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99화 (199/221)

< 『해외편 - 199』 >

『해외편 - 199』

8월 15일 화요일.

부산 사직 구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입장권은 암암리에 암표까지 등장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봤을 때는 ‘올림픽 야구의 인기가 정말 대단하구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올림픽 야구의 평균 관중수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몇몇 특정 경기만 구름 때와 같은 관중들이 몰려들었는데 오늘은 그 중 최고라 불러도 좋았다.

제 2경기로 예정된 한국 대 일본, 일본 대 한국의 야구 경기 때문이었다.

실질적으로 올림픽 야구 최고의 흥행카드였다.

우리 한국 국가대표팀은 5전 3승(쿠바, 네덜란드, 멕시코) 2패(대만, 미국)를 기록 중이었고, 일본 역시 5전 3승(도미니카, 멕시코, 네덜란드) 2패(미국, 쿠바)를 나란히 기록하고 있었다.

오늘 경기의 승리는 어느 팀이든 4강 진출을 거의 확정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 중요도가 컸다.

한국의 경우 내일 도미니카 공화국을 상대해야 했지만, 이미 4강 진출에 실패했다는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인지 주요선수들이 대거 빠질 것이라는 예측이 있어 승리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컸다.

반대로 일본의 경우 내일 대만을 상대해야 하는데, 현재 대만은 오늘 쿠바 전을 앞둔 상황에서 5전 4승(멕시코, 도미니카, 한국, 네덜란드) 1패(미국)로 엄청나게 선전하고 있었기에 4강 진출에 대한 강한 희망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중요한 건 한국과 일본의 입장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경우 실질적으로 일본과의 경기에서 패배하면 4강 진출에 대한 희망이 깨끗하게 사라진다. 대만이 일본을 이기더라도 일본과의 상대 전적에서 패배하였기에 4강 진출을 할 수 없게 되고, 일본이 대만을 이겨도 마찬가지로 대만과의 상대 전적에서 한국이 패배했기에 4강 진출은 좌절되고 만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우리 대표팀의 경우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필승 의지가 강했다.

그런데.

“뭐? 배탈?”

청천날벼락이 떨어졌다.

일본을 상대로 단 한 번도 패배를 해본 적 없는 일본 킬러 양동호 선배가 새벽부터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결국 아침 일찍 응급실까지 찾아가야 할 정도로 배탈이 심하게 나고 말았다.

어제 저녁 미국과의 경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 길거리에서 사먹은 노점상 음식이 문제였다.

“그 새끼는 왜 그런 걸 사 처먹어서 이 지랄이야!”

화가 머리끝까지 난 광주 피닉스의 코치이자, 국가대표팀 타격 코치인 노성일 코치가 불같이 화를 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백유홍 감독 역시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미 배탈이 나버린 걸 어쩌란 말인가?

송진욱 투수 코치가 백유홍 감독에게 귓속말을 했다.

백유홍 감독은 가만히 송진욱 투수 코치의 말을 듣고 있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송진욱 투수 코치가 곧바로 나에게 다가왔다.

“지혁아.”

“예.”

“오늘 선발로 마운드에 올라갈 수 있지?”

10일 쿠바전 이후로 내리 4일을 휴식했으니 문제없었다.

일본 킬러라는 양동호 선배와 4강 혹은 결승전의 선발 투수로 나를 아껴두었던 백유홍 감독으로서도 당장 일본을 상대로 공을 던질 수 있는 선발 투수가 없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이 나를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형수도 같이 준비해라.”

“예!”

본래 선발 포수로 예정되어 있던 전영무 선배였지만, 나와는 많은 시간 호흡을 맞춰본 적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형수가 선발 라인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흐흐흐! 오늘 일본 완전히 박살을 내버리자!”

일본전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려서인지 불펜으로 향하는 형수의 얼굴에 투지가 넘쳤다.

@

“뭐, 뭐야? 오늘 선발 양동호 아니었어?”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우와아아아~! 차지혁이다!”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일본전 선발 투수로 예정되어 있던 양동호 대신 쿠바를 침묵시켰던 차지혁이 선발 투수로 라인업이 발표되자 사직 구장을 찾은 많은 한국 관중들이 입이 찢어져라 좋아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반대로 일본에서 온 원정 관중들의 반응은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사직 구장은 차지혁 단 한 사람의 이름으로 들썩거렸다.

“오늘 오빠가 왜 선발 투수지? 언니 오빠가 오늘 선발 투수라고 말했어요?”

지아의 물음에 안젤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선발 투수가 갑자기 바뀐 걸로 봐선 아마도 양동호 선수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아버지의 말에 지아가 픽 웃었다.

