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200』 >
『해외편 - 200』
삼진. 삼진. 삼진. 삼진. 삼진…….
타자를 한 바퀴 돌린 것도 모자라서 다시 돌아온 타순의 타자들을 한 명, 한 명 삼진으로 잡았다.
그렇게 열 번째 탈삼진의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타석에 들어선 사토시 준의 표정은 독기와 비장함이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독기를 품고 물러설 곳이 없다는 마음으로 배트를 휘둘러도 완벽하게 제구가 되어 구석구석을 찌르는 100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은 마음대로 칠 수 있는 공이 절대 아니었다.
부웅!
“스윙! 타자 아웃!”
공 4개 만에 삼진을 당하자 사토시 준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완전히 의욕이 꺾인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버렸다.
완벽한 패배.
자신의 능력으로는 절대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걸까?
사토시 준의 모습에 뿌듯함보다는 이유모를 공허함이 들었다.
이후로도 삼진은 퍼레이드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2번 타자, 그리고 3번 타자 이시다 타카시, 4번 타자 오다 마에루, 5번 타자, 6번 타자 노부다 신이치마저 바깥쪽으로 살짝 빠지는 포심 패스트볼에 헛스윙을 당하며 삼진을 당하자 사직 구장 전체가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예정에도 없던 폭죽이 터지면서 전광판에는 이런 글자가 떠올랐다.
대한민국 투수 차지혁, 연속 탈삼진 세계 신기록 타이 달성!
15K!
관중들의 함성은 내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이어졌다.
오죽했으면 수비를 하기 위해 그라운드로 나온 일본 대표팀 선수들이 주심에게 항의를 할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대표팀 더그아웃은 무거운 침묵만이 낮게 깔려 있었다.
선배들 모두 나를 의식적으로 피했고, 하나 밖에 없는 후배 국진이도 멀찍이 떨어져서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더그아웃 내에서 나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형수밖에 없었다.
“이, 이대로 갈 거지?”
“왜 떨어?”
“떠, 떨긴!”
긴장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는 형수를 바라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나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무엇보다 100마일의 공을 완벽하게 제구하는 투수가 얼마나 공포스러운 투수인지를 똑똑하게 느꼈기에 지금까지 익힌 변화구들이 모두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애초부터 100마일의 공을 제구 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면?
물론,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역사상 어떤 투수도 100마일의 공을 제 멋대로 컨트롤하지 못했다.
그만큼 어렵기에 보조 수단으로 변화구를 익힌 거다.
“형수야, 내가 지금까지 변화구를 몇 개나 던졌는지 기억해?”
“변화구? 컷 패스트볼하고 파워 커브하고… 대략 다섯 개 정도 던졌으려나? 왜?”
5이닝을 마치는 순간까지 고작 5개의 변화구 밖에 던지지 않았다니.
15명의 타자들을 상대하면서 던진 투구수가 총 61개다. 이 중 변화구를 5개 밖에 던지지 않았으니 결과적으로 나머지 56개의 공이 모두 포심 패스트볼이라는 소리다.
“미쳤네.”
홀로 중얼거리다 피식 웃었다.
“응? 뭐라고?”
“아냐.”
대략 12개의 공 가운데 단 하나만이 변화구였단 소리다.
타자 입장에서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변화구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포심 패스트볼만 노리고 스윙을 하면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결과는 삼진.
과연 이런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본 타자들의 능력 부족?
나라를 대표해서 국가대표가 된 타자들이다.
미국과 일본 등의 프로 리그에서 나름대로 이름 깨나 날린다는 타자들이니 절대 능력 부족이라고 부를 순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삼진을 당하는 걸까?
‘이게 진짜 강속구의 위력인 건가.’
가끔 사람들은 한 가운데로 들어오는 공을 못 치는 타자들을 향해서 원색적인 비난을 한다.
밥 먹고 야구만 했다는 놈이 그것도 못 치냐, 눈 감고 배트만 휘둘러도 공은 맞추겠다, 한 가운데 공도 못 치는 놈이 무슨 야구 선수냐 등등.
그러나 실제로 타석에 서면 안다.
공기를 찢어발기며 눈 깜짝 할 사이에 포수 미트에 박혀 들어가는 공을 배트로 맞춘다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내가 정말 무서운 공을 던지게 됐구나.’
지금까지 내가 완벽하게 컨트롤이 가능해졌던 변화구를 손에 넣었을 때보다도 강렬한 희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강속구 투수.
내가 원했던 투수가 되었음을 오늘 경기를 통해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형수야.”
“응?”
“라이징 패스트볼과 비교했을 때, 지금 포심 패스트볼의 구위가 어떤 것 같아?”
