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201』 >
『해외편 - 201』
세차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마운드 위에서 투수가 절대 해선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흥분이다.
흥분한 투수는 자신의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하기에 투수는 항상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고, 어떠한 일에도 쉽게 흥분해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이건 투수라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철칙이다.
“후우우우우.”
감정을 가라앉히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심호흡이다.
천천히 그리고 크게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쉬길 반복하니 뜨거워지던 심장이 평소처럼 가라앉았다.
우선은 눈 앞에 서 있는 타자부터 잡는 게 먼저다.
2스트라이크 3볼, 풀 카운트 상황에선 투수와 타자 모두 상대방의 수를 읽기 위해 치열하게 머리를 굴린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풀 카운트 상황에서 유리한 입장은 타자다.
아무래도 투수로서는 타자를 출루시켜서는 안 된다는 벽에 막혀 있는 상황이라 최대한 스트라이크를 넣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대범하게 유인구를 던지며 타자의 허를 찌르는 투수들도 있지만 확률적으로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넣기 위해 공을 던지는 경우가 높았고, 타자는 그런 투수의 공을 침착하게 받아치기만 하면 된다.
다만, 문제라면 타자의 능력을 상회하는 빠른 공이 몸 쪽을 찌르고 들어오면 눈으로 보고도 제대로 된 타격을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지금처럼.
쐐애애애애애애애액!
퍼- 어어엉!
부- 웅!
“스윙! 타자 아웃!”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펑! 펑! 펑펑펑펑! 펑펑펑!
다시 한 번 폭죽이 터졌다.
동시에 전광판이 화려하게 반짝거리며 대문짝만한 글귀가 나타났다.
대한민국 투수 차지혁, 연속 탈삼진 세계 신기록 달성!
16K! 16K! 16K! 16K! 16K! 16K! 16K! 16K!
얼마나 강조를 하고 싶은 거야?
16K라는 글자가 전광판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일부 일본 관중들을 제외한 모든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서 열정적으로 박수를 쳐주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지르는 관중도 있었고, 내 이름을 부르는 관중도 있었으며, 휘파람을 불어대는 관중, 눈물을 글썽거리며 울먹이는 관중, 독립투사라도 된 듯 만세를 해대는 관중 등등 한 마디로 축제의 한 장면 같았다.
이렇게 흥분된 상황 속에서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의 표정은 차마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자신감이 완전히 결여된 듯 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자 하늘이 진동이라도 할 것처럼 관중들이 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천둥소리와도 맞먹을 정도의 엄청나게 박력 넘치는 응원이었다.
투수인 내 입장에서야 힘이 넘치는 응원 소리였지만, 타자의 경우엔 정 반대였다.
최대한 아닌 척 타격 자세를 잡고 서 있었지만 이미 얼굴은, 눈은, 바짝 마른 입술은 그가 얼마나 위축되어 있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최상의 상황이다.’
컨디션도, 나를 응원해주는 관중들도, 위축되어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타자까지도 내가 신구종을 던질 수 있게끔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립부터 제대로 잡았다.
어리석게도 신구종의 예행 연습이 라이징 패스트볼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립을 간과하고 있었던 거다.
일반적인 포심 패스트볼 그립에서 시계 방향으로 공을 살짝 돌려서 실밥을 검지와 중지의 마지막 마디에 딱 맞췄다. 이런 식으로 그립을 쥐고 슬라이더를 던지는 투수들이 상당히 많기도 하고, 간혹 어떤 선수들은 커브나 슬러브 등을 던지기도 한다.
‘최대한 중지에 마지막 힘을 더해서 공의 회전력을 높여야 한다.’
호흡을 다듬고 릴리스 포인트에서 공을 놓는 그 순간까지도 머릿속에 이 생각을 담아뒀다.
쐐애애애애액-!
움찔!
퍼어- 어엉!
“스트라이크!”
궤적이 변했다.
분명 일반적인 포심 패스트볼이라고 부르기엔 그 궤적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변했다.
무엇보다 우타석에 서 있던 타자가 마지막에 공의 궤적이 자신의 몸 쪽으로 휘어졌기에 배트를 휘두르려다 말고 움찔거렸다.
급히 전광판을 바라보니 158km라는 숫자가 방금 던진 공의 구속을 말해주고 있었다.
포구를 한 형수는 일어나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공을 던져줬다.
