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210』 >
『해외편 - 210』
송종섭은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꽤 주목 받는 루키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8월 19일 메이저리그에 콜업이 되면서 5경기 선발 투수로 등판, 2승 3패를 기록했다.
최고 구속 101마일까지 나올 정도의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로서 큰 기대치를 받았지만, 역시 고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제구가 불안한 날에는 볼넷과 와일드 피치를 남발하면서 마이너리그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투수 중 한 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메이저리그의 선발 투수가 일정 수준 이상의 볼 컨트롤을 보이지 못하고 당일 컨디션에 따라 들쭉날쭉 한 제구력을 보인다는 건 사실상 선발 투수로서의 몫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뜻과 같다.
더불어 불펜 투수로서도 그 활용 가치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9월 18일을 끝으로 송종섭은 더 이상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상 투수로서의 테스트가 끝났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 제구력을 가다듬으면 언제고 다시 테스트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타자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받고 있는 상황에서 송종섭을 다시 투수로 기용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투수로서의 테스트는 좋지 않게 끝이 났지만, 타자로서의 테스트는 성공적이었기에 구단의 기대치가 상당히 높은 상황이었다.
타율 0.321, 출루율 0.363, 장타율 0.526, OPS 0.889.
우익수로 선발 출전한 경기가 15경기, 대타 6경기에서 송종섭이 타자로서 기록한 수치들이다. 여기에 홈런까지 무려 4개를 터트렸으니 이 정도라면 루키로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비록, 경기 수가 적기에 풀시즌을 소화할 경우 어느 정도까지 성적을 유지할지, 혹은 더 뛰어난 성적을 보일지 알 수 없지만 느리지 않은 발과 외야수로서의 강인한 어깨는 확실히 경쟁력이 있다 할 수 있다.
단점이라면 역시 불안한 수비 실력과 타석에서 너무 공격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 정도였는데 이런 부분이야 충분히 시간을 두고 해결해 나갈 수 있었으니 밀워키 브루어스 구단 내부적으로도 이미 투수보다는 타자로서 확실하게 성장을 시킬 것 같았다.
“2번 타자.”
오늘 밀워키 브루어스의 선발 라인업을 바라보며 송종섭이 2번 타순의 우익수로 배치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메이저리그 마운드 위에서 한국 타자들을 상대로 공을 던져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송종섭처럼 함께 야구를 했던 타자는 없었기에 묘한 설렘이 느껴졌다.
과연 송종섭은 내 공을 제대로 칠 수 있을까?
타선에 선 녀석의 표정은 어떠할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지 못한 상태에서 마운드에 올라갔다.
밀워키 브루어스의 1번 타자를 상대로 공 4개만으로 삼진을 잡아냈다.
제로백 슬라이더를 던지면서 나를 상대하는 타자들이 가장 많이 변화한 모습은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배트를 휘두른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볼 카운트에 몰리면 제로백 슬라이더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삼진을 당하다보니 초구를 노리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1번 타자가 삼진을 당하며 돌아서자 드디어 기다렸던 송종섭이 타석에 들어섰다.
예전과는 확실하게 너무나도 달라진 모습이 낯설게 보였다.
살집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체형과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은 고등학교 시절 내 기억 속에 존재하던 송종섭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거기에 전에는 없었던 뺨의 흉터는 잔뜩 독이 오른 것처럼 보이는 눈빛과 꽤 잘 어울려 상당히 매서운 인상을 전해주고 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변해버린 송종섭이었다.
송종섭의 타격 자세는 살짝 웅크리고 있는 형태였다.
양쪽 팔을 몸에 딱 붙인 상태에서 배트를 일자로 세우고, 양발을 11자로 나란히 맞추고는 무릎을 살짝 몸의 중심으로 오므린 자세였기에 언뜻 봐서는 장타보다는 단타 위주의 타격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장타율이 무려 0.526으로 타격 자세와 다르게 장타율이 무척이나 높다.
허리 회전력과 함께 동반되는 손목 힘과 타격과 동시에 배트에 순간적으로 힘을 가하는 능력까지 전체적으로 파워가 높다는 의미다.
