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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마일-209화 (209/221)

< 『해외편 - 209』 >

『해외편 - 209』

야구 선수에게는 흔하게들 말하는 몬스터 시즌이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괴물 같은 시즌을 보낸 선수에게 하는 말인데, 분명한 건 내게 있어 올해가 바로 몬스터 시즌이라는 점이다.

내 경우에는 작년 시즌도 몬스터 시즌이라 불렸다.

메이저리그의 기록을 갈아치웠으니 당연히 몬스터 시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올해는 작년을 뛰어넘는 더욱 믿기지 않는 시즌이었고, 작년에 시즌이 끝났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두 번 다시 작년과 같은 성적을 낼 수 없을 거라고 앞을 다투어 장담을 해댔던 전문가들과 많은 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9월 5일, 뉴욕 양키스와의 LA 홈 경기 2차전에 선발로 등판한 나에게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데빌(Devils).

딱히 선호할 만한 별명은 절대 아니다.

중요한 건 이날 경기에서 뉴욕 양키스는 올 시즌 처음으로 영봉패를 당했다는 사실이다.

9이닝 무실점, 단 한 개의 피안타와 14개의 탈삼진.

전날 있었던 1차전 승리에 기뻐하던 뉴욕 양키스에게는 청천날벼락이었다.

악의 제국을 철저하게 짓밟고 무너트렸다는 말과 함께 몇몇 언론에서 날 데빌이라 부르며, 뉴욕 양키스에게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을 선사했다는 기사가 순식간에 인터넷에 퍼졌다.

무엇보다 이날 영봉패를 당한 뉴욕 양키스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는 걸 고스란히 드러낼 정도로 다음 두 경기까지 내리 패배하면서 1차전을 승리하고도 2, 3, 4차전에서 3연패를 기록했다.

덕분에 지구 1위 자리를 무척이나 위태롭게 유지하며 뉴욕으로 힘없이 돌아가야만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뉴욕 양키스의 3연패에 가장 기뻐한 구단은 아메리칸리그 동부 지구의 2위 보스턴 레드삭스였다.

뉴욕 양키스가 3연패를 당하는 사이 보스턴 레드삭스는 미네소타 트윈스를 상대로 시리즈 스윕을 가져가며 대조되는 3연승으로 시즌 막판까지 1위 자리를 바짝 추격하는 불씨를 살릴 수 있었다.

9월 10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시즌 27번째 선발 등판한 나는 작년 시즌보다 확연하게 팀 전력이 떨어져버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어렵지 않게 시즌 24승을 올릴 수 있었다.

고작 1년 만이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내셔널리그 서부 지구 강팀으로 군림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몰락을 한 건 고작 1년이라는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LA 다저스라 하더라도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는 경각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어쨌든 올 시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사신 역할을 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

여섯 번 선발로 등판해서 모두 승리를 따냈다.

놀랍게도 그 중 절반인 3번은 완봉승이었으며, 나머지 3번도 모두 8이닝까지 마운드를 지켜냈고, 실점은 51이닝 동안 딱 1실점(평균자책점 0.18)밖에 안하면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팬들에게 있어선 사형 선고를 내리는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끝없이 추락해버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서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없었다면 지구 꼴찌라는 불명예를 얻었을 정도로 전력 보강이 시급하다는 걸 깨달은 시즌이었다.

9월 15일에는 뉴욕 메츠를 상대로 대망의 시즌 25승 사냥에 나섰다.

이날의 경기는 모든 언론과 팬들의 관심과 기대가 쏠렸다.

장장 59년 만에 내셔널리그에서 25승 투수가 등장하느냐였기 때문이다.

1969년 뉴욕 메츠의 투수였던 톰 시버가 세웠던 25승 이후로 작년까지 선발 투수가 25승을 세운 기록이 없었다.

2002년 랜디 존슨이 24승을 세운 것이 그나마 가장 근접했던 기록으로 남아 있는 중이다.

