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204』 >
『해외편 - 204』
-세이프! 주심 판정 결과 황정태 선수 홈에서 세이프 판정을 받았습니다. 다시 한 번 비디오 판독 영상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아슬아슬했지만 황정태 선수의 왼발이 조금 더 빨리 홈플레이트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분명히 보입니다! 황정태 선수의 과감한 홈 쇄도는 오늘 경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한국 대표팀의 집중력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김장석 해설위원님.
-맞습니다. 황정태 선수 리드폭을 넓게 가져가지도 않았지만, 와일드 피치가 나오는 순간 곧바로 스타트를 끊으면서 홈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보통의 경우였다면 홈으로 달려들지 못했을 텐데, 오늘 경기 어떻게든 승리하고 말겠다는 한국 대표팀의 집중력 있는 경기력이 결국은 이렇게 또 한 점을 달아나는 점수를 내고 말았습니다.
-황정태 선수의 득점으로 주자는 3루, 1루에서 2루로 바뀌었습니다. 타석에는 여전히 오늘 중견수로 출장해서 멋진 호수비를 보여줬던 강석민 선수가 서 있습니다.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투수 던졌습니다. 쳤습니다! 바깥 쪽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들어온 슬라이더를 가볍게 밀어치는 강석민! 우중간을 깨끗하게 꿰뚫는 2루타 코스입니다! 2루 주자 전영무 홈인! 다시 한 점 추가합니다! 이로서 스코어는 5대2! 1점 차까지 바짝 쫓아오던 대만 대표팀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한국 대표팀입니다!
최종 스코어 6:2.
대만과의 대결에서 한국 대표팀은 승리했다.
지난 경기에서의 패배를 반드시 되갚겠다는 의지와 결승 진출이라는 강렬한 열망이 담긴 경기였다.
경기 초반의 분위기는 팽팽했다.
양 팀의 투수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높은 마운드의 높이에 타자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경기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한 건 아주 사소한 집중력 차이였다.
가볍게 아웃 카운트를 올릴 수 있는 타구에서 에러를 범하면서 대만의 선발 투수가 먼저 흔들렸고, 점수를 내주고 말았다.
점수가 나기 시작하니 대만 타자들도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3점을 리드하고 있던 한국 대표팀은 7회에 대만 대표팀이 2점을 내며 턱밑까지 바짝 추격을 해왔지만, 8회에 볼넷과 와일드 피치가 결국 승부를 가르고 말았다.
결승 진출에 성공한 한국 대표팀의 분위기는 이미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것처럼 좋아했다.
“내일은 무조건 우리가 이긴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세계 최강의 투수 차지혁이 있으니까!”
정현우 선배의 외침에 선수들 모두 크게 웃으며 동의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부담도 되지 않냐?”
형수가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부담은 솔직히 된다.
나도 사람이니까.
그런데 자신감이 더 컸다.
결승 상대는 예상대로 미국이었지만,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상대들이었다.
무엇보다 제로백 슬라이더를 구사할 수 있게 된 이상, 내일 경기가 어려울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부웅!
“스윙! 타자 아웃!”
허공에 빈 스윙을 하고 난 테리 레드메인은 믿겨지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워싱턴 내셔널스의 주전 포수이자, 내셔널리그를 대표하는 포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테리 레드메인이었지만 제로백 슬라이더 앞에서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올림픽 결승전, 상대는 역대 최강의 전력이라는 평가가 부족하지 않은 미국 대표팀.
아무리 비교 분석을 해봐도 한국 대표팀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유일한 희망이라면 역시 내가 선발로 등판해서 미국 타자들을 봉쇄하는 것뿐이지만, 중요한 건 투수가 아무리 9이닝을 퍼펙트로 던진다 해도 점수는 단 1점도 올라가지 않으니 타자들이 점수를 내지 못하는 이상 무승부 밖에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9이닝을 무실점으로 완벽하게 막을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최대한 긴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기 위해 노력은 하겠지만, 결과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니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미국 측의 우세를 점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일본전을 계기로 제로백 슬라이더를 구사하게 되자 한국 측에 우세를 점치는 이들이 속속 등장했다.
투수가 아무리 잘 막아도 이길 수 없다는 건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지만, 중요한 건 과연 막을 수 있느냐와 무조건 막느냐의 차이였다.
