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214』 >
『해외편 - 214』
퍼어- 어어엉!
정말 저러다 포수 미트가 터져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가죽 파열음이 다저 스타디움에 울려 퍼졌다.
“스트라이크!”
뒤이어 따라오는 주심의 거친 고성.
“후우우우!”
타자는 깊은 물에 빠졌다가 겨우 올라온 사람처럼 크게 숨을 토해내기만 했다.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103마일.
가장 정직하지만, 가장 위력적인 패스트볼 앞에 타자는 너무나도 무기력해보였다.
한 때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라는 찬사를 받으며 정점에 올라섰던 바이런 벅스턴이지만 내 앞에 서 있는 그는 더 이상 최고의 타자가 아니었다.
투수는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구속부터 떨어진다.
그렇다면 타자는?
당연히 배트 스피드부터 떨어지기 시작한다.
전성기 시절 아무리 빠른 볼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 평가를 받았어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빠른 볼에 대한 배트 스피드부터 떨어지기 마련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운동 선수에게 세월은 가장 커다란 벽이자, 장애물이다.
어느 순간부터 팀의 간판 타자들이 내 앞에서만큼은 배트를 짧게 잡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런 타자들에게 자존심을 버렸냐는 말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누구도 배트를 짧게 잡기 시작한 타자들에게 자존심을 운운하지 않는다.
타자를 분석해서 수비 위치를 바꾸는 수비 시프트처럼, 투수인 나를 상대로 타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되었을 뿐이다.
쐐애애애애액.
퍼어- 어어엉!
부우웅!
“스윙! 타자 아웃!”
아무리 배트를 짧게 잡아도 제로백 슬라이더를 칠 수는 없다.
실제로 메이저리그에서 제로백 슬라이더를 선보이고부터 단 하나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았다.
피안타율 제로.
실투가 나와도 제대로 치기 힘든 공.
타자들에게 제로백 슬라이더는 사형 선고를 내리는 지엄한 판사의 판결과도 같았다.
헛스윙 삼진을 당하고도 바이런 벅스턴은 조금도 분해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한 번의 헛웃음.
무기력한 웃음만 한 차례 흘리고는 타석에서 몸을 돌렸다.
5회가 넘어가는 시점에서부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는 승리에 대한 집착을 깨끗하게 포기한 듯 보였다.
타자들은 최대한 많은 공을 보기 위해 노력했고, 짧게 쥔 배트를 간결하게 휘두르며 커트에만 집중을 했다.
내게서 최대한 많은 투구수를 뽑아내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에 집중된 타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타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투구수는 이닝당 15개를 넘어가지 않았다.
구석구석을 찌르는 포심 패스트볼은 커트조차 쉽지 않았고, 몰린 카운트에서 결정구로 날아가는 제로백 슬라이더는 단 한 명의 타자도 제외 없이 삼진으로 내몰았다.
여기에 파워커브, 체인지업, 컷 패스트볼, 투심 패스트볼을 간혹 섞어서 던져대니 형수가 말하길 타자 입장에서는 지옥이 따로 없을 거라고 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나를 상대로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동안 LA 다저스의 타선은 말 그대로 폭발했다.
6회까지 무려 11득점에 성공하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마운드를 폭격한 거다.
11득점을 이끈 타자는 코리 시거와 마이크 트라웃이었다.
코리 시거는 4타수 3안타 2홈런 4타점, 마이크 트라웃은 4타수 4안타 3타점으로 베테랑으로서 큰 경기에서 보여줘야 할 활약을 백퍼센트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타자들의 상승세를 등에 업고 나 역시도 안타 하나를 치고 있었기에 오늘 다저스 타선은 6회 만에 선발 전원 안타를 기록하고 있었다.
7회를 마치고 마운드를 내려오니 게레로 감독이 조심스럽게 교체를 제안했다.
이미 승리가 확실해진 마당에 단기전인만큼 최대한 체력을 아끼라는 의도였다.
두 번의 출루.
4회에 발생한 수비 에러와 6회에 초구 공략에 성공하고 안타를 친 단 한 명의 타자로 인해 퍼펙트 게임과 노히트 게임은 이미 물 건너갔기에 나 역시 굳이 계속해서 공을 던질 이유가 없다 여겼다.
시즌 경기였다면 9회까지 마운드를 양보하지 않았겠지만, 단기전의 특성상 굳이 체력을 소모할 이유가 없었다.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큰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선발 투수로서 확실하게 역할을 했다는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내일 선발은 딜런 아담스로 충분히 연승을 기대할만 했다.
그리고 3차전 선발 투수도 존 로더키였으니 타선에서 5점 정도만 득점을 지원해주면 충분히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3연승으로 일찍 챔피언 시리즈에 진출해서 상대팀을 기다리는 거다.
‘할 수 있다.’
현재의 LA 다저스 1, 2, 3선발 라인업은 메이저리그 최고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여기에 기복이 있다고 하지만 오늘과 같은 상승세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타선의 지원도 역시 만만찮았기에 이대로 월드 시리즈까지는 쉽게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승리가 확실해진 상황에서도 게레로 감독은 필승조를 투입하며 확실하게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타선을 잠재웠다.