보통 메이저리그에서 장타율이 5할을 넘기면 중심 타선에 배치를 시킬 만큼 한 방이 있다는 뜻을 의미한다.
단순히 발만 빨라서는 절대 5할의 장타율을 넘길 수 없다.
타구를 충분히 외야 깊은 곳까지 보낼 수 있는 파워가 있어야만 했기에 5할의 장타율을 넘기는 타자들의 경우 대체적으로 30홈런 이상도 바라볼 수 있다.
물론, 송종섭의 경우 풀시즌이 아닌 20경기도 되지 않는 성적이지만 전문가들의 소견에 따르면 파워가 넘치는 타자라는 의견만큼은 일치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설명들을 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거다.
‘걸리면 넘어간다.’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형수가 사인을 보내왔다.
‘지혁아, 진짜 이건 내 개인적인 부탁인데… 오늘 종섭이 그 새끼 처음 나올 때만이라도 내가 마음대로 사인내도 될까?’
경기 직전 형수가 내게 했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정도의 사인이 나왔다.
12to6커브.
제로백 슬라이더를 던지기 시작하면서부터 한 경기에 하나도 제대로 던지지 않을 정도로 내게서 멀어진 구종이 12to6커브다.
타자의 허를 찌르기엔 이보다 더 좋은 구종이 없었지만, 패스트볼 위주의 투수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등한시한 12to6커브를 형수가 던져 달라고 하고 있었다.
그것도 초구부터.
어째서, 왜 송종섭과의 첫 대결에서 이런 의외의 선택을 요구하는 걸까?
‘유치하기는.’
뻔했다.
송종섭을 약 올리겠다는 의도다.
지금 송종섭의 머릿속에는 어떤 구종이 들어가 있을까?
당연히 포심 패스트볼과 제로백 슬라이더다.
그리고 이건 송종섭을 비롯해서 대다수의 모든 타자들이 똑같을 거다.
그런데 12to6커브를 초구에 던진다?
다른 타자들에게는 허를 찌를 만큼의 기가 막힌 수 싸움이 되겠지만, 송종섭에게는 단순한 도발로 밖에 보이지 않을 거다.
“휴우.”
솔직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워낙 간절한 눈빛으로 내게 그렇게 말을 했던 형수의 모습을 외면하기가 힘들었기에 초구만큼은 원하는 대로 던져주기로 했다.
와인드업을 하고 형수가 원하는 대로 12to6커브를 던졌다.
쇄애액- 휘익!
퍼어엉!
움찔!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존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12to6커브에 송종섭의 어깨가 움찔거렸지만, 배트는 나오지 않았다.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형수가 배트맨에 나오는 조커마냥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반대로 송종섭의 표정과 눈빛은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사납게 번들거렸다.
엄지손가락까지 치켜들며 고마움을 표시하는 형수를 뒤로하고 두 번째 공부터는 제대로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과거의 인연이 어떻든 지금은 당당한 메이저리그의 투수와 타자로 만난 자리였고, 성격상 누군가를 기만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송종섭과의 과거 인연이 어떻든 간에 나는 투수로서, 녀석은 타자로서 최선을 다해 승부를 보고 싶을 뿐이었다.
다만.
‘그만 좀 해라.’
또 다시 12to6커브를 요구하는 형수에게 고개를 저으며 포심 패스트볼 사인을 줬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형수의 모습이 마스크 너머로 보였지만, 녀석도 두 번씩이나 같은 공을 던지며 송종섭을 도발하는 건 좋지 않다는 걸 알기에 순순히 포기했다.
‘몸 쪽으로 바짝 붙인다.’
홈 플레이트에서 살짝 떨어져서 서 있는 송종섭의 몸 쪽 꽉 찬 코스로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쐐애애애애애액!
부우- 웅!
퍼어- 엉!
몸 쪽으로 바짝 붙어오는 공에도 송종섭은 겁 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비록, 타이밍이 늦어서 헛스윙이 되고 말았지만 타격 하는 자세만으로도 몸 쪽 공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타석에서 한 발 물러난 송종섭은 장갑을 풀었다 조이면서도 나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등학교 시절 구속이 더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경쟁상대로 여겼던 송종섭이다.