물론, 아메리칸리그로 확장하면 1990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밥 웰치가 27승을 기록한 적이 있지만, 그마저도 38년 전의 일이니 25승 투수가 등장하는 건 정말 모든 이들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서 시작된 경기는 예상외로 너무나도 시시했다.

아직까지도 뚜렷하게 공략 방법을 찾지 못한 제로백 슬라이더 앞에 뉴욕 메츠의 타자들은 허무하게 삼진을 당하거나, 범타 처리가 되었다.

4회와 6회에 포심 패스트볼이 공략 당하면서 단타와 장타가 터지긴 했지만 후속 타자의 추가 안타가 나오지 않으면서 득점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8회에 포심 패스트볼을 노리고 타격에 성공한 뉴욕 메츠의 거포 마크 바라스(3루수)에게 치명적인 한 방을 얻어맞음으로서 앞선 4경기 무실점이 5경기 만에 깨지고 말았다.

비록 1실점을 하긴 했지만 여유 있는 투구수로 인해 9회까지 마운드에 올랐고, 17번째 탈삼진을 잡아내면서 경기를 끝낼 수 있었다.

올 시즌 11번째 완투승이었고, 시즌 25승 사냥에 성공한 날이었다.

언론과 팬사이트를 비롯해서 개별적으로 인터넷에 칼럼을 올리는 전문가들은 내 승리와 더불어 제로백 슬라이더가 내년 시즌 전까지는 절대 공략 불가능한 구종으로 올 시즌 LA 다저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까지도 점치고 있었다.

선발 투수 한 명이 해낼 수 있는 역할이 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저스의 상승세가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듯 말하고 있었다.

“맞다! 어제 타일러 콜렉이 한 인터뷰 봤어?”

밥을 먹던 형수가 내게 말했다.

타일러 콜렉이라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선발 투수다.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파이어볼러 중 한 명으로 제로백 슬라이더를 던져보겠다고 공헌한 투수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뭐라고 했는데?”

“제로백 슬라이더라고 던진 공들이 그냥 별 볼일 없는 패스트볼이어서 홈런을 두 방이나 맞았잖아. 그랬더니 경기 끝나고 인터뷰에서 지혁이 네가 던지는 제로백 슬라이더는 그 어떤 투수도 따라 던질 수 없는 ‘척 마구’라고 표현했던데?”

형수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팬들은 제로백 슬라이더를 ‘차지혁 슬라이더’, ‘척 슬라이더’, ‘차 슬라이더’라고 부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버젓이 제로백 슬라이더라는 좋은 이름을 정해놓았음에도 한국 팬들은 어떻게든 내 이름을 집어넣고 싶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LA 다저스 팬들 중에서도 ‘척 슬라이더’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었는데, 타일러 콜렉까지 나서서 ‘척 마구’라는 이상한 말을 해대고 있으니 내 입장에서는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혹시라도 제로백 슬라이더를 연습 중인 투수가 있다면 괜한 고생하지 말고 깨끗하게 포기하라고 하더라. 불과 2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로백 슬라이더를 던질 수 있다고 그렇게 자신하던 타일러 콜렉이 이제는 앞장서서 함부로 던질 수 없는 공이라고 인터뷰를 하고 있으니. 흐흐흐!”

2주.

고작 그 짧은 기간 연습하고 포기를 했다고 하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한 편으로는 제로백 슬라이더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2주라는 시간 동안 제로백 슬라이더가 얼마나 던지기 어려운 구종인지를 확실하게 깨달은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정말 다른 투수들은 던질 수 없을까?

현재도 이 문제를 두고 많은 전문가들이 설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게 되면 여지없이 나오는 질문이기도 했다.

결과만 말하자면 불가능한 건 아니다.

내가 그걸 증명하고 있으니까.

다만, 짧은 시간 내에 제로백 슬라이더를 던질 수 있는 투수는 절대 없을 거란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제로백 슬라이더를 던지게 될 것이다.

