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98』 >
『해외편 - 198』
꿀 같았던 달콤했던 휴식일이 지나고 14일이 되었다.
어제는 달콤한 꿈을 꾸었다면 오늘은 거부하고 싶은 지독한 악몽과 마주해야만 했다.
따- 악!
크게 호선을 그리며 사직 구장의 담장을 훌쩍 넘겨버리는 타구.
모든 베이스를 차지하고 있던 루상의 모든 주자들을 홈으로 불러들이는 만루 홈런이 터졌다.
마운드에 서 있는 민준후 선배를 중심에 두고 느긋하게 베이스 런닝을 하는 마이크 테일러의 모습이 무척이나 거만하게 보였다.
미국 대표팀 선수로 이번 부산 올림픽에 참가한 마이크 테일러다.
소속 구단인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며 국가대표 자리에 앉은 마이크 테일러 외에도 웨인 프레이저(볼티모어 오리올스), 테리 레드메인(워싱턴 내셔널스), 더그레이 세인트(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토니 브렉맨(피츠버그 파이리츠), 루카스 제임스(탬파베이 레이스) 등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정상급 활약을 해주고 있는 스타 플레이어들과 소속 구단 유망주 순위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마이너리거들까지 역대 최강의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미국 대표팀이었다.
이처럼 엄청난 전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미국 대표팀은 현재 4전 4승을 내달리고 있었는데, 일본조차도 7점 차이로 쉽게 꺾어버리며 이번 올림픽 금메달 0순위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한국 대표팀이 미국에게 왕창 깨지고 있는 중이다.
“저 빌어먹을 자식은 군대 갈 일도 없으면서 왜 올림픽에 출전을 해서 우리 앞길을 막는 건데?”
형수는 잔뜩 골이 난 얼굴로 마이크 테일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인터뷰 못 봤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야 하는 나라는 반드시 미국이어야 한다잖아.”
“미친 새끼! 지가 뭔데 금메달을 미국이 따야 한다고 지껄이는 건데? 금메달 맡겨놨대?”
대번에 욕설을 내뱉는 형수였다.
나 역시 마이크 테일러의 인터뷰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긴 했다.
흔한 말로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나라,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자부심이 엄청나게 강했고, 소위 말하는 미국 영웅주의에 찌든 인물이 바로 마이크 테일러인데 이번 올림픽에서 자신이 미국 대표팀의 영웅이 되고 싶은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조국이 최고라 여기고 사랑하겠다는데 뭐라고 할 말은 아니지만, 남들이 보기에 심각할 정도로 우월감에 빠져 있는 모습은 꼴사나울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런 마이크 테일러와 비슷한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국가대표 선수 자격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다른 메이저리거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줘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고작 3회였는데, 벌써 점수가 6대0이 됐다.
이런 상황이라면 7점 차이로 패배한 일본보다 훨씬 더 굴욕적인 패배가 될지 몰랐다.
더욱이 내일 경기가 일본전이었기에 오늘 경기에서 너무 기세가 꺾여버리면 내일 경기도 쉽지 않을 거란 점이다.
‘그렇다고 투수를 바꿀 수도 없고.’
인천 돌핀스에서 에이스급의 활약을 하다가 4년 전, 니혼햄 파이터스로 이적을 한 민준후 선배의 구위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다만, 상대가 메이저리그에서도 정상급 활약을 펼치고 있는 타자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특히, 방금 맞은 만루 홈런은 잘 던진 공임에도 불구하고 마이크 테일러라는 괴물이 워낙 잘 받아쳤기에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승기가 꺾인 경기에서 투수들을 소모하는 건 어리석은 짓.
‘하지만 이대로 민준후 선배를 내버려두면 올림픽이 끝나고도 분명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텐데.’
팀을 위한다면 민준후 선배를 어떻게든 2, 3이닝 더 던지게 하는 게 맞지만, 이미 의지가 꺾인 투수에게 계속해서 공을 던지게 한다는 건 무척이나 잔인한 일이었다. 그리고 선수 보호를 위해서라도 당장 교체를 해주는 게 옳은 판단이다.
딱!
또 다시 안타를 맞았다.
민준후 선배의 얼굴은 돌덩어리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엇보다 방금 던진 공은 이전까지 좋았던 구위를 모두 날려버릴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안타.
급격하게 무너져버린 민준후 선배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이대로라면 또 다시 대량 실점을 할지도 모를 일.
슬쩍 백유홍 감독을 바라보니 그는 송진욱 투수 코치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뭔가를 고민하는 듯 싶던 백유홍 감독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고, 송진욱 투수 코치는 곧바로 불펜에 전화를 넣었다.
“타임!”
백유홍 감독이 직접 타임을 요청하곤 마운드로 향했다.
“교체하려나 본데?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마운드에 올라가고 싶지 않을 텐데.”
형수의 말대로 나 역시 누가 교체 투수로 나올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나와 형수가 궁금해 하는 사이 드디어 불펜 투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국진이?”
고등학교 1년 후배 고국진이었다.
“여기서 국진이는 좀 아니질 않냐? 차라리 경험 많은 송염우 선배를 올리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아무리 패색이 짙은 경기라고 해도 그렇지 국진이처럼 어린 투수를 마운드에 올려서 패전 처리 시키는 건 좀…….”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어떤 투수라도 교체되어 마운드에 올라가고 싶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제 고작 21살인 국진이는 아닌 것 같았다.
“오해하지 마라. 저건 국진이가 원해서 교체한 거니까.”
어느새 송진욱 투수 코치가 나와 형수 곁으로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코치님, 제 말은 그러니까…….”
감독과 코치를 욕한 것 같았기에 형수가 당황해서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송진욱 코치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형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말 국진이가 스스로 교체 되어 마운드에 올라가길 원했다는 겁니까?”
