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203』 >
『해외편 - 203』
제로백 슬라이더.
굳이 새로운 명칭이 필요할까에 대해서 고민을 했지만, 랜디 존슨과 커쇼 모두 당연히 새로운 구종에 대한 정식 명칭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해주었기에 무수히 많은 날을 고민하고 고민하다 이름을 정하기로 했다.
물론, 처음부터 ‘제로백 슬라이더’라는 이름을 정한 건 아니었다.
부끄럽게도 가장 처음 생각했었던 이름은 ‘차 패스트볼’이었다.
대략적으로 신구종에 대한 공의 궤적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서 확신은 할 수 없었기에 우선은 ‘패스트볼’로 생각을 했었고, 당연히 앞에 ‘차’는 내 성을 따온 것이었다.
체조에서도 신기술을 등록할 때는 신기술을 개발한 선수의 이름을 따온 기술명을 정식으로 등록한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나 역시 그 점을 착안해서 ‘차 패스트볼’이라고 이름을 정해놨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 패스트볼’이라는 이름이 입에 달라붙는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바꾼 이름이 내 성의 영어 이니셜의 첫 단어만 따온 ‘C-패스트볼’이었지만, 그 역시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찮게 자동차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제로백’이라는 단어를 들음으로써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제로백.
이 말은 정식 명칭도 아니고, 국적 불명의 괴상한 용어다.
하지만, 자동차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아는 말이기도 했다.
자동차가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데 소요되는 시간.
이것의 은어가 바로 제로백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유래가 됐다는 말도 있고, 정체 불명의 단어라는 이유로 사용을 금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중요한 건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이미 제로백이라는 단어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다.
대체할 만한 새로운 단어를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고, 무엇보다 제로백이라는 단어만큼 강렬한 느낌을 주는 단어가 생각나지도 않았으며, 자동차의 속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제로백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때문에 내가 던질 신구종에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내 생각에 반발하거나,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분명 많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어차피 새로운 구종에 대한 이름을 선정할 권한은 나에게 있는 것이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결정했던 명칭이 ‘제로백 패스트볼’ 영어 표기로는 ‘ZF’로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일본전을 통해서 신구종의 궤적이 슬라이더와 굉장히 흡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인터뷰실에 들어오기 직전에야 최종적으로 ‘제로백 슬라이더’라는 이름을 결정지은 것이다.
예상대로 제로백 슬라이더(ZS)는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다.
최초로 선보인 한국은 물론, 미국, 일본, 대만 등등 야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나라라면 방송과 인터넷을 장악했다고 할 정도의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당연히 이름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우습게도 이름에 대한 논란으로 시끄러운 곳은 한국 밖에 없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한국적인 명칭을 사용하길 바란다는 점.
이왕이면 한국 정서가 가득 담긴 명칭을 사용해주길 바란다는 의견을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당연히 나로서는 대응할 이유가 없었다.
오랜 시간 고심했던 명칭이고, 무엇보다 가장 빠른 슬라이더라는 의미에서 ‘제로백’이라는 단어를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형수를 비롯해서 몇 명의 동료들이 차라리 ‘제로 슬라이더’라고 하면 어떻겠냐고 묻기도 했지만, 이미 백 명이 넘는 기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제로백 슬라이더’라고 말을 해놓고 하루 만에 이름을 바꾼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고집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이름이야 시간이 지나면 그러려니 하면서 사용하게 될 텐데.’
중요한 건 어떤 이름이냐가 아니다.
제로백 슬라이더의 가치다.
구속, 구위, 무브먼트, 변화 등등 기존의 구종들과 차별화를 둬서 새로운 구종으로 등록시킬만한 가치가 있느냐를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을 제외한 미국, 일본 등에서는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다.
현재 수많은 전문가들과 프로 구단의 전력 분석원들이 일본전 영상을 토대로 제로백 슬라이더를 해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다저스 구단 내에서도 지금 내부 전력 분석원들이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황병익 대표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다.
어디 다저스뿐이겠는가?
메이저리그의 모든 구단들이 제로백 슬라이더에 대한 엄청난 관심을 드러내고 있을 거다.
일본전을 통해 완성된 제로백 슬라이더의 장점은 우선 압도적인 구속이다.
100마일을 넘는 구속에서 시작되는 공 끝의 변화는 던지는 내가 생각해도 아찔했다.
아무리 배트 스피드가 빠른 타자라 하더라도 100마일의 구속에서 슬라이더의 궤적으로 변하는 공을 제대로 타격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미리 예측하고 친다?
어떤 코스로 올 것인지와 어느 시점에서 어느 정도의 궤적으로 변하는지를 모두 예측해야 하는데 그걸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확률적으로 희박했다.
거기에 제로백 슬라이더의 최대 장점이 일본 타자들을 통해서 확실하게 나타났다.
우타자를 상대로 몸 쪽 승부를 벌였을 때, 나타나는 타자들의 심리적 공포감이다.
아무리 대범한 타자라 하더라도 100마일의 공이 몸 쪽으로 급격하게 꺾여 들어오면 공포감에 제대로 된 스윙 자체를 가져갈 수가 없다.
비단, 우타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좌타자의 경우에는?
‘몸을 맞출 것처럼 날아오다 스트라이크 존으로 꺾여 들어가면 속수무책이겠지.’
어떤 타자가 맞출 것처럼 날아오는 공을 태연하게 지켜보다가 스윙을 하겠는가?
열이면 열 모두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막말로 ‘마지막에 공이 꺾여서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가겠지?’라고 생각하고 대범하게 서 있다가 공 끝이 변하지 않는다면?