공의 궤적만 놓고 본다면 포심 패스트볼이 아니라 분명 컷 패스트볼의 궤적과 아주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속이 늘었다.
내가 던질 수 있는 컷 패스트볼의 최고 구속은 97마일, 즉 156km다.
그런데 방금 던진 공의 구속은 158km가 찍혔으니 포수와 타자 모두 의아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거다. 특히, 타자의 경우 엄청난 속도의 공이 몸 쪽으로 꺾여 들어오면 본능적으로 놀랄 수밖에 없다.
‘구속을 더 높이고 공의 궤적도 더 넓혀야만 해.’
다시 2구를 던졌다.
“히익!”
타자가 깜짝 놀라며 타석에서 벗어났지만, 공은 몸 쪽 스트라이크 존을 아주 살짝 벗어나기만 했을 뿐이다.
관중들이 보기에는 타자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놀랐다고 밖에 보이지 않을 상황이었다.
159km.
구속이 다시 한 번 올랐다.
비록 제구는 살짝 벗어났지만 구속이 오르고, 궤적이 더 늘어났다는 것에 위안을 삼았다.
무엇보다.
‘느낌이 온다.’
아주 작은 차이가 미세하게 손끝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이 느낌이 중요하다.
투수라면 반드시 이걸 잡아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던진 3구는 생각보다 밋밋한 무브먼트를 보이며 타자가 휘두른 배트에 맞으며 파울 타구가 되고 말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네.’
조금 전 분명 어떤 느낌을 잡았는데, 지금은 또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후우우우.”
조급해 할 필요 없다.
이제 그 첫 단추를 끼웠을 뿐이다.
이제부터 조금 느리더라도 하나씩, 하나씩 채워나가면 될 뿐이다.
와인드업을 하고 다시 한 번 공을 던졌다.
‘왔다.’
이전보다 훨씬 더 확실해진 미세한 감각이 전율처럼 손끝에서부터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내가 던진 공은.
쐐애애애애애액-!
휘익!
퍼- 어어어엉!
“스,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공을 던진 나조차도 두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예리한 각도를 그리며 홈플레이트 한 가운데에서 타자 몸 쪽으로 순식간에 꺾여 들어가는 공의 궤적은 놀라울 정도였다.
컷 패스트볼보다 몇 배, 슬라이더보다 더 예리하게 꺾였다.
‘구속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보니 전광판에 찍힌 숫자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161Km
“됐… 다!”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신구종의 스피드는 모두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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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대기 타석에서 자신의 타순을 기다리며 스윙을 하던 이시다 타카시는 지금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7회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일본은 한국을 상대로 3점 차이로 끌려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시다 타카시를 괴롭히는 건 한국 대표팀의 선발 투수 차지혁의 신들린 듯 한 피칭이었다.
열아홉 타자 연속 삼진.
어떠한 악몽도 이것보다 더 심할 순 없었다.
“어떻게 저런 놈이 한국에서 나올 수 있는 거지!”
한국과 일본 최고의 스포츠가 야구인 건 같지만, 두 나라의 환경은 하늘과 땅 차이일 정도로 달랐다.
일본은 야구에 미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론 조사 결과 일본 국민들이 가장 선호하며 좋아하는 스포츠 순위는 1위가 프로 야구, 2위가 프로 축구, 3위가 고교 야구일 정도다.
초중고 야구부, 시설 등부터 시작해서 전체적인 일본의 야구 인프라와 시스템은 한국과 비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정도다. 대략 70배 정도의 차이가 난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보니 이시다 타카시로서는 한국처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꾸준하게 세계적인 선수들을 배출해내는 한국 야구계가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극소수 몇 명의 선수들에 한해서다.
한국 프로 야구가 아무리 성장했다 하더라도 일본 프로 야구와는 수준 차이가 컸고, 평균적인 선수들의 실력 역시도 차이가 컸다. 그러다보니 일본 대표팀으로서는 아무리 한국이 라이벌이니, 어쩌니 해도 당연히 승리해야 할 상대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의 라이벌은 미국과 쿠바 밖에 없다 여겼다.
오늘 경기도 마찬가지다.
일본으로서는 손쉽게 이겨야만 하는 경기였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의 투수력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고작 한 명, 두 명 정도의 투수에 한해서일 뿐이었기에 선발 투수만 마운드에서 끌어내리면 이후로는 쉽게 득점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더 성장을 하다니… 빌어먹을!”