단 1점이라도 뽑아야 한다는 것과 단 1점만 뽑으면 된다는 타자들의 심리적 여유가 상대가 미국이라는 것과 결승전이라는 긴장을 풀어줬고, 그만큼 편안한 심리 상태로 경기에 임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스윙! 타자 아웃!”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트리플A에서 꽤나 활약하고 있다는 존 오일러가 몸 쪽으로 붙어오는 제로백 슬라이더에 잔뜩 겁을 먹고 우스꽝스러운 스윙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5회 말, 미국의 공격이 끝난 상황에서 나는 단 한 명의 타자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았다.
더불어 15명의 타자를 상대로 13개의 삼진을 뽑아내는 엄청난 호투를 보이고 있었다.
퍼펙트 삼진 경기라는 전무후무한 역사적인 경기를 만들어 냈던 일본전과 비교가 될 수도 있지만, 상대가 미국이라는 점과 이미 제로백 슬라이더의 위력을 머릿속에 각인하고 타석에 들어선 미국 타자들을 상대로 단 두 번을 제외한 나머지 열세 번을 모두 삼진으로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제로백 슬라이더가 대단하다고 해도 계속해서 그것만 던질 수도 없기에 미국 타자들은 애초부터 패스트볼, 혹은 그 외의 변화구를 노리고 스윙을 했고 그 결과 단 두 명만이 연속 삼진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자자! 이제 점수 좀 뽑아보자! 단 한 점이면 되잖아!”
대표팀에 차출은 되었지만, 경쟁에서 밀리는 바람에 출전 기회가 적었던 정현우 선배는 오늘 같은 중요한 시합에 주전 2루수로 출전했기 때문인지 무척이나 의욕적이었다.
“현우야, 그러니까 먼저 2루까지만 나가봐. 내가 바로 타점 올려 줄 테니까.”
이규환 선배의 말에 정현우 선배가 알겠다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오늘 분위기 좋다. 그렇지?”
형수가 내 옆에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상대가 미국이고, 결승전이지만 선수단의 분위기는 확실히 밝았다.
“이래서 투수가 중요하다니까. 에이스! 캬아~ 타자들은 절대 들어볼 수 없는 그 말! 좋겠다! 넌 어디가든 에이스라는 소리만 들을 테니까. 흐흐흐!”
실없는 형수의 말에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오늘 루카스 공 죽이네. 벌써 6회가 됐는데도 힘이 빠지질 않네. 역시 투수를 자극하는 건 같은 투수뿐인가 봐.”
형수의 말을 들으며 마운드에 오른 미국 대표팀의 선발 투수, 루카스 제임스를 바라봤다.
투수로서는 작다고 할 수 있는 177cm의 작은 키, 75kg도 되지 않는 체구, 여자라고 오해를 받을 정도로 고운 턱선과 여심을 자극하는 외모를 가진 루카스 제임스는 겉모습만 보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선수가 있다.
팀 린스컴(Tim Lincecum).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투구폼을 가진 투수 중 한 명으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팀 린스컴은 데뷔 이듬해부터 2년 연속 사이영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했던 투수다.
그런 팀 린스컴의 그림자가 덧씌워져 보이는 루카스 제임스다.
비록, 루카스 제임스가 팀 린스컴처럼 화려하다 싶을 정도의 역동적인 투구폼이나 사이영상 수상과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는 없었지만, 평균 구속 97마일에 이를 정도로 빠른 강속구를 구사하는 것과 탬파베이 레이스의 에이스 투수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큼은 제2의 린스컴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년 시즌부터 탬파베이랑 영 사이가 좋질 않다고 소문이 많았는데 이번 올림픽 출전 때문에 말들이 더 많아지겠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구단의 요청을 끝까지 뿌리치고 올림픽에 참가한 루카스 제임스였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내가 루카스라고 하더라도 구단에 정내미가 뚝뚝 떨어지겠다. 양키스랑 레드삭스라는 거대 공룡 싸움에 끼어서 승수 쌓기도 힘든데 그나마 힘이 되는 야수들을 해마다 이적시키면서 이적료나 챙기는 구단을 어떤 투수가 좋아하겠어? 지혁이 너라고 하더라도 탬파베이는 아니질 않냐?”