“라이징 패스트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솔직하게 말해서 네가 던지는 라이징 패스트볼은 구위 자체는 지금 던지는 포심 패스트볼과 비교할 수가 없어. 공이 너무 가볍거든. 지금 네가 던지는 포심 패스트볼은 뭐랄까… 진짜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묵직해서 웬만한 타자는 제대로 밀어 내지도 못할 걸? 거기에 비교한다면 라이징 패스트볼은 궤적만 제대로 맞춰서 타격하면 장타를 허용할 가능성이 무척 높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사실을 형수를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지기 위해서는 손목의 각도를 최대한 정각에 위치시켜야 했기에 지금처럼 마음 놓고 체중을 싣기가 쉽지 않았다.
손목에 부담도 가고, 구위도 원하는 만큼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았기에 라이징 패스트볼에 대한 미련도 그리 크지 않은 건 사실이다.
어차피 라이징 패스트볼은 신구종을 위한 예행 연습일 뿐이었으니까.
‘너처럼 강력한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에게 고속 슬라이더는 필수적이지. 타자를 그만큼 압박할 수 있는 효과적인 무기가 되니까. 하지만, 네가 던지는 투구폼에서 슬라이더는 오히려 널 망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차라리 새로운 너만의 공을 던지는 게 어떤가 싶군.’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지게 되었으니 이제 슬슬 신구종을 연습해보는 게 어떨까?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어차피 네가 던지게 될 신구종도 결국은 패스트볼이니까. 대신, 중지에 강한 힘을 줘서 공의 회전을 좌우로 더 강하게 준다고 여겨라. 분명 멋진 패스트볼이 나올 거라고 난 믿는다.’
랜디 존슨의 말을 떠올리며 왼손을 내려다봤다.
중지 손가락에 마지막 임팩트를 가한다.
오늘은 공이 손에 제대로 달라붙고, 긁히는 날이다.
이렇게 컨디션이 좋은 날 신구종에 대한 감각을 조금이나마 느껴 볼 수 있다면?
‘해보자.’
본래 완벽하게 손에 익기 전까지는 경기에서 새로운 공을 던지지 않는 것이 내 철칙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예외로 두고 싶었다.
지금처럼 좋은 몸 상태는 분명 내가 원하던 감각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형수야, 포심 패스트볼의 궤적이 조금 변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포구를 해줘.”
내 말에 형수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궤적이 변한다니? 무슨 소리야?”
“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몇 번 시험을 좀 해보려고.”
미쳤냐는 듯 펄쩍 뛰며 형수가 소리쳤다.
“야! 지금 네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너 이제 다음 타자만 삼진으로 잡으면 새로운 신기록이라고!”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고 느꼈는지 형수가 재빨리 주변 눈치를 살피고는 다시 조용히 말했다.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 뭘 시험해? 그리고 너 원래 그런 놈 아니잖아? 왜 갑자기 이상한 짓 하려는 거야? 그냥 지금처럼 가자. 타순도 하위 타순이잖아. 7번 타자만 잘 잡으면 8번, 9번까지도 삼진으로 잡을 수 있을 거야. 연속 18K! 이 얼마나 멋지냐! 장담하건데 이런 엄청난 기록은 인류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나오지 않을 거라고!”
“지금 당장의 기록도 중요하겠지만, 앞으로 내 투수 생활을 생각했을 때, 오늘처럼 좋은 날을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도대체 무슨 소리를…….”
“가자. 이닝 끝났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내 뒤를 바짝 쫓아온 형수는 내가 마운드에 올라가는 순간까지 날 따라와 허튼짓은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형수의 말대로 허튼 짓일 수도 있고, 미친 짓이 될 수도 있지만 난 오늘이 분명 내 인생에 있어 또 한 번의 전환점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운드에 서서 왼손을 가볍게 털며 긴장을 풀었다.
‘조금씩 가자. 한 번에 너무 과하게 힘을 주면 제구가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조금씩 강도를 높여야해.’
공을 던지는 건 무척이나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행위다.
특히, 지금처럼 100마일의 강속구를 뿌려대는 상황에서 완벽한 컨트롤을 가져가려면 와인드업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공을 던지고 난 이후의 마무리 동작까지도 흐트러져선 안 된다.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서도 안 되고, 균형이 무너져서도 안 되고, 호흡은 물론, 마지막 시선 처리까지도 정해진 틀 안에서 정확하게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렇기에 이제부터 던질 공은 이 틀을 깨트리는 위험한 투구가 될 수밖에 없다.
타석에 들어선 타자를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고 와인드업을 했다.