실투라도 나오는 순간에는 그대로 100마일의 공에 직격 당하는데 몸이 재산인 운동선수가 그런 모험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이유로 제로백 슬라이더는 타자들에게 공포를 선사할 수밖에 없는 마구였다.
“미국 현지 반응은 대단합니다. 벌써부터 몇몇 전문가들은 제로백 슬라이더가 현존하는 최고의 변화구 내지는 패스트볼이라고 극찬을 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라이징 패스트볼보다 몇 배나 더 위력적인 구종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타자들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많이 줄 수밖에 없는 구종이니 아마도 그럴 겁니다.”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하하하! 그리고… 다저스 구단과의 종신 계약 문제도 전면 수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황병익 대표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계약 문제는 거의 협상 마무리 단계라고 하셨잖아요?”
내 물음에 황병익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차지혁 선수가 이번 올림픽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가 이전보다 몇 배는 더 올라가 있다는 걸 증명하고 말았기에 에이전트 입장에서 선수의 가치가 올라간 만큼 계약 문제를 다시 전면 재수정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마도 다저스 구단 측에서도 이 부분을 이미 예상하고 있을 겁니다.”
이미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협상을 다시 원점으로 돌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입장에서는 구단과 얼굴을 붉힐 이유가 있나 싶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솔직히 전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다저스와의 계약 조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굳이 다저스 구단에게 더 많은 것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차지혁 선수의 뜻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차지혁 선수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낮게 책정해서 구단과 계약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올림픽을 통해 차지혁 선수의 가치가 더욱더 높아짐으로써 다저스 구단이 얻을 막대한 수익을 생각했을 때, 이전 계약은 확실히 전면 재수정이 필요합니다.”
“계약 문제로 불편한 관계 설정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선수 본인과 구단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그게 에이전트인 제가 해야 할 일이니 그런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병익 대표의 대답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약간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황병익 대표를 향해 나는 괜찮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라고 말했다.
“솔직히 에이전트 입장에서 차지혁 선수가 내셔널리그보다는 아메리칸리그로 이동하는 게 어떤가 싶습니다.”
“아메리칸리그요?”
“이건 에이전트 입장 이전에 차지혁 선수를 열렬히 응원하는 팬으로서 하는 말입니다만, 굳이 타석에 서야 하는 내셔널리그보다는 안정적으로 투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아메리칸리그가 더 낫다고 판단합니다. 부상의 위험성도 그렇고… 솔직하게 말해서 타격 실력이 뛰어나지 않은 차지혁 선수에게 매 경기마다 타석에 서게 만들어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줄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황병익 대표의 솔직한 말에 나는 쓴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투수로서 투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아메리칸리그가 편한 건 사실이다.
타석에 서지 않으면 그만큼 부상의 위험도 줄어들고, 무엇보다 황병익 대표의 말처럼 타율에 대한 스트레스와 상황에 따른 타격 부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아메리칸리그가 내게 더 잘 맞는다는 건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다저스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 문제는 다저스에서 월드시리즈 우승부터 해놓고 생각을 하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다저스의 선수로서 팀의 우승에 기여하고 싶다는 게 최우선입니다.”
다저스에 대한 애정도 그렇고, 수십 년 만에 팀을 우승으로 이끌면 팀 에이스로서의 자부심과 성취감이 무척이나 클 것 같았기에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저스 팬들의 열정적인 응원과 격려 또한 쉽게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황병익 대표도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알고 있었다는 듯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알겠습니다. 그 문제는 다저스가 우승하고 나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8월 16일 수요일에 있었던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경기는 한국 대표팀의 압승으로 끝났다.
올림픽 4강 진출에 실패한 도미니카 공화국 대표팀은 메이저리거들이 전력에서 이탈하고, 남아 있는 선수들 또한 승리에 대한 의욕이 떨어져 있음으로써 경기 시작 전부터 일찌감치 한국 팀의 승리를 예견하게 만들었다.
이날의 경기를 끝으로 한국 대표팀은 5승을 거두면서 무난하게 4강 진출에 성공했다.
무엇보다 기쁜 일은 한국의 4강 상대팀이 대만으로 정해졌다는 점이었다.
한국 대표팀에게 있어서 가장 피해야만 하는 상대는 당연히 미국이고, 두 번째가 쿠바다.
그런데 운 좋게도 4강에서 미국과 쿠바를 모두 피할 수 있게 된 거다.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관심을 받고 있는 선수가 나였다면, 나라로는 대만이 주목 받았다.
대만 대표팀은 첫 경기에서 한국 대표팀을 상대로 승리를 챙기기 시작하더니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국가를 상대로 승리를 챙기는 엄청난 선전을 보였다. 특히, 쿠바를 1점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긴 것과 퍼펙트 삼진 게임을 당하며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일본을 4점 차이로 넉넉하게 이긴 건 이번 대회 최고의 이변이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한국으로서는 4강에서 대만과 다시 맞붙으면서 패배를 설욕할 기회를 얻게 됐다.
제34회 부산 올림픽 야구 4강 진출팀.
1위 : 미국(7전 7승)
2위 : 대만(7전 6승 1패)
3위 : 한국(7전 5승 2패)
4위 : 쿠바(7전 4승 3패)
결전의 날은 18일 금요일.
장소는 창원 구장.
17일 하루를 휴식한 한국 대표팀은 18일 오전 일찍 창원 구장으로 향했다.
< 『해외편 - 20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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