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206』 >
『해외편 - 206』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자 이상할 정도로 감정이 흥분됐다.
대전 호크스에서 한국 시리즈 우승을 했을 때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고, 메이저리그에서 신인상, 사이영상, 시즌 MVP를 받았을 때에도 느낄 수 없는 흥분감이 있었다.
다시는 느껴볼 수 없을지도 모를 감정이었다.
올림픽 금메달로 인해 받은 포상금으로 밤새도록 대표팀 회식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나는 중간에 빠져나왔고, 곧장 부모님과 안젤라가 기다리고 있는 호텔에서 조촐하게 가족끼리 축하파티를 즐겼다.
“내 아들! 자랑스러운 우리 아들! 고맙다!”
살짝 취기가 오른 아버지는 연신 내게 고맙다는 말을 했고, 어머니 또한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며 날 다독여주셨다.
“구단에서도 엄청 좋아하겠네?”
“아시안 게임이 있어서 크게 걱정하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미리 이런 상황이 되었으니 나쁠 이유는 없겠지. 어쩌면 아시안 게임에 차출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할 수도 있겠네.”
그래도 오빠 일이라고 제법 알아봤는지 지아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탄산음료수를 홀짝였다.
“그런데 오빠.”
“응?”
“결혼은 언제 하려고?”
“뭐?”
갑작스러운 질문에 음료를 뿜어낼 뻔했다.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던 안젤라를 바라보기도 했다.
“오빠에게 언니가 훨씬 과분하다는 거 오빠도 알지?”
“알지.”
외모, 성격, 능력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여자가 안젤라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나마 당장은 내가 유명세가 더 높고, 경제력도 좋지만 말 그대로 현재의 일일뿐이다.
향후 몇 년 후에는 그리고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면 얼마든지 역전이 될 일이었다.
생명력이 짧은 운동 선수의 한계인 셈이다.
“언니가 그랬어. 오빠랑 결혼하고 싶다고.”
다시 한 번 당황스러웠다.
“안젤라가?”
지아는 장난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언니는 처음부터 유명한 연예인 생활을 꿈꾸지 않았다고 하던데? 할 수만 있다면 그냥 지금이라도 은퇴하고 오빠랑 같이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어.”
세 번째 당황.
안젤라가 그렇게 말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심장은 이미 누군가 방망이질을 하는 것마냥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정말로 안젤라가 지아에게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다시 안젤라를 바라보니 그녀는 나와 지아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는지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봐. 오빠도 언니랑 결혼하고 싶지?”
“그, 그건…….”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확실히 안젤라와 결혼해서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 건 사실이다.
다만, 자신의 일이 있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며 행복해하는 안젤라에게 결혼이라는 치명타를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
이제 막 뜨기 시작한 젊은 여자 배우가 결혼을 한다면 그 인기가 얼마나 유지 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유지는커녕, 당장 곤두박질 칠 것만 같았다.
“언니는 연예인 생활을 그렇게 즐거워하지 않는 것 같아. 모델로서 활동하는 건 좋은데, 오랜 시간 영화 촬영을 해보니까 생각만큼 즐겁지 않다고 했어.”
“그럴 리가.”
“왜?”
“사실은…….”
나는 지아에게 안젤라가 호주에서 6개월 동안 영화 촬영을 했던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오빠는 언니가 영화 촬영 하는 기간 동안 전화를 할 때마다 밝은 목소리로 즐겁게 말을 했다는 거지? 그래서 그걸 증거로 언니가 영화 촬영을 행복하게 여기고 있다는 거고?”
“응.”
내 대답에 지아가 한심하다는 듯 날 쳐다봤다.
“그럼 언니가 힘들다고 오빠한테 투정부리고,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해야 오빠는 ‘아~ 안젤라가 영화 촬영을 굉장히 힘들어하는 구나’라고 생각 할 거야?”
“그건 아니고.”
“오빠는 오빠가 힘들다고 고스란히 안젤라 언니한테 다 말하고 그럴 수 있어?”
