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205』 >
『해외편 - 205』
제로백 슬라이더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한 더그레이 세인트는 투심 패스트볼에 헛스윙을 하며 오늘 경기 두 번째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다음 타자, 토니 브렉맨 역시 어설프게 스탠스를 밟고 섰다가 바깥쪽으로 빠지는 컷 패스트볼에 어정쩡한 자세로 헛스윙을 했다.
18K.
미국 대표팀의 자존심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경기력 속에서 그가 타석에 들어섰다.
마이크 테일러.
두 번 연속 삼진을 당한 마이크 테일러의 세 번째 타석.
이번만큼은 절대 삼진을 당하지 않겠다는 듯 잔뜩 벼르고 있는 표정과 앞선 더그레이 세인트나 토니 브렉맨과는 전혀 다르게 평소의 스탠스를 밟고 선 타격 위치가 제로백 슬라이더를 전혀 의식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어쩌면 의식하지 않으려는 척 하는 걸지도 모르지.’
궁금하면 던져보면 그만이다.
초구부터 몸 쪽으로 바짝 붙이는 제로백 슬라이더 사인을 형수에게 건넸다.
마스크 안쪽에서 형수의 입가가 익살스럽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타자의 헛스윙을 이끌어 냈을 때, 투수만큼이나 포수 역시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때 형수는 그 정도가 좀 심한 편인 듯 싶었다.
어쩌면 같은 한국인으로서의 동질감이 강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로진백을 손에 묻히다 문득, 머릿속을 관통하고 가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노리고 있는 건가?’
마이크 테일러의 도발적인 태도가 갑작스럽게 신경을 긁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평소보다 하체가 가벼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타석에 선 타자의 하체는 유연해야 하는 건 맞지만, 어느 정도 굳건함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중심 이동이 유연해지고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허리 회전력의 폭발적인 힘을 지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장타 위주의 풀스윙을 하는 마이크 테일러의 하체가 가볍다는 건 확실히 의심을 해볼 만한 일이다.
정면 승부를 피할 생각은 없지만, 타자의 노림수에 호락호락 당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형수에게 곧바로 다시 사인을 보냈다.
‘한 가운데 포심 패스트볼로 간다.’
웃고 있던 형수의 눈이 일그러지는 모습이 보였지만, 상관하지 않고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만약, 초구부터 제로백 슬라이더를 노리고 있다면.
‘발부터 빠지겠지.’
제로백 슬라이더의 특성상 절대로 지금의 타격 위치에서는 정타를 만들어 내리가 쉽지 않다.
막말로 제로백 슬라이더를 조금 낮게 본다면 그저 빠르기만 한 슬라이더일 뿐이다.
다만, 강속구와 슬라이더가 더해졌기에 타자 입장에서는 몸 쪽으로 예리하게 꺾여 들어오는 공을 제대로 때려내기가 쉽지 않은 것뿐.
미리 대비하고 뒤로 물러나서 스윙을 한다면 제로백 슬라이더라 하더라도 메이저리그의 정상급 타자들에게 얼마든지 공략 당할 수 있다.
물론, 뒤로 빠져서 타격을 한다는 게 쉽지는 않지만 말이다.
와인드업을 끝내고 공을 던지자, 기다렸다는 듯 마이크 테일러가 뒤로 한 발 물러나며 허리를 비틀었다.
역시 노렸다.
더그레이 세인트와 토니 브렉맨이 빠져서 서 있던 것이 마이크 테일러의 노림수에 함정인 셈이다.
하지만.
부- 웅!
퍼어- 어어엉!
“스윙!”
마이크 테일러의 노림수를 미리 예상하고 한 가운데로 100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을 던진 내가 이번 대결의 승자가 되었을 뿐이다.
헛스윙을 하고 난 마이크 테일러는 포수 미트를 확인하고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그가 어떤 노림수로 타석에 섰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스윙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수많은 관중들과 TV를 통해 중계방송을 시청하는 시청자들 앞에서 잔뜩 겁을 집어 먹고는 뒷걸음질을 치며 무식하게 배트를 휘돌린 타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톡톡히 망신을 당한 셈이다.