“메이저리그의 타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공이 얼마나 통하는지 시험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더군.”
의외의 말에 나와 형수가 놀라서 마운드 위에서 연습투구를 시작하는 국진이를 바라봤다.
송진욱 코치의 말이 거짓말은 아닌 듯, 연습투구를 하는 국진이의 표정은 억지로 끌려나온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야무지게 다물고 있는 입술과 두 눈에서 느껴지는 투지는 스스로 마운드에 서길 요청한 것이 분명했다.
“메이저리그를 목표로 삼는 놈이니까 이번처럼 좋은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었겠지.”
오늘 선발 명단에서 제외된 정요한 선배의 말이었다.
정요한 선배와의 대화를 통해서 국진이가 품고 있는 꿈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국진이도 다른 투수들처럼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활약하는 게 꿈이었다.
그리고 국진이의 롤모델이 나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요즘 어린 야구 꿈나무들에게 있어 내가 롤모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기에 놀라울 건 없었지만, 나보다 1년 후배인 국진이가 나를 선망하고 있다는 말은 좀 의외였다.
고작 1살 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 롤모델보다는 경쟁자, 혹은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졌으니까.
“올림픽에서 메이저리거들을 상대로 공을 던져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하더니 오늘 아주 원 없이 공을 던지겠네.”
정요한 선배의 말에 다시 마운드에 서 있는 국진이를 바라봤다.
‘선배님,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명성 중학교에서 선배님께서 혼자만의 힘으로 2년 연속 전국 대회 우승과 MVP를 차지하는 모습을 보고 선배님처럼 되고 싶다고 열심히 노력했고, 그 결과 일석 고교에 입학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식으로 나와 첫 인사를 나누었던 국진이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1년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깍듯하게 날 대했던 국진이다.
아무리 학교 규율 때문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은근 슬쩍 편안하게 대하기 마련인데, 국진이는 내가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도 하늘 같은 선배 대접을 해주었던 녀석이다.
그런 녀석에게 난 졸업 이후 단 한 번도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국내 무대에 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가끔씩 국진이가 연락을 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살갑게 대해주질 않았고, 미국에 진출하고 나서는 아예 연락 한 번 한 적이 없었으니 국진이 입장에서는 서운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로서 부끄러웠다.
국진이 입장에서는 좋아하는 선배라고 깍듯하게 대하며 살갑게 다가왔는데, 선배로서 전화 한 통 먼저 해본 적이 없었으니.
“웨인 프레이저네. 국진이 고전 좀 하겠지?”
작년 올스타 출신의 웨인 프레이저는 절대 만만한 타자가 아니다.
올 시즌에는 성적이 좋지 못했지만, 작년에는 무려 40개의 홈런을 터트렸을 정도로 장타력을 인정받고 있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주전 1루수다.
‘안타를 맞든, 홈런을 맞든 상관없으니까 자신 있게만 던져라, 국진아.’
지금부터라도 국진이에게 선배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이나, 경험들을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휴우~ 메이저리거는 역시 대단한 것 같습니다.”
마운드를 내려온 국진이가 나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선배님은 어떻게 저런 괴물 같은 타자들을 상대로 그런 믿기지 않을 기록들을 달성하고 계시는지… 역시 선배님이십니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4.2이닝 4실점.
좋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못 던졌다고도 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고생했다. 넌, 잘 던진 거야.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말해도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선배님께서 해주시는 조언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을 겁니다!”
“팥 뭐?”
“그만큼 선배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따르겠다는 말입니다.”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국진이었다.
“나도 아직 메이저리그 2년차에 불과한 신인 투수라 누구에게 조언을 할 입장은 아니지만, 내가 경험한 것을 토대로 말을 하자면…….”
국진이는 내가 하는 말을 단어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경청했다.
나와 국진이의 대화에 다른 선수들도 귀를 기울였고, 송진욱 코치도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거나, 내 말에 살을 붙이기도 했다.
분명, 국진이에게 오늘은 무척이나 소중한 경험이었고 그것이 영양분이 되어 성장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국진이는 좌절하기 보단 자신의 문제점을 일찍 파악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투수였다. 그런 점이 없었다면 지금 소속 구단에서 선발 투수로 자리를 잡지 못했을 거다.
경기 초반 승패가 결정됐던 것처럼 한국 대표팀은 미국을 상대로 패배하고 말았다.
최종 스코어 12대4.
부끄러운 경기 결과였지만, 어쨌든 미국 대표팀을 상대로 4점이라는 점수를 냈다는 점이 중요했다.
“만약, 결승전에서 미국하고 붙으면 지혁이가 선발로 올라가서 무실점으로 8이닝까지 막아주기만 하면 뭐 우리가 우승이네! 흐흐흐!”
형수의 말에 짐을 챙기던 선수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대패를 했지만, 모두의 가슴속에 미국이 상대라 하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라는 믿음과 의욕이 심어졌기에 그리 비관적인 경기 결과라고는 할 수 없었다.
물론, 당장 내일 예정되어 있는 일본전이 우선이다.
일본은 스포츠, 경제, 문화 등등 모든 부분에서 한국의 영원한 라이벌이다.
그것도 단순한 라이벌이 아니라, 무조건 이겨서 상대를 짓밟아야 하는 상대인만큼 내일 경기에 나서는 선수들의 의지는 결승전 그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내일 선발 투수가… 동호 선배님이니까.’
국내 토종 에이스 양동호 선배의 별명 중 하나가 바로 ‘일본 킬러’다.
충분히 내일 경기를 기대해 볼만했다.
< 『해외편 - 198』 > 끝
ⓒ 독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