지아의 말에 그제야 나는 내가 무엇을 잘 못 생각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배려.
안젤라는 내가 걱정하고 신경 쓸까봐 힘들어도 힘들다는 투정 한 번 한 적이 없었던 거다.
‘그때 설마?’
영화 촬영을 마치고 곧바로 LA로 왔을 때, 안젤라가 내게 영화 촬영이 힘들었다며 다시는 못할 것 같다고 했던 하소연이 은근히 진심을 보인 거란 말인가?
“오빠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 좀 해봐. 안젤라 언니처럼 인기를 얻고 있는 여배우가 스케줄이 없어서 이렇게 오랜 시간 한국에서 머물겠어?”
“그야…….”
“그야 뭐? 미리 스케줄 조정을 끝냈다는 언니 말? 그걸 그대로 또 믿고 있었냐? 상식적으로 지금 안젤라 언니의 행동을 생각해봐. 지금 언니가 오빠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는지 좀 깊게 고민 좀 해보라고! 이 답답한 인간아!”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지아로 인해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든 아버지를 제외한 어머니와 안젤라가 무슨 일이냐는 듯 우리를 바라봤다.
“넝쿨째 굴러온 황금을 돌같이 바라보는 멍청한 짓 좀 작작해.”
지아는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낮게 으르렁거리고는 어머니와 안젤라의 곁으로 웃는 얼굴로 다가갔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지아는 정말 제 나이 또래의 여자애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좋게 말하면 철이 일찍 들었다는 건데, 그 이유가 어쩐지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진 않았다.
그나저나 안젤라가 내게 신호를 보내는 거라고?
지아의 충고를 받아들여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 내 곁으로 안젤라가 다가왔다.
“피곤하지 않아요?”
“괜찮아요.”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금메달 딴 거 축하해요.”
“미국 대표팀을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했는데 정말 조금도 내가 밉지 않아요?”
“그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죠. 척은 내가 사랑하는 남자잖아요.”
예쁘게 웃는 안젤라의 모습에 나는 고맙다며 마주 웃었다.
“내일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죠?”
“척의 경기도 다 끝났으니까 더 이상 한국에 남아 있을 핑계거리가 없어요.”
아쉬움이 가득한 안젤라의 말이었다.
“한국 관광은 괜찮았어요?”
안젤라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척의 부모님과 지아가 너무 잘 대해 줘서 이렇게까지 즐거운 여행을 했던 적이 있었나 싶어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더 좋았던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척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진심이 느껴지는 안젤라의 말에 나 역시 안심이 됐다.
올림픽 경기에 집중해야 했기에 그녀를 너무 방치한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던 건 사실이다. 다행스럽게도 부모님과 지아가 내 몫을 충분히 해주고도 남은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안젤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말이에요. 안젤라는 지금 생활에…….”
말을 하다 작게 들리는 안젤라의 숨소리에 집중했다.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덧 새벽 2시 반이 넘은 상태였다.
충분히 피곤하고 졸릴 시간이었다.
안젤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작게 말했다.
“나와 결혼 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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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라는 오전 비행기로 미국으로 돌아갔고, 공항까지 배웅을 하는 동안 나는 그녀의 손을 항상 잡고 있었다.
부모님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셨고, 지아는 틈이 날 때 마다 안젤라에게 잘하라는 경고를 했다.
안젤라가 떠나고 나 역시 오후에 형수와 함께 다저스 구단주가 보내준 전세기를 타고 LA로 비행을 시작했다.
굳이 전세기까지 보내줄 필요는 없었는데 구단에서는 힘들게 올림픽 경기를 치른 나와 형수에 대한 배려라며 편안하게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나와 형수가 LA로 향하는 사이 제34회 부산 올림픽이 폐막식을 가졌다.
한국은 종합 순위 6위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대다수의 언론은 아직까지도 미국 대표팀을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기록한 내 이야기로 시끌시끌했다.
