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207』 >
『해외편 - 207』
LA에 도착하니 예상하지 못했던 이들이 나와 형수를 환영해주었다.
LA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단체부터 시작해서 다저스 구단, 다저스 팬들까지 수백 명이나 되는 환영인파가 공항에 모여 있었다.
한인단체야 뭐 그럴 수 있다 싶다.
같은 한국인이니 당연히 금메달을 딴 것에 대한 축하를 해줄 수 있었으니까.
다저스 구단과 다저스 팬들은 솔직히 의외였다.
어쨌든 여긴 미국이다.
결승전 상대인 미국 대표팀을 퍼펙트 게임으로 누르고 금메달을 땄으니 다저스 구단에서야 좋아도 좋은 척을 내기 쉽지 않았고, 다저스 팬들 또한 괜한 악감정에 시달릴 수 있으니 이렇게 뻑적지근하게 나와 형수를 공항에서부터 맞이해준다는 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다.
“차지혁 선수! 장형수 선수! 올림픽 금메달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같은 한국인으로써 이렇게까지 자랑스럽고 뿌듯했던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한인단체의 회장이라는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나와 형수는 억지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금메달 축하합니다.”
다저스 구단 측에서는 맥브라이드 단장이 직접 직원들과 함께 나왔다.
“괜한 구설수에 오르진 않겠습니까?”
걱정스러운 내 말에 맥브라이드 단장은 신경 쓸 필요 없다며 날 안심시켰다.
“올림픽에서 보여줬던 활약만큼 다저스 구단에서 평생 활약을 해주길 바랍니다!”
LA 다저스 공식 서포터즈 회장이라는 백인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나와 악수를 했다. 딱 봐도 전형적인 미국인이었지만, 그는 미국의 패배보다는 다저스의 오랜 승리를 더욱더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고맙기도 했지만, 부담스러운 환영 인사였다.
LA 지역 언론의 기자들도 얼마나 많이 참석을 했는지 연신 카메라를 찍어대며 나와 형수에게 인터뷰를 했고, 장장 2시간 정도를 시달린 끝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비행보다 더 힘들다.”
집으로 들어선 형수가 짐을 대충 내려놓고는 소파에 늘어지듯 주저앉았다.
“미리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뒤로 빠져나가려고?”
형수의 물음에 굳이 대답할 필요가 있냐는 듯 웃었다.
내 웃음에 형수도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이제 올림픽도 끝났으니까 이번 시즌 경기만 잘 마무리하는 일만 남았네. 지혁아! 올해는 반드시 우승하자! 올해는 뭘 해도 될 것 같은 그런 좋은 느낌이 팍팍 든다! 지구 우승부터 하고 챔피언십도 먹고, 월드 시리즈까지 우승해서 올 시즌 최고의 한해를 만들어 보자!”
“그래야지.”
“40년 만에 다저스를 우승으로 이끈 한국인 배터리! 크아~ 죽인다! 흐흐흐흐!”
형수는 벌써부터 월드 시리즈를 우승이라도 한 것마냥 좋아했다.
삑삑삑삑삑삑삑삑.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나와 형수가 깜짝 놀라는 사이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얼굴이 집안으로 들어섰다.
“어머? 벌써 오셨네요?”
주혜영이었다.
그녀는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있었고, 형수가 튕기듯 일어나더니 짐을 빼앗듯이 낚아챘다.
“누님! 뭘 이렇게 잔뜩 사오셨어요?”
“오후에나 오실 줄 알았는데 제가 너무 늦었네요.”
우리가 오늘 날짜에 맞춰서 이것저것 음식을 장만해두려고 했던 게 분명했다.
형수는 벌써부터 주혜영과 함께 주방으로 들어가선 뭘 하려고 했냐며 기대에 가득 찬 음성으로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굳이 나까지 끼어들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조용히 짐을 챙겨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짐 정리를 마치고 간단하게 샤워를 끝낸 후에 긴 비행으로 굳은 몸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부터 시작했다.
올림픽에 출전을 했다가 돌아왔기에 나와 형수는 내일 저녁 애틀란타 원정에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24일 애틀란타 원정 첫 경기부터 나와 형수가 선발로 출전을 해야 했기에 팀 훈련은 빠지더라도 컨디션 조절은 반드시 해놔야만 했다.
스트레칭 이후 약간의 런닝과 맨손 체조로 몸을 충분하게 풀고 있을 때, 형수가 나타났다.
“밥 먹자! 누님이 완전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맛있는 것들로 잔뜩 차려놨다! 흐흐흐!”
