이 좀비 놈들에게 패배의 쓴 맛을 보여줄 때가 됐지! 흐흐흐!”
작년 패배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LA 다저스 선수들과 팬이라면 오히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재대결을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늘 경기를 끝으로 내셔널리그 챔피언 시리즈의 두 구단이 정해졌다.
그리고 하루 전인 어제 아메리칸리그 챔피언 시리즈의 주인공들도 정해졌다.
LA 에인절스를 상대로 1패 이후 1승, 그리고 다시 1패 후 남은 시리즈를 모두 승리로 가져가며 챔피언 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은 뉴욕 양키스와 2연패를 먼저 당하면서 궁지에 몰렸지만 기적과도 같은 3연승으로 강적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꺾고 뉴욕 양키스의 상대가 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애슬레틱스의 상승세가 무섭다고 하더라도 양키스를 넘지는 못하겠지?”
형수의 물음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명문 구단이며 상당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강팀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메이저리그 최고의 명문이라 불리는 뉴욕 양키스에 비하면 아무래도 부족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특히, 뉴욕 양키스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비해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스타 선수들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점 또한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 시리즈라니… 흐흐흐흐흐흐!”
형수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웃음을 흘려댔다.
“내가 평생 꿈을 꿔왔던 일이 진짜 현실로 이뤄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온 몸이 찌릿찌릿하다!”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 월드 시리즈.
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을 꿔볼 일이긴 했다.
“그 전에 우리 앞길을 막아 설 카디널스를 먼저 쓰러트려야지.”
“당연하지! 이번에야 말로 내가 그 망할 좀비 새끼들을 죄다 뼈다귀를 갈아버리고 만다!”
말과 함께 ‘으드득’소리를 내며 이를 갈아대는 형수였다.
@
10월 15일 일요일.
아침부터 형수를 닦달해서 공항으로 향했다.
미리 비행기표를 예매해두었기에 빠르게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도대체 밀워키에서 누가 결혼을 하는 건데?”
형수는 턱시도가 답답하다는 듯 목 부근을 만지작거리며 불만스럽게 날 바라봤다.
“가보면 알아.”
“최소한 누가 결혼을 하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냐?”
“너랑 내가 잘 아는 사람 결혼식이야.”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형수가 계속해서 물었지만, 미리 말해봐야 좋을 것 없었기에 끝까지 침묵했다.
비행 내내 귀찮게 굴었고, 곧바로 다시 LA로 돌아가겠다는 협박까지 했지만 형수의 성격을 알기에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끝내 형수는 나와의 관계 속에서 일치하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추리하기 시작했지만 절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거라고 난 확신했다.
그러는 사이 공항에 도착했고, 곧바로 택시를 타고 미리 전달 받은 주소지로 향했다.
평범한 주택가에 들어섰고, 택시 기사는 아담한 2층짜리 주택 앞에 차를 세웠다.
요금을 지불하고 내리지 않겠다고 버티던 형수를 잡아끌고 움직였다.
집 앞에 서서 잠시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똑.
누구냐고 묻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왔냐?”
“뭐, 뭐야!”
나를 바라보며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는 송종섭과 그런 녀석의 얼굴을 확인하고 두 눈을 부릅뜨는 형수의 모습이 무척이나 재밌게 보였다.
“결혼 축하한다.”
인사를 건네자 송종섭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현재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눈치로 보건데 정말 내가 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송종섭은 멋쩍게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잘 왔다. 들어와.”
반쯤 몸을 집 안으로 들이다 뒤를 돌아보니 형수가 불편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LA로 갈 것 아니면 들어와. 여기까지 왔으니까 축하는 해주고 가야 할 것 아냐? 그래도 동창 결혼인데 모른 척 할 순 없잖아?”
동창.
말을 하면서도 뭔가 기분이 묘했다.
내 말에 형수는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꽤나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체념한 얼굴로 내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섰다. 그러면서 내 귓가에 대고 낮게 으르렁거리듯 소곤거렸다.
“집에 돌아가서 보자.”
송종섭의 집은 외관에서 보이는 것처럼 작고 아담했지만, 실내를 무척이나 잘 꾸며놨기에 나와 형수가 사는 집보다 더욱 사람 사는 모양새가 났다. 특히,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물건들과 집안 곳곳에서 보이는 아기용품들은 정말 행복한 가정집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은 예쁘네…….”