경기 최종 결과 13:0.
LA 다저스의 대승으로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이 끝이 났다.
다음날 이어진 2차전.
예정대로 LA 다저스에서는 올 시즌 19승을 올린 딜런 아담스가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도 예정된 로테이션대로 2선발 투수 리즈 버틀러가 등판했다.
1회부터 3회까지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투수전이 벌어졌다.
딜런 아담스는 1차전에서 완벽하게 침묵했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타선을 상대로 2개의 피안타만을 허용하며 전날의 기운을 이어갔지만, LA 다저스 타선은 지난 경기에서의 폭발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다저스 타자들의 침묵에는 역시 올 시즌 이적료 포함 3억 달러에 육박하는 초대형 계약으로 LA 에이절스에서 유니폼을 갈아입은 리즈 버틀러의 호투에 있었다.
27살의 리즈 버틀러는 평균 95마일의 패스트볼에 체인지업과 포크볼을 주무기로 던지는 투수인데 이미 3년 전부터 내셔널리그를 대표하는 선발 투수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기에 제대로 긁히는 날에는 어떤 타자가 상대라 하더라도 순순히 안타를 내주지 않았다.
아쉽게도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리즈 버틀러의 패스트볼은 좌우상하를 구석구석 찔러댔고, 체인지업과 포크볼은 결정적인 상황마다 타자들을 농락시키며 아웃 카운트를 늘려갔다.
만약, 어제 경기에 리즈 버틀러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면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는 상당히 치열한 투수전이 벌어졌을 것 같았다. 어쩌면 연장전까지 갔을지도 모를 정도로 오늘 리즈 버틀러의 투구 내용은 박수를 쳐줄 정도로 대단했다.
리즈 버틀러가 3회 이후로도 4회, 5회, 6회, 7회까지도 완벽에 가까운 투구 내용을 보여주었다면 승리를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딜런 아담스는 4회에 칼럼 레니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하며 실점을 하고 말았다.
다행이라면 홈런 한 방 맞았다고 흔들릴 딜런 아담스가 아니란 사실이다.
비록 4회에 홈런을 맞으면서 1실점을 하고 말았지만, 딜런 아담스는 19승을 올린 투수답게 이후 이닝을 훌륭하게 막아냈다.
그러나 끈질기게 풀 카운트까지 가는 승부가 많았던 딜런 아담스는 결국 투구수가 발목을 잡으며 7이닝을 끝까지 채우지 못하고 마운드를 내려와야만 했다.
1점 차이였지만, 리즈 버틀러가 워낙 완벽에 가까운 투구를 이어나가고 있으니 LA 다저스로서는 패색이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게레로 감독은 전날 좋은 컨디션으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타선을 잠재웠던 필승조를 투입하며 9회까지 추가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LA 다저스의 마지막 9회 말 공격.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마운드에 과연 누가 올라올 것인가?
8회까지 투구수 97개를 기록하며 오늘 경기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 리즈 버틀러가 올라올 것인지, 마무리 투수인 로이어 크로이가 올라올 것인지 모두의 관심이 집중됐다.
“로이어 크로이가 올라왔네.”
올 시즌 31세이브를 올린 로이어 크로이는 좌완 투수로 최고 100마일의 패스트볼을 던지는 전형적인 파이어볼러다.
강력한 구속과 구위를 믿고 타자를 윽박지르는 전형적인 강속구 투수인 로이어 크로이는 주로 패스트볼을 던지지만 결정구로 사용하는 80마일 후반의 슬라이더는 명품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여기에 메이저리그 7년 차의 베테랑 마무리 투수로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긴장감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선수도 아니었다.
9회 말, LA 다저스의 마지막 공격의 선두 타자는 케럴 발렌타인이었는데 나름대로 초구를 노려보겠다는 의지로 힘차게 배트를 휘둘렀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내야 플라이가 나오면서 허무하게 아웃 카운트를 헌납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타자는 선발 포수인 루이스 토렌스를 대신해서 대타로 타석에 들어선 미치 네이였다.
수비력이 좋은 케럴 발렌타인이 타격감까지 좋아 선발 경쟁에서 밀린 미치 네이였지만, 그는 역시 베테랑답게 노련했다. 철저하게 원하는 공을 노리고 타격에 임했고, 결과적으로 8구까지 가는 팽팽한 승부 끝에 볼넷을 얻어 1루로 출루를 했다.
1사 1루 상황에서 게레로 감독은 또 다시 대타를 기용했다.
외야수 랜도 시웰.
LA 다저스에서 외야 백업 선수로 평균적인 수비력과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현재 다저스 외야에 구멍이 나면 가장 먼저 그 자리를 메울 선수였다.
올 시즌 대타로는 18타석에 나와서 9개의 안타를 때렸을 정도로 성적이 상당히 좋았기에 충분히 기대를 해볼만 했다.
결과는.
부웅!