이제는 웬만한 음식점 음식보다 주혜영의 음식을 더 좋아하는 형수였다.
‘맛있긴 하지.’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와 형수, 그리고 주혜영이 함께 저녁을 먹으니 그제야 LA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종섭이 말이야.”
형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쉐도우 피칭을 하던 중이라 대답 대신 그냥 듣기만 했다.
“하도 궁금해서 어제 밀워키에 아직 연락하고 있는 코치 한 명이 있어서 물어봤거든. 구단 측에서는 투수보다는 타자로서의 성공 가능성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 마이너리그에서도 투수 쪽보다는 타자 쪽에서 더 성적이 좋았다고 하더라고.”
손가락에 걸어뒀던 천을 풀며 형수를 바라봤다.
“아직까지 연락하는 밀워키 쪽 코치가 있었어?”
“내가 말 안했었나? 벨라지오라고 마이너리그에서 막 올라왔을 때, 내 타격 봐주면서 조언을 해주던 코치 있어. 성격도 엄청 시원시원하고 좋은 사람이야. 유망주들이 마이너리그에서 콜업되서 올라오면 적응하기 쉽도록 꽤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라서 밀워키 코칭 스태프 중에서는 젊은 선수들이 가장 잘 따르는 코치야. 그리고 어차피 메이저리그에서 한 솥밥 먹는 사이인데 굳이 연락을 매정하게 끊을 필요가 없잖아. 막말로 선수만큼이나 코치들도 타 구단으로 잘 옮기는데 언제 또 어디서 만날 줄 알겠어? 인간 관계라는 게 다 둥글둥글 그렇게 가는 것 아니겠냐?”
형수다운 생각이었고, 반박할 이유가 전혀 없는 옳은 소리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타자 송종섭이라.
이건 정말 의외라 할 말이 없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으니까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를 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송종섭이다.
시기상으로 얼마든지 새출발을 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야구를 하지 않았던 생초보가 아니니까 스스로의 노력 여하에 따라 마이너리그의 문을 두드려볼 순 있었을 거다. 거기에 미국 야구 시스템은 한국보다 훨씬 방대하고 자유로웠기에 마이너리그에서 조금만 눈에 띄면 얼마든지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이 가능했으니까.
중요한 건 송종섭이 투수로서의 가능성과 타자로서의 가능성을 모두 보였다는 점이다.
신인 투수가 8이닝 무실점의 호투를 보인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정도면 초특급 투수 유망주라고 하더라도 절대 쉽지 않은 데뷔전이다.
그리고 어제 있었던 경기에서 기사 내용처럼 송종섭은 우익수로 선발 출장을 했다.
3타수 1안타.
데뷔전만큼이나 완벽한 타격 능력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분명 타자로서 기대를 해볼 만한 결과였다. 다만, 수비적인 문제에서 송종섭은 부족한 면이 좀 많이 보였다. 투수다보니 강인한 어깨에서 시작되는 송구는 기가 막혔지만, 아직까지 마음 놓고 외야 수비를 맡기기엔 불안한 점이 보였던 건 사실이다.
어쨌든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송종섭을 상당히 띄우려고 한다는 느낌은 확실하게 받았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능력이 좋다 하더라도 전날 선발 투수로 8이닝을 던진 투수를 다음날 곧바로 우익수로 선발 출전시킨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왜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송종섭을 띄우려고 할까?
구단에게 있어 선수는 곧 상품이다.
즉, 밀워키 브루어스에서는 송종섭을 시즌 후반기에 최대한 많이 노출시키면서 타 구단들의 관심을 받게 하려는 속셈인 거다.
“아직 이른 판단이지만 송종섭이 지난 두 경기에서처럼만 활약을 해준다면야 트레이드 카드로서 정말 좋은 역할을 하겠지만, 밀워키에서 뭘 노리고 송종섭을 애초부터 다른 구단으로 보낼 생각을 하는 걸까?”
형수의 말에 나 역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섣부른 예측이지만, 송종섭은 투수나 타자로서의 쓰임새가 충분히 높았다. 물론, 시간을 두고 꾸준히 경기 결과를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우선 강속구를 던지면서 긴 이닝을 소화할 수 있다는 점, 타자로서의 능력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점을 봤을 때, 굳이 시장에 내놓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
더욱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라는 강팀이 버티고 있는 내셔널리그 중부 지구에서 밀워키 브루어스가 살아남으려면 송종섭처럼 쓰임 많은 선수는 굉장한 이득이 될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어쩌면 트레이드가 아닐 수도 있지.”