형수의 말에 송종섭이 피식 웃고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잘 지냈냐? 솔직히 너까지 올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 와줘서 고맙다.”
송종섭의 말과 행동에 형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너 진짜 내가 알던 그 양아치… 송종섭 맞는 거냐?”
형수의 말에 송종섭은 조금도 기분나빠하지 않고 여전히 피식거렸다.
“이제는 양아치 짓 그만뒀다.”
“헐! 이 새끼 너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건 아니지? 아니면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거라던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형수의 말에 내가 그만 좀 하라며 타박을 했다.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으니까 그렇지! 이 새끼가 얼마나 양아치였는데!”
“씨발놈, 꼭 내 입에서 욕을 들어야겠냐? 나도 이제 마음잡고 열심히 야구에만 전념하는 메이저리거라고.”
인상을 찌푸리는 송종섭의 모습에 형수는 오히려 그제야 편안하게 인상을 폈다.
“내가 알던 송종섭이 맞긴 하네! 새끼야, 애써서 착한 척 하지 말고 그냥 옛날처럼 해. 넌 그게 어울려.”
“…끙!”
송종섭은 형수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날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와줘서 고맙다더니.
“3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으니까 차라도 한 잔 할래?”
차를 준비하겠다며 송종섭이 부엌으로 향하자 형수가 내 곁에 바짝 다가섰다.
“너 진짜 저 새끼랑 연락하고 있었던 거야? 결혼식에 올 정도로 친해진 거야? 저번에 따로 만나서 뭐 우정을 약속했다거나 뭐 그런 거야? 아니지! 솔직히 말해? 너 돈 빌려줬지? 돈 떼일까봐 억지로 여기에 온 거지? 그렇지?”
형수는 무척이나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지만, 딱히 대답을 해줄 만한 건 별로 없었다.
결국, 형수는 송종섭이 차를 가져오자 녀석에게 나와의 일을 캐물었다.
송종섭은 나를 힐끔 바라보더니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를 눈치 채고는 나와 있었던 이야기를 천천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자 형수가 송종섭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너희 둘이 친구가 되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다!”
형수의 말에 나와 송종섭은 서로를 바라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친구라니.
피식 웃음이 나왔고, 송종섭도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현 상황을 우습게 느끼는 듯 보였다.
“나도 모르겠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도 찝찝하고. 그래 너 같은 놈을 구제하겠다고 발 벗고 나선 천사표 아가씨는 누구냐?”
형수의 말에 송종섭이 진심으로 재밌다는 듯 웃었다.
“천사표… 맞는 말이네.”
송종섭은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더니 큼지막한 사진첩을 가져왔다.
“간단하게 웨딩 사진만 찍은 건데 구경해봐.”
형수가 냉큼 사진첩을 빼앗았다.
“어디 도대체 얼굴이나 미리 구경해볼까?”
별로 크게 기대하지 않는 얼굴로 형수가 사진첩을 열었다.
“어?”
약간 어색하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송종섭과 나란히 서서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정혜영의 모습을 본 형수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지만, 그것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모르는 듯 송종섭이 입을 열었다.
“왜? 너무 예뻐서 너도 반했냐?”
“어? 어어…….”
형수가 더듬거리며 대답을 하고는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너 알고 있었어?’
형수의 표정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형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사진 속의 송종섭과 정혜영은 진심으로 행복해보였다.
특히, 송종섭의 표정과 눈빛은 정혜영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고, 정혜영 역시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송종섭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의외로 두 사람의 모습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이런 천사 같은 여자를 만나서는…….”
“작년 6월 8일, 말린스 파크.”
“응?”
“지혁이 네가 선발로 등판했던 날이다. 마이애미 원정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했던 그 경기에서 운명처럼 혜영이와 만났다고.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네가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을 만들어줬다고 할 수 있지.”
너무나도 의외의 말에 나와 형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종섭씨, 나 왔어요. 그리고 에바가……!”
문이 열리며 그녀가 집으로 들어왔다.
정혜영은 집안으로 들어서며 나를 발견하고는 온 몸이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미동도 없었다.
< 『해외편 - 215』 > 끝
ⓒ 독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