고개를 숙이며 킥킥 거리고 있는 형수의 모습이 보였고, 그런 형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마이크 테일러의 모습도 보였다.
주심이 가볍게 경고를 주자 그제야 형수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게 공을 던졌다.
‘얼굴 터지겠네.’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마이크 테일러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거구의 백인이 붉은 노을을 뒤집어 쓴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으니 꽤나 볼만했다.
웃지 말아야 하는데 괜히 나 역시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애써 심호흡을 하며 타격 자세를 잡는 마이크 테일러였지만, 이미 냉정이 깨져버린 그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컷 패스트볼과 몸 쪽으로 바짝 붙어 들어오는 포심 패스트볼에 연속으로 헛스윙을 하며 삼구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으아아아아아악!”
콰작!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배트로 홈플레이트를 내리친 마이크 테일러는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이미 반토막이 나버린 배트마저 과격하게 내던졌고, 그 행동에 주심은 곧바로 퇴장 명령을 내려버렸다.
반쯤 이성을 잃어버린 마이크 테일러는 주심을 향해 침을 튀겨가며 ‘F’발음이 명확하게 보일 정도로 욕설을 퍼부으며 최악의 이미지를 남기고 말았다.
“저 새끼 완전 정신줄 놨네. 흐흐흐!”
형수가 재밌다는 듯 두 명의 코치에게 끌려가는 마이크 테일러를 바라보며 웃었다.
“세 타석 연속 삼진이니까. 무엇보다 방금 타석에서는 초구부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마지막은 화려하게 삼구삼진을 당했으니 미국만이 금메달의 자격이 있다고 그렇게 거만하게 인터뷰를 하던 놈인데 저럴 만 하지. 큭큭큭!”
양동호 선배가 우리 곁으로 다가와 형수만큼이나 재밌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어제 대만과의 경기에서 호투를 보여주었던 양동호 선배였기에 이번 올림픽에서 자신의 몫은 충분히 했다 여기는지 일부 불편해 보이는 선수들과는 전혀 다르게 무척이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그나저나 지혁아.”
양동호 선배가 은근한 눈길로 날 바라봤다.
“예. 선배님.”
“그냥 편안하게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예.”
“현우 말대로 시간이 좀 필요하겠네. 어쨌든 너 말이야, 제로백 슬라이더 비법 좀 알려주라.”
“그게…….”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알려준다고 던질 수 있는 투수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싶을 뿐이다.
기본적으로 100마일의 공을 던질 수 있는 강속구 투수여야 하고, 컨트롤도 가능해야 한다.
이 전제 조건이 깔리지 않는 이상은 어느 누구도 제로백 슬라이더를 던질 수가 없다.
아무리 내가 가르쳐준다고 해도 결국은 그저 그런 슬라이더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런 걸 모를 양동호 선배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묻는다는 건,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기 때문일 거다.
“제로백 슬라이더는…….”
어차피 숨길 것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었기에 솔직하게 말했다.
내 설명을 모두 듣고 난 후에야 양동호 선배가 입맛을 다셨다.
“역시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다거나, 혹은 슬라이더의 무브먼트를 조금 더 다듬을 수 있지 않을까 했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괜한 소리해서 미안했다. 그래도 네 말을 들으니까 다행이란 생각도 좀 든다.”
“예?”
“이 세상에서 제로백 슬라이더를 던질 수 있는 투수는 오직 너 한 사람뿐이잖아? 나만 못 던지는 게 아니라 누구도 못 던진다고 생각하니까 속이 시원해서! 큭큭큭!”
양동호 선배의 말에 나는 벙찐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짜식 그런 표정 지으니까 이제야 좀 귀엽네! 아! 그리고 이왕이면 지금처럼 퍼펙트로 끝내라. 파이팅!”
내 볼을 톡톡 건드리고 몸을 돌리는 양동호 선배의 모습에 곁에 서 있던 형수가 웃겨 죽겠다는 듯 배를 잡고 웃어댔다.
“천하의 차지혁도 대선배 앞에서는 귀엽기만 한 후배였어! 흐흐흐흐!”
처음이었다.