그게 언제인지, 누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런 날이 오긴 할 거고, 그때는 제로백 슬라이더 역시 현존하는 마구 중 한 축을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지혁아, 이왕지사 25승까지 했는데 여기서 멈추지 말고 제로백 슬라이더를 앞세워서 28승까지 한 번 가보자! 그리고 퍼펙트 게임 한 번 더 가야 하지 않겠냐? 흐흐흐흐!”

일반적인 투수라면 평생 단 한 번만 해보길 소원하지 않는 퍼펙트 게임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형수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어떤 전문가의 말처럼 내가 확실히 상식 외의 투수 혹은 규격 외의 투수인 건 사실이구나 싶었다.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시즌 마지막 시리즈에서 첫 경기를 장식하기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

올 시즌 콜로라도 로키스와도 무척이나 많은 경기를 했다.

4월 7일을 시작으로 오늘 경기 전까지 4번 선발 등판 경기가 있었고, 그 중 3번이 무실점 완봉승, 나머지 한 번이 8이닝 무실점 경기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만큼이나 살인적인 투수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5월 29일에는 무려 19K를 달성하며 올 시즌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경기를 기록하고 있었다.

작년에 세웠던 9이닝 최다 탈삼진(23K)에는 미치지 못해도 한 경기에서 19번이나 탈삼진을 잡아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 시즌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마지막 경기가 시작됐다.

8이닝 무실점 12탈삼진.

막강 화력을 자랑하는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은 여전히 내 앞에서만큼은 침묵했다.

이로써 콜로라도 로키스를 상대로 나는 5전 5승을 기록했으며, 무엇보다도 평균 자책점 0점을 유지하며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투수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시즌 26승을 달성하면서 벌써부터 1990년 밥 웰치가 달성했던 27승을 뛰어넘을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서른 번째 선발 등판 상대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였다.

9월 25일에 벌어진 경기는 또 다시 엄청난 수의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시즌 27승을 올리면서 밥 웰치의 기록과 타이를 이룰 것인가?

미국 전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등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았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날 최고의 수훈 선수 인터뷰는 내 몫이었다.

15개의 탈삼진을 솎아내며 9이닝동안 단 1점도 실점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날 최고의 선수로 뽑힐 수밖에 없었다.

경기 초반, 2회부터 2사 2, 3루 상황이 벌어지면서 위기도 있었지만 역시 이날도 제로백 슬라이더는 난공불락의 마구로서 위기 탈출의 일등공신 역할을 해주었다.

스물일곱 번째 승리.

밥 웰치의 다승과 타이기록을 이루었다는 점이 기쁘기도 했지만, 더욱더 날 기쁘게 한 건 이날의 승리로 나머지 경기와는 상관없이 LA 다저스가 내셔널리그 서부 지구 1위를 확정지었다는 사실이다.

2위로 바짝 추격을 하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연패의 수렁에 빠지면서 남은 경기와는 상관없이 지구 1위 탈환이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막대한 돈을 앞세워 엄청난 전력을 구축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였지만, 결국은 지구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면서 어쩔 수 없이 와일드 카드를 노려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제 모든 이들의 관심은 시즌 마지막 선발 등판 경기인 10월 1일에 벌어지는 밀워키 브루어스 전으로 이어졌다.

과연 시즌 28승이라는 기록을 쌓을 수 있을 것인가?

22연승을 이어나갈 것인가?

하지만 이런 언론과 팬들의 관심과는 별개로 나는 따로 기대하고 있는 게 있었다.

“드디어 내일이네.”

“그러게! 다른 건 몰라도 종섭이 그 새끼는 확실하게 밟아버려! 알겠지?”

형수의 말에 나는 유치하다는 듯 피식 웃었지만, 내심 내일 투수와 타자로 만나게 될 순간이 벌써부터 기다려지고 있었다.

< 『해외편 - 209』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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