내 말에 형수가 배트를 휘두르다 날 바라봤다.
“그럼?”
“제대로 된 보직을 확실하게 잡기 위한 테스트일 수도 있지 않겠어?”
“테스트? 음… 그런가?”
투수로서의 가능성, 그리고 타자로서의 가능성.
확실하게 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송종섭이 투타에서 모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은 하나를 확실하게 선택해야만 한다.
메이저리그는 절대 물렁물렁하지 않다.
투수와 타자를 모두 하겠다는 욕심을 부리면 한 순간 반짝했다가 사라져버릴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았다.
밀워키 브루어스에서는 송종섭에게 투수로서의 기회, 타자로서의 기회를 모두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더욱이 현재 선발진이 완전히 붕괴된 밀워키 브루어스로서는 올 시즌, 지구 우승은 고사하고 와일드카드조차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내년 시즌을 구상하며 선수를 기용해볼 필요성이 있었다.
확실한 건 하나다.
송종섭이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제대로 된 기회를 잡았다는 것.
매년 많은 마이너리거들이 실력이 있음에도 운이 따라주질 않아 빅리그에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기회조차 얻지 못하니, 송종섭은 그런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 무척이나 큰 행운을 잡았다고 할 수 있었다.
“에이! 모르겠다! 더 이상 그 새끼한테 관심 안 줄란다. 당장 나도 확실하게 주전이 아닌 상황에서 남 신경 쓸 시간이 어딨어!”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형수가 신경질을 부리며 배트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웅! 부웅! 부웅! 부웅!
바람을 가르며 매섭게 휘둘러지는 형수의 스윙을 보다 나 역시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워버렸다.
송종섭의 깜짝 등장이 놀라운 건 사실이지만, 더 이상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
8월 24일, 목요일.
8월 4일에 있었던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경기에서 시즌 20승을 올리고 올림픽에 참가를 했으니 정확하게 20일 만에 메이저리그 마운드로 돌아왔다.
다저스 원정 팬들은 거대한 피켓을 들고 날 환영해주었다.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인 다저스 팬들의 응원 속에서 시즌 24번째 선발 등판 경기가 시작됐다.
쐐애애애애액!
퍼- 어어엉!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지에스! 지에스! 지에스! 지에스! 지에스!
제로백 슬라이더에 타자가 꼼짝도 못하고 루킹 삼진을 당하자 다저스 원정 팬들은 ‘지에스’라고 목청껏 소리를 내질렀다. 제로백 슬라이더의 이니셜로 어느새 미국 내에서는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듯 보였다.
이닝을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자 마이크 트라웃을 비롯한 동료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장담하건데 당분간은 네가 던지는 제로백 슬라이더를 칠 수 있는 타자는 없을 거다!”
“그렇게까지 공략이 불가능한 공은 아니에요.”
“척! 네가 던지는 공은 마구야! 일반적인 슬라이더보다 더 꺾이는 각이 더 날카로워서 히팅 포인트를 어디로 가져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도대체 넌 어떻게 그런 무서운 공을 던질 생각을 한 거야?”
말은 저렇게 해도 결국은 어떻게든 공략 방법이 만들어지는 곳이 메이저리그다.
메이저리그 마운드에는 20일 만에 돌아왔지만, 계속해서 야구를 했었기에 특별히 다른 느낌은 없었다.
“역시 팀 에이스가 돌아오니 타선도 폭발을 하네!”
마이크 트라웃의 말에 타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말이야 어떻든 실제로 어제 경기에서 단 한 점도 올리지 못하면서 무득점에 그쳤던 다저스 타선이 오늘은 5회까지 6점을 내며 신나게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마운드를 두드려대고 있었으니 더그아웃 분위기는 즐겁고 유쾌하기만 했다.
“무리하지 말고 오늘은 여기까지 던지도록 하게.”
7이닝 무실점.
2개의 피안타를 맞기는 했지만, 충분히 완벽하다 부를 만한 투구 내용이었다.
더욱이 오랜만에 타선이 폭발하며 9점이나 앞서나가고 있는 중이니 게레로 감독으로서는 올림픽에 출전하고 온 나에게 부담을 줄 필요가 없다 여길거다.
“알겠습니다.”
게레로 감독의 말에 나 역시 굳이 더 이상 던질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8회에 불펜 투수가 2점을 실점했지만 경기가 뒤집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즌 21승을 무난하게 올리며 에이스의 복귀를 알렸다.
< 『해외편 - 20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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