구속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나보다 한참이나 모자랐던 송종섭이지만, 언제나 나를 의식했던 송종섭을 떠올리니 지금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만 했다.
머릿속에 내 공을 제대로 한 방 치고 말겠다는 욕심이 가득하겠지?
불미스러운 사건과 함께 학교를 떠났던 송종섭이 야구를 포기하지 않고 메이저리그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이 한 편으로는 대견하게 느껴졌지만, 승부에서만큼은 확실하게 누가 더 뛰어난지를 똑똑하게 알려주고 싶었다.
‘이번 공으로 끝낸다.’
제로백 슬라이더?
굳이 송종섭에게 제로백 슬라이더까지 던질 필요가 없다.
시간이 지나 메이저리그 경력이 더 쌓이고 충분히 제 몫을 해줄 수 있는 주전 선수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의 송종섭은 결코 제로백 슬라이더까지 던져가며 상대해야 하는 타자는 아니었다.
형수와 사인을 주고받고 곧바로 와인드업을 했다.
‘똑똑히 느껴라. 이게 너와 나의 차이라는 걸.’
오른발을 디디며 공을 던졌다.
쐐애애애애애액-!
퍼어어- 엉!
부우웅!
“스윙! 타자 아웃!”
한 가운데에 꽂혀버린 포심 패스트볼에 송종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전광판을 바라보니 103마일이 찍혀 있었다.
이 공으로 녀석은 확실하게 깨달았을까?
이제는 훨씬 더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메이저리거로서도 우리 두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분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송종섭이 몸을 돌렸다.
포수 마스크까지 벗으며 고소하다는 듯 웃고 있는 형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 녀석이 언제쯤 철이 들까 싶은 마음에 픽 웃음이 나왔다.
다른 때에는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던 형수였지만, 지금만큼은 까까머리 고등학교 시절의 형수와 전혀 다르지 않게 보였다.
그러는 사이 올 시즌 38홈런을 터트리며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든 밀워키 브루어스의 3번 타자 헌터 커크가 타석에 들어섰다.
매년 20개 이상의 홈런으로 파워가 있음을 증명하기는 했지만, 메이저리그 통산 8년 동안 단 한 번도 30개를 넘어본 적이 없는 헌터 커크가 올 시즌은 말 그대로 대폭발을 한 해였다. 덕분에 리그 중간에 약물 검사까지 했을 정도로 헌터 커크의 장타력은 불가사의라 불리고 있는 중이다.
기본적인 체격은 평범했다.
182cm의 키에 86kg이라 알려진 몸무게는 확실히 타석에 섰을 때, 정말 38개의 홈런을 터트린 거포가 맞는지 의심하게끔 만들었다.
초구는 바깥쪽을 관통하는 포심 패스트볼, 98마일이 찍혔다.
심판의 성향에 따라 볼로 선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오늘 심판인 알렉 스미스는 좌우폭을 공 반개 가량 넓게 잡아주기로 유명했기에 투수인 내 입장에서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헌터 커크는 배트까지 뻗으며 멀지 않았냐는 간접적인 어필을 보였다.
당연히 그런다고 눈이라도 깜짝할 알렉 스미스 심판이 아니었다.
2구는 초구보다 바깥쪽으로 공 반개 가량 벗어나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딱.
초구에서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기에 헌터 커크로서는 배트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타구가 1루 파울 라인을 크게 벗어나며 관중석으로 들어갔다.
2스트라이크 노볼 상황에서 내가 던진 세 번째 구종은 헌터 커크의 몸 쪽 높은 코스의 포샘 패스트볼.
부우- 웅!
여지없이 배트가 휘둘러지면서 삼진을 당하고 만 헌터 커크였다.
다시금 드는 생각이지만, 투수와 타자는 한 끗 차이로 승부가 결정되지만 그 승부의 중심에는 역시나 주심이 있다는 사실이다.
산뜻한 출발로 인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마운드를 내려오니 기다리고 있던 형수가 바짝 달라붙으며 입을 열었다.
“종섭이 새끼 바짝 약 올랐겠지? 다음에도 삼구삼진으로 잡아버리자! 흐흐흐!”
오늘 형수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송종섭 뿐인 듯 싶었다.
< 『해외편 - 21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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