나를 귀여운 후배 취급해준 사람은.
온 몸에 이상한 벌레가 바글바글 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따악!
드디어 터졌다.
철벽처럼 막아서고 있던 루카스 제임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와 형수의 예상보다 한 이닝 더 늘어난 8회가 되어서야 루카스 제임스의 체력이 떨어졌고, 곧바로 이전까지 준수하게 유지해왔던 제구력에 문제가 생겼다.
선두 타자에게 볼넷을 허용하고 후속 타자에게 곧바로 2루타를 맞고 나서야 미국 대표팀에서 투수를 교체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7회까지 잘 던지고 있던 투수를 갑작스럽게 8회에 교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볼넷을 줬다는 이유로 마운드에 올라가는 것도 너무 유난스럽거나, 투수를 믿지 못하게 만들어 심리적으로 흔들리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막았지만 여기까지가 루카스 제임스의 한계다.
선발 투수가 7회를 무실점으로 막았으면 정말 자신의 몫을 모두 해준 셈이다.
아쉬운 눈으로 마운드를 내려가는 루카스 제임스를 향해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무사 2, 3루 상황에서 루카스 제임스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불펜 투수로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로하 벨라지오였다. 좌완 특급 불펜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로하 벨라지오였기에 위기 상황이지만 한 번 정도는 믿어봄직한 투수인 건 분명했다.
반대로 한국 대표팀은 곧바로 3루 주자를 발 빠른 선수로 교체하면서 어떻게든 외야로 공을 보내기 위한 작전을 펼쳤고, 그 결과 아웃 카운트를 하나를 남겨두고 겨우 희생 플라이를 만들어 내면서 소중한 1점을 득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8회 말 수비에서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동료들의 믿음에 부합하는 피칭으로 삼진 2개와 내야 땅볼 하나로 무실점 행진을 그리고 퍼펙트 게임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9회 초 한국 팀의 공격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갔고, 정규이닝 마지막 수비가 시작됐다.
“이제 마지막이다. 이번 수비만 끝내면 올림픽 금메달이다. 깔끔하게 마무리 하자, 지혁아!”
형수의 말에 나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올림픽 금메달.
절대 별 것 아닌 일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국위선양을 할 수 있는 일이고, 그 보답으로 군대 면제를 받을 수 있으니까.
물론, 야구 따위로 무슨 국위선양이라고 목소리를 높일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어차피 군대 면제라는 혜택을 노린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반대로 그만큼의 혜택을 나라에서 걸었다는 점을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마운드에 서서 야수들을 돌아봤다.
모두의 얼굴에 밝은 웃음이 엿보였다.
군대 면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은 고참 선수들이 수두룩했지만, 그들이 얼굴엔 자랑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부산 사직 구장이 들썩거릴 정도로 내 이름을 외치는 관중들의 얼굴에도 긴장감보다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 행복감이 더 많이 담겨 있었다.
고작 1점 차이 밖에 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 다는 사실이 부담되기보단 내 가슴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날 이렇게까지 믿고 있구나.
내가 저들에게 정말 과분할 정도로 신뢰를 받고 있구나.
이미 한국 대표팀이 금메달을 목에 건 것처럼 들떠있는 상황 속에서 타석으로 타자가 들어섰다.
세계 최강국이라는 자부심을 평생 담고 살아왔을 미국 타자조차 지금 이 순간에는 잔뜩 위축되어 주눅 든 모습이 눈에 보였다.
만약, 마운드에 서 있는 투수가 내가 아니었어도 저런 모습을 보였을까?
오만하다 부를지 모르겠지만, 고개가 저어졌다.
이 상황을 뒤집고 말겠다는 자신감과 의욕적인 모습으로 타석에 들어섰을 가능성이 컸다.
가볍게 숨을 토해내고는 피처 플레이트에 왼쪽 다리를 올렸다.
‘멋지게 마무리하는 거야.’
퍼펙트 게임이 되지 않아도 좋다.
안타를 맞아도 좋고, 출루를 허용해도 좋다.
1점.
단 한 점만 지켜내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올림픽 마지막 이닝을 시작했다.
< 『해외편 - 20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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