“혹시 일부로 한국 대표팀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니야? 원래 야구에서 다른 투수를 위장 선발로 내세웠다가 경기 직전에 바꾸는 일 많잖아. 오늘처럼 중요한 경기에 오빠가 아닌 다른 투수를 선발로 내세우는 것도 좀 웃기긴 했지!”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는 지아였다.

“아무리 일본전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비열하게 야구를 할 백 감독이 아니다.”

백유홍 감독의 인품을 믿는다는 듯 아버지가 그렇게 말을 하며 지아를 꾸중했다.

지아는 그래도 상대가 일본이니 이기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작전쯤이야 무슨 문제냐는 듯 구시렁거렸다.

“그나저나 지혁이가 갑자기 선발로 올라오는 게 아닌가 걱정이네.”

어머니의 말에 안젤라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안심시켰다.

“척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아마도 오늘 선발로 등판이 가능하니까 마운드에 오르겠다 했을 거예요.”

안젤라의 말에 어머니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오빠가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다고 하니까 관중들이 완전 흥분했네! 히히!”

차지혁의 이름을 연호하고, 이미 일본전에 대한 승리를 확신하는 관중들의 잔치 분위기는 지아를 비롯한 가족들과 안젤라의 마음을 즐겁게 만들었다.

한 편으로는 일본전인 만큼 다른 어느 때보다도 잘 던져야 할 텐데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쿠바보다 전력이 떨어지는 일본을 상대로 못 던질 차지혁이 아니었기에 기대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오빠다! 오빠~ 아!”

지아가 벌떡 일어나서 마운드에 올라가 연습투구를 시작하는 차지혁을 향해 두 손을 마구 흔들어댔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유명인에 가까운 가족들과 안젤라였는데 지아로 인해 더욱더 주목을 끌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주목을 끌어야 할 차지혁은 지아의 외침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묵묵히 연습투구에 집중하고 있었다.

@

일본 타자들은 기본적으로 작전 야구에 능하다.

짧게 치고 빠르게 달리거나, 많은 커트를 해서 투구수를 늘리거나, 투수와 내야 수비들을 흔들어 놓기 위해 기습 번트를 주저하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타자의 능력을 우선시하는 메이저리그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고 보면 된다.

이 부분을 두고 좋다, 나쁘다 이분법의 잣대로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이런 작전 야구 또한 모두 야구 룰 안에서 허용되는 규칙들이며, 우습게 여기기엔 쉽사리 수행할 수 없는 부분들인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본 대표팀의 테이블 세터 즉, 1번 타자와 2번 타자는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그 어떤 나라의 1, 2번보다 뛰어났다.

다만, 보통의 투수라면 누구나 조심해야 할 일본의 테이블 세터가 나에게는 큰 긴장감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한국 땅에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1회 초, 일본 공격의 선봉으로 타석에 선 일본인 타자가 무척이나 반갑게 느껴졌다.

사토시 준.

내셔널리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리드 오프인 사토시 준을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마주하게 된 거다.

극도로 짧게 쥔 배트를 들고 서 있는 사토시 준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보였다.

하긴, 내가 사토시 준이라 하더라도 그럴 것 같긴 했다.

뱀 앞의 쥐, 고양이 앞의 쥐라는 표현을 해야 할 정도로 나에 대한 상대 전적이 굴욕적이다 못해 처참한 사토시 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내가 선발로 나올 경우 사토시 준이 라인업에서 빠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미 메이저리그에서는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그렇게 되었으니까.

사토시 준에게는 비참한 처지겠지만, 현실적으로 특정 투수를 상대로 타율과 출루율 모두 1할조차 기대할 수 없는 타자를 타석에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으로서도 오죽했으면 다른 경기에서는 펄펄 날아다니는 사토시 준을 라인업에서 뺐을까?

아무래도 일본 대표팀 감독에게도 현실을 알려줘야 할 것 같다.

사인을 내고 있는 형수의 입가에 미소가 보였다.

나를 상대로 사토시 준이 얼마나 부진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형수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더욱이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나는 더욱더 강력한 구위를 바탕으로 타자를 윽박지르는 투수로 발돋움을 했으니 힘에서 절대 열세를 보이는 사토시 준으로서는 최악 중의 최악을 상대로 만난 셈이다.

약간 높은 쪽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포심 패스트볼.

와인드업을 하고 곧바로 공을 던졌다.

내가 공을 던지자 타석에서 타격 자세를 잡고 있던 사토시 준이 곧바로 기습 번트를 했다.

딱!

“큭!”

기습 번트와 동시에 1루를 향해 내달릴 생각만 하고 있었던 사토시 준은 번트를 댄 타구가 포수 머리 위로 넘어가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의 배트를 바라봤다.

무려 100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이다.

구속도 살벌했고, 구위도 묵직했기에 제대로 번트 자세를 잡고 신중하게 번트를 댄다고 하더라도 타자 입장에서는 공포스러울 텐데, 빠르게 기습 번트라니.