“스윙! 타자 아웃!”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를 고르지 못하고 헛스윙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2아웃 1루 상황에서 다음 타자는 던컨 카레라스였지만 올 시즌 로이어 크로이를 상대로 단 하나의 안타도 때려내지 못한 그였기에 게레로 감독은 과감하게 그를 빼고 다시 대타를 기용했다.
“잘 해.”
내 말에 헬멧을 쓰며 형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아웃을 당하더라도 형수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심적으로 형수에게는 무척이나 부담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기대를 걸어볼 만한 일이라면 올 시즌 형수는 패스트볼에 상당한 강점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타석에 들어서는 형수의 모습만으로도 괜히 긴장이 됐다.
여기서 아웃 카운트 하나면 1승 1패.
승부는 원점이 되고 만다.
이미 2아웃을 잡은 상황이지만 로이어 크로이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마무리 투수의 숙명이다.
단 1점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해서 공을 던져야 하는 마무리 투수의 중압감은 일반인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무엇보다 다 이겨놓은 경기를 패배했다는 무거운 책임감과 비난은 여러 가지로 타격이 크다.
신중하게 사인을 주고받은 후에야 로이어 크로이가 초구를 던졌다.
“스트라이크!”
바깥쪽을 걸치고 들어가는 100마일의 포심 패스트볼.
초구부터 최고 구속의 공을 던졌다는 건 그만큼 로이어 크로이가 집중하고 있다는 소리다.
형수는 타석에서 물러나 허공에 스윙을 했다.
빠른 볼이다.
아무리 빠른 볼에 강점을 보였다고 하지만 100마일의 공은 마음대로 칠 수 있는 공이 아니다.
훅하고 숨을 토해낸 형수가 자신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타석에 섰다.
2구는 몸 쪽 깊숙한 곳으로 파고드는 볼.
공을 던지고 난 로이어 크로이가 아쉽다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제구가 흔들렸다는 증거다.
공 반개 정도가 빠지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스트라이크를 내줬어야 할 정도로 좋은 공을 던졌다.
3구는 높은 코스의 볼.
유인구였지만, 형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력 있게 공을 골라내며 카운트를 2볼 1스트라이크로 유리하게 끌고 갔다.
하지만 곧바로 4구에서 몸 쪽 공을 무리하게 끌어당기다가 파울을 만들며 2볼 2스트라이크 상황으로 변했다.
‘슬라이더에 속지마.’
로이어 크로이라면 여기서 슬라이더를 던질 확률이 80퍼센트 이상이다.
우타자인 형수의 몸 쪽으로 가라앉는 슬라이더를 던지겠지.
다섯 번째 공이 로이어 크로이의 손을 떠났고, 내 예상대로 슬라이더였다.
그것도 몸 쪽으로 가라앉는 슬라이더.
우타자들은 저 공에 헛스윙을 잘 할 수밖에 없다.
‘속지마.’
내가 간절하게 원했지만, 형수의 배트가 나왔다.
홈 플레이트 앞에서 가라앉는 공에 형수의 오른쪽 무릎이 무너지며 배트가 타구를 때렸다.
딱.
파울.
가까스로 헛스윙 삼진을 모면한 형수가 재빠르게 타석에서 물러나며 애꿎은 장갑을 풀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카운트는 로이어 크로이에게 유리한 상황.
다시 한 번 슬라이더를 던질 확률은?
50퍼센트 이상.
또 같은 공에 속을까? 싶겠지만, 의외로 이런 중압감이 큰 경기에서 타자는 냉정하게 공을 볼 정도로 시야가 넓지 못하다. 특히 형수처럼 대타로 나온데다 장타력이 있는 타자라면 머릿속에 한 방이 꽉 들어 차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방금 전과 같은 슬라이더에 헛스윙을 할 확률도 높다.
속느냐, 참느냐.
이 갈림길에서 로이어 크로이가 공을 던졌다.
‘슬라이더.’
역시 로이어 크로이는 베테랑답게 다시 한 번 같은 공을 던졌다.
볼 카운트도 유리한 입장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선택이었다.
중요한 건.
형수의 허리가 이미 반이나 돌아가 있다는 사실이다.
‘속았…….’
완벽하게 속았다고 느끼는 순간, 형수의 하체가 가라앉으며 배트의 스윙 궤적이 완벽하게 아래에서 위로 퍼올리고 있었다.
따- 아아악!
공을 쪼개는 듯 한 타격음이 울렸고, 형수는 그대로 배트를 뒤로 내던지며 타구를 바라봤다.
좌익수의 머리 위를 총알처럼 넘어가는 타구는 그대로 담장을 넘어가버렸다.
“으아아아아아악!”
1루를 향해 달려가는 형수가 짐승처럼 소리를 내질렀고, 더그아웃에 있던 모든 선수가 그라운드를 향해 달려나갔다.
역전 투런 홈런 작렬.
디비전 시리즈 2차전 최고의 선수는 장형수였다.
< 『해외편 - 214』 > 끝
ⓒ 독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