“좋다고 할 순 없지. 구단이 탬파베이 한 곳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메이저리그 6년 차에 접어든 루카스 제임스는 어느 구단을 가더라도 에이스 내지는 준에이스 소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난 선발 투수다.
탬파베이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구단에 대한 사랑과 의리로 지금까지 남아 있었지만, 비슷한 수준의 투수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한 승수와 리그 우승은 꿈도 못 꾸는 구단에게 이제는 지칠 때도 됐다는 말이 마냥 헛소리로만 치부할 순 없었다.
“루카스가 다저스로 온다면 진짜 대박일텐데. 안 그렇냐?”
“말해 뭐해. 엄청난 전력이지.”
“지혁이 너부터 시작해서 딜런 아담스, 존 로더키, 여기에 루카스 제임스까지 가세하면 초호화 선발 라인업 완성이네.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흐흐흐!”
형수의 말이 맞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어딜 가든 1, 2선발 자리를 맡을 수 있는 루카스 제임스가 굳이 다저스에 와서 1선발은 꿈도 못 꾸고 2선발 자리도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을 스스로 자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월드 시리즈 우승에 대한 목마름이 간절하다면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다저스가 당장 우승을 한 구단도 아니니 굳이 루카스 제임스가 다저스로 이적까지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 들었다.
‘만약, 우승을 하고 싶다면 다저스 보다는 차라리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타선인 샌디에이고가 낫기도 하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반드시 출루를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정현우 선배가 삼진을 당하곤 민망한 얼굴로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키도 작고 여리여리한 놈이 뭐 저렇게 공이 빠르냐며 투덜거리는 정현우 선배의 모습에 몇몇 선수들이 피식 웃음을 흘릴 정도로 더그아웃 분위기는 아직까지 좋았다.
“지금으로서는 7회 정도에 루카스의 체력이 떨어질 기다려야겠네.”
루카스 제임스의 유일한 단점, 체력.
메이저리그에서도 7회 이후부터는 체력적으로 구속과 구위가 떨어지는 단점을 자주 보였기에 오늘 경기에서 그의 공을 공략하려면 아무래도 7회가 넘어야 할 것 같았다.
결국, 한국 대표팀은 6회 초에도 무득점으로 끝이 났다.
6회 말,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졌다.
하위 타선이었고, 7, 8, 9번 타자들이 모두 트리플A에서 활약하고 있는 마이너리거들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삼진 3개를 추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7회 초 한국 공격에서는 형수와 황정태 선배가 나란히 안타를 기록했지만 후속 타자들이 내야 뜬공과 땅볼로 타점을 올리지 못하면서 7회에도 무득점으로 이닝이 끝나고 말았다.
‘다시 상위 타선부터 시작이네.’
미국 대표팀의 상위 타선은 화려하다.
1번 타자 더그레이 세인트부터 시작해서 2번 토니 브렉맨, 3번 마이크 테일러, 4번 웨인 프레이저까지 올스타 타선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 정도 타선이라면 메이저리그 구단의 어떤 에이스 투수라도 긴장을 할 수밖에 없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렇게 화려한 면면을 자랑하는 타자들 가운데 오늘 내게서 두 번 삼진을 당하지 않은 타자는 더그레이 세인트와 토니 브렉맨 밖에 없었으니까.
안타도 아니고 삼진을 두 번 연속 당하지 않은 타자를 말하게 될 줄이야.
타석에 들어선 더그레이 세인트는 평소보다 바깥쪽으로 한 발 정도 물러나서 서 있었다.
몸 쪽으로 파고들어오는 제로백 슬라이더의 위력을 실감하고 내세운 대처다.
당연히 바깥쪽 공에 대한 타격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안타가 아닌 커트에만 집중하면 더그레이 세인트의 배트 스피드나 정교한 타격 센스라면 루킹 삼진을 당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타자 역시도 평소의 거리감이라는 게 존재한다.
때문에 모든 타자들은 타석에 설 때마다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귀신 같이 찾아간다.
홈 플레이트와의 거리에 대한 오차도 거의 존재하지 않을 정도다.
평소에도 투수의 성향에 맞춰서 스탠스를 변경할 정도로 정교한 타격 기계라 불리는 더그레이 세인트였지만.
문제는.
부웅!
“스윙! 타자 아웃!”
내겐 제로백 슬라이더만 있는 게 아니다.
< 『해외편 - 20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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