한 달 전, 미국에서 열린 IBAF 챔피언스 리그에서 만났을 때와 지금의 차지혁은 또 달랐다.
당시에도 차지혁은 무시무시한 투수였는데, 오늘은 그보다 더 성장해서 감히 상대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스윙! 타자 아웃!”
주심의 외침에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매캐한 화약 냄새가 진동할 정도의 폭죽이 터지면서 전광판이 어지럽게 반짝거렸다.
“더 이상 수치를 당할 순 없다!”
20K.
한 경기에 스무 개의 탈삼진을 잡는 것조차 입이 쩍 벌어질 기록인데, 차지혁은 1회 초 1번 타자부터 연속으로 스무 개의 탈삼진을 잡고 있었다.
‘네놈 뜻대로 절대 되지 않는다!’
이시다 타카시는 절대 21번째 연속 탈삼진의 제물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놈의 직구는 빠르고 무겁다! 섣부르게 안타를 치려고 하지 말고 가볍게 맞춘다는 생각으로 배트를 휘둘러야만 해!’
100마일. 이 엄청난 강속구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는 차지혁은 도저히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평생 야구만 해온 이시다 타카시는 반드시 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장타나 홈런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라운드 안으로 보내기만 하면 된다.
이것조차 못하고 있는 동료 타자들과 자신의 모습이 일본 본토에서는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지 생각하면 절로 이가 갈렸다.
이번에도 삼진을 당한다면 너무나도 수치스럽고 모욕적이어서 할복이라도 하고 싶을 것만 같았다.
자존심마저 버리고 배트를 짧게 쥐고 선 이시다 타카시는 죽일 듯 한 시선으로 마운드 위에 서 있는 차지혁을 노려봤다.
‘초구부터 과감하게 스윙을 해주겠다!’
정면 승부를 피하지 않는 차지혁의 투구 스타일은 이미 파악이 끝났다. 문제는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온다는 걸 알면서도 강속구에 위압감을 받고 스윙을 정확하게 가져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칠 수 있다! 160km의 공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칠 수 있다!’
한 가운데로 들어오는 공이라는 전제 조건이 붙어야 하겠지만.
상할 정도로 이를 꽉 깨물고 이시다 타카시는 차지혁이 공을 던지길 기다렸다.
와인드업을 하고 킥킹 동작 이후 디딤발을 내딛기 직전, 반 박자 빠르게 스윙을 위한 중심 이동을 시작한 이시다 타카시였다.
차지혁의 공이 워낙 빠르기에 다른 투수들보다 타이밍을 빠르게 가져가야 했기 때문이다.
쐐애애애애애-!
공이 날아오는 걸 확인하고 이시다 타카시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건방진 놈! 초구라고 한 가운데로 던지다니!’
짧은 순간 그렇게 차지혁에게 비웃음을 주며 배트를 휘둘렀다.
‘네놈의 얼굴이 구깃구깃 일그러지는 모습을 웃으면서 봐주마!’
이건 백퍼센트 안타라고 여기며 이시다 타카시는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배트와 공이 마주치려는 그 찰나의 순간, 공의 움직임이 몸 쪽으로 예리하게 꺾이면서 파고 들어왔다.
‘마, 말도 안 돼!’
부- 우웅!
퍼어- 어어어엉!
허무하게 돌아가는 배트,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강렬한 가죽 파열음.
이시다 타카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포수 미트를 바라봤다.
한 가운데로 날아왔던 공이 순식간에 몸 쪽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슬라이더?”
이 정도의 변화를 보일 수 있는 구종은 슬라이더뿐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162…….”
고속 슬라이더조차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초고속 슬라이더. 아니, 과연 이걸 슬라이더라 불러야 하는 건지조차 의문스러운 이시다 타카시였다.
‘타카시! 녀석의 직구가 괴상할 정도의 무브먼트를 보여주고 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타격을 하지 마라!’
허무하게 헛스윙 삼진을 당하고 창피함을 피하기 위해 하는 헛소리라고 치부했다.
이전 이닝부터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봐야 포심 패스트볼이라 여겼다.
만족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는 차지혁을 바라보며 이시다 타카시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절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수치고 모욕이고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오늘 경기가 빨리 끝나기만을 간절하게 원하는 이시다 타카시였다.
< 『해외편 - 20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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