‘제구력이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우선은 한 가운데로 넣어보자.’
남들이 들으면 미쳤냐는 소리가 튀어나올 말이다.
15타자 연속 삼진 세계 신기록을 다시 한 번 세우고 이제 새로운 기록과 마주할 준비를 마친 상황에서 신중하지 못하게 무슨 짓이냐고 욕을 먹을 일이겠지만.
‘기록에 연연해서 오늘처럼 좋은 컨디션을 이대로 보낼 순 없지.’
투수는 새로운 공을 던질 때, 스스로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라는 게 있다.
같은 커브를 던지더라도 어떤 투수는 환상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완벽한 커브를 던지는 반면, 다른 투수는 실전에 써먹기 민망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불완전한 커브를 던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감각. 혹은 느낌이라고 말하는 이건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투수 코치라 하더라도 가르쳐 줄 수 없는 부분이다.
실제로 많은 프로 선수들 중에는 공의 감각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서 평생 원하는 변화구를 던지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다시 말하면, 이 감각을 느끼고 그걸 유지해나갈 수 있게 된다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변화구를 자신만의 무기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나에게는 기록이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1구.
와인드업을 하고 최대한 신경을 집중해서 공을 던졌다.
거울에 반사되어 보여 지는 것처럼 똑같은 투구 폼으로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면서 마지막 릴리스 포인트에서 공을 던지기 직전에 검지에 힘을 더했다.
쇄애애애애액!
퍼- 어어엉!
“스트라이크!”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포심 패스트볼에 타자는 이를 악물며 배트를 더욱더 짧게 쥐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런 타자의 모습보다는 이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공의 궤적에 중지에 힘을 더욱더 가해야 한다는 사실만 머릿속에 담았다.
다시 2구.
형수가 돌려주는 공을 받아들고 심호흡과 함께 힘껏 공을 던졌다.
이번에는 방금 전의 1구보다 조금 더 많은 힘을 중지에 실었다.
쇄애애애애액!
부- 우웅!
타자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고, 공은 타자의 몸 쪽으로 살짝 붙으며 포수 미트에 박혔다.
한 가운데로 던지려고 했던 공이 내 의사와는 다르게 타자 몸 쪽으로 붙어버렸다.
오늘 경기 첫 번째 실투였다.
‘릴리스 포인트에서 손목에 힘이 너무 들어가고 말았어.’
곧바로 실수한 점을 떠올렸다.
사람의 몸이라는 게 어느 한 부분만 정확하게 힘을 준다는 게 참 어려웠다.
공을 던져주는 형수의 표정이 살짝 굳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포수인 만큼 방금 공이 사인과 맞지 않는 코스로 들어왔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후우우!”
최대한 편안하게 공을 던지기 위해 일부러 크게 숨을 뱉어내고 가볍게 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대기록을 앞둔 투수가 긴장감을 풀기 위한 행동으로 보이겠지.
로진백을 손에 듬뿍 묻히곤 다섯 손가락을 모두 튕기길 반복했다.
하얀 분말 가루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몸 쪽은 위험하니까 바깥쪽으로.’
만에 하나라도 제구가 되질 않아 타자가 공에 맞을 수도 있었기에 아예 바깥쪽 코스를 노리고 공을 던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3구.
머릿속으로 손목의 힘을 최대한 빼고 중지 손가락에 힘을 제대로 주자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뇌이며 공을 던졌다.
공이 손끝에서 떨어지는 순간 제구가 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쇄애애애애애액!
퍼- 어어엉!
“볼!”
이어진 4구, 5구도 마찬가지였다.
“타임!”
기어이 형수가 참지 못하고 주심에게 타임을 요청하고 마운드로 올라왔다.
“뭐하는 거야! 너 진짜 이럴래?”
형수가 벌겋게 변한 얼굴로 화를 터트렸다.
“미안.”
“미안하다는 소리 필요 없으니까 정신 차리고 똑바로 던져! 너 진짜 생각이 있는 놈이냐? 괜한 짓 하지 말고 평소처럼 제대로 던지라고!”
마운드 위에서 언쟁을 벌일 순 없었기에 알았다고 형수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공 회전이 이상하게 돌고 있으니까 그립부터 똑바로 잡고 던져! 알겠지?”
마운드를 내려가며 형수가 그렇게 말했다.
‘그립?’
나는 재빨리 글러브 속에 담겨 있는 공의 실밥을 잡았다.
전형적인 포심 패스트볼의 그립을 쥐다가 공의 위치를 바꾸면서 공의 회전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그립을 찾았다.
“찾… 았다!”
< 『해외편 - 20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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