“이래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무슨 소리냐는 듯 형수를 바라보니 녀석이 ‘흐흐’거리며 웃었다.
“친구 잘 둬서 내가 이런 호강을 계속 받는 거 아니냐? 솔직히 말해서 너 아니었으면 4강이나 올라갔겠냐? 어쨌든 고맙다. 네 덕분에 군대 면제도 일찍 받게 됐고, 확실히 네가 미국으로 오면서 내 인생도 확 풀리는 것 같다. 그래서 부탁인데, 어딜 가더라도 나 좀 데리고 다녀라. 알겠지?”
형수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역시 전세기라 그런지 편안한 비행을 즐길 수 있었다.
“24일 애틀란타 원정 첫 경기 선발이라고 했지?”
오전에 게레로 감독이 직접 전화를 줘서 내게 일정을 상의했었다.
24일이면 선발로 마운드에 오르기엔 문제가 없었기에 그러겠다고 말을 해둔 상태였다.
“급할 만도 하지. 너 없는 사이에 샌디에이고가 1경기 차이로 바짝 추격했다고 하니 하루라도 일찍 널 등판시키고 싶겠지.”
내셔널리그 서부 지구는 굉장히 치열한 순위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올 시즌 대대적으로 전력을 보강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상승세가 LA 다저스의 1위 자리를 매 경기마다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 시즌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시즌 막판까지 애를 먹이더니 이번에는 샌디에이고가 한 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형수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왜?”
“지혁아! 이것 좀 봐봐!”
형수의 다급한 음성에 무슨 일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형수의 곁으로 걸어갔다.
형수가 내게 내민 핸드폰 화면에는 밀워키 브루어스의 경기에 대한 기사가 담겨 있었다.
기사 내용은 밀워키 브루어스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거였다.
그 중 주목해서 볼 만한 건 이날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 등판한 밀워키 브루어스의 투수가 마이너리그에서 올라와 메이저리그에 첫 데뷔 무대를 갖었다는 점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막강한 타선을 상대로 8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제리 송?”
메이저리그에 데뷔해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8이닝 무실점의 호투를 보인 신인 투수가 동양인이라는 점과 이름이 제리 송이라는 것 역시 관심을 끌기는 했지만,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었다.
아, 한 가지 더 있긴 했다.
8이닝 무실점 호투만큼이나 놀라운 타격 능력이었다.
무려 3타수 3안타. 그 중 하나는 홈런까지 기록을 했으니 흔한 말로 제대로 미쳐서 날뛴 경기였다.
“누군지 모르겠어?”
형수의 말에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봤다.
“누군데?”
“사진 잘 봐봐. 생각나는 사람 없어?”
기사에 실린 사진을 확대했다.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의 제리 송은 살짝 마른 느낌이 드는 날카로운 인상의 동양인이었다.
특히, 뺨에는 징그러울 정도로 선명한 흉터 자국이 있었는데 그 덕분에 더욱더 인상이 사납게 보이기도 했다.
“모르겠어?”
“글쎄. 잘 모르겠는데?”
“잘 봐봐! 머리카락이 좀 짧고, 살집을 붙여봐. 분명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거야!”
형수의 말에 그게 쉽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이미지를 그려나갔다.
그러길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송종섭?”
내 말에 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해! 제리 송? 웃기고 있네! 그 새끼 송종섭이야!”
형수의 확신에 찬 음성에 나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시 기사를 자세히 읽어봤다.
이날 경기에서 제리 송, 그러니까 송종섭은 최고 구속 98마일까지 나오는 강속구를 던졌다고 했다. 여기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타자들을 상대로 10개의 탈삼진을 기록했고, 단 4개의 피안타만 허용함으로써 무척이나 인상적인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뤘다고 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외야수?”
기사 말미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송종섭은 선발 투수이면서도 외야수로서 내일 경기에도 출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외야수는 도대체 또 뭐야? 궁금해서 미치겠네!”
형수만큼이나 궁금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송종섭의 이름을 이렇게 메이저리그에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 『해외편 - 20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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