어떤 타자들은 스윙을 하는 것보다 번트를 대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할 정도다.

‘쉽지 않을 거다.’

굳이 번트를 하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호락호락하게 번트를 대도록 공을 던져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쇄애애애애액.

퍼- 어엉!

“스트라이크!”

2구는 사토시 준의 몸 쪽을 꽉 차게 들어가는 포심 패스트볼.

이번에도 전광판에는 161km가 찍혔다.

순식간에 2스트라이크 상황에 몰린 사토시 준의 표정이 톡 건드리면 부서져버릴 것처럼 보였다.

‘빠른 승부.’

굳이 유인구 따윌 던질 생각이 없었고, 초반부터 일본 타자들의 기를 확실하게 꺾어놔야 한다는 걸 알기에 있는 힘껏 포심 패스트볼을 포수 미트만 보고 꽂아 넣었다.

퍼- 어어엉!

부웅!

“스윙! 타자 아웃!”

공이 지나가고 난 이후에 배트가 돌아 나오는 사토시 준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일본이 자랑하는 천재 타자, 사토시 준을 삼구삼진으로 잡아버리자 부산 사직 구장을 찾아온 한국 관중들의 함성이 고막을 찢어놓을 것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정면 승부. 일본의 작전 야구 따윈 통하지 않는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겠어.’

로진백을 주무르며 오늘 경기를 머릿속으로 미리 그려보기 시작했다.

퍼- 어엉!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주심의 호쾌한 아웃 선언에 타자의 표정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전광판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등을 돌렸다.

‘3회 초, 마지막 타자.’

지금까지 모든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오늘은 컨디션을 뛰어넘는 다른 뭔가가 있었다.

올해 들어 100마일의 공도 80퍼센트 이상 컨트롤이 가능해지더니, 쿠바전을 계기로 이제는 완벽하게 제구가 되고 있었다.

100마일의 공을 내 뜻대로 던진다.

이건 엄청난 일이다.

단순한 포심 패스트볼이지만, 구속이 100마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웬만한 마구보다 더 타자들을 공포로 몰아넣을 공이다.

특히 타자 입장에서는 몸 쪽으로 날아오는 공은 높낮이를 떠나 공포 그 자체였고, 바깥쪽은 쉽게 스윙으로 따라갈 수가 없다.

평소보다 더 빠르고 간결하게 스윙을 해야만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타자들은 제 마음대로 안타와 홈런을 때려낼 거다.

아무리 간결하게 단타 위주의 스윙을 하는 일본 타자들이라 하더라도 몸 쪽과 바깥쪽을 번갈아가며 공략하니 공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삼진 퍼레이드를 당하고 있었다.

타석에는 9번 타자 이시모토 쇼케이가 들어섰다.

소속 팀,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는 1번 타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정도로 선구안과 출루율이 좋은 이시모토 쇼케이였지만, 내 눈엔 사토시 준보다 능력이 조금 더 떨어지는 타자일 뿐이었다.

‘초구는 역시 몸 쪽.’

타자에게 공포를 준다.

몸 쪽으로 바짝 붙이는 스트라이크를 던져서 타자로 하여금 공의 위력을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느끼도록 만든다.

퍼어어- 엉!

“스트라이크!”

이시모토 쇼케이의 표정이 잘게 경련을 일으켰다.

더그아웃에서 동료 타자들을 압박하던 공을 직접 느껴보니 생각 이상이겠지.

두 번째 공은 바깥쪽 아래로 깔리는 스트라이크.

몸 쪽, 그리고 바깥쪽.

이 단순한 패턴이 일본 타자들을 꼼짝도 못하게 묶고 있었다.

이게 바로 100마일 포심 패스트볼의 진정한 위력이다.

‘마지막은 몸 쪽 높은 코스를 관통하는 공.’

쇄애애애액.

“히익!”

부웅!

퍼어어엉-!

“스윙! 타자 아웃!”

또 다시 나온 삼구삼진에 한국 관중들은 기립 박수와 함께 내 이름을 연호했고, 일본 관중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자국 타자들을 비난했다.

일부 과격한 일본 관중들이 나를 향해 언성을 높이기도 했지만, 압도적인 한국 관중들의 살벌한 눈초리에 재빨리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오늘 공 진짜 죽인다! 포수인 내가 봐도 오줌이 찔끔 나올 정도다! 도대체 넌 정체가 뭐야? 인간이 맞긴 하는 거냐? 솔직하게 말해봐. 어느 별에서 왔냐?”

형수의 싱거운 헛소리를 흘려들으며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아홉 타자 연속 삼진.

이건 대기록의 시작에 불과했다.

< 『해외편 - 199』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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