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97』 >
『해외편 - 197』
-오늘 경기에서 차지혁 선수는 9이닝 동안 총 96개의 공을 던졌습니다. 그 중 포심 패스트볼이 무려 74구였으며, 이 중 63구는 모두 160km 이상의 빠른 강속구를 던졌습니다. 특히, 경기 마지막 타자였던 세르지오 발데즈 선수를 삼진으로 잡은 마지막 결정구는 무려 166km가 나오면서 오늘 경기 최고 구속을 기록하며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야구 역사상 이런 기록은 처음이라 전 세계가 놀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좋은 변화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무모할 정도로 패스트볼에만 집착했는지 솔직하게 답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기자의 질문에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투수는 원래 가장 자신 있는 공을 던지는 것 아닙니까? 제가 가장 자신 있게 던질 수 있는 확실한 공이 바로 패스트볼이고, 전 오늘 경기에서 그동안 제가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앞으로 투수로서 마운드에서 어떤 공을 던져서 타자와 승부를 벌여야 할지를 확실하게 깨달았을 뿐입니다.”
-그 말씀은 앞으로도 패스트볼의 비율을 오늘 경기처럼 가져가겠다는 뜻입니까?
“되도록이면 그렇게 할 예정입니다.”
담담한 내 대답에 주변의 기자들이 모두 입을 쩍 벌리며 놀랐다.
대놓고 패스트볼만 던지겠다고 했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오늘 경기를 지켜보면서 이전 경기들과는 다르게 상당히 지쳐 보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하게 패스트볼의 구속을 끌어 올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죠.
“당연히 지쳤습니다. 하지만, 선발 투수는 로테이션을 통해 일정 기간 선발 출장과 회복을 보장하는 보직입니다. 제가 선발로 출장하는 경기에서만큼은 모든 체력을 당일 경기에 소모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리하게 구속을 끌어올렸다고 하기엔 스트라이크와 볼 비율이 너무 좋지 않습니까?”
이후로도 퍼펙트 게임에 대한 아쉬움, 세르지오 발데즈와의 라이벌 관계 등 온갖 질문들이 쏟아졌다.
경기 직후에 이뤄진 제법 큰 규모의 인터뷰였기에 인터뷰실에 모여든 기자들에게 한 번씩만 질문을 받아도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 쿠바전을 승리하긴 했지만, 어제 있었던 대만전에서 패배함으로써 4강 진출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거란 전망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 대표팀은 강합니다. 어느 대표팀과 맞붙어도 쉽게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경기를 통해 차지혁 선수에 대한 인식이 상당부분 바뀔 것 같은데 선수 본인으로서는 사람들이 어떤 투수로 자신을 바라봐 줬으면 합니까?
가장 기다렸던 질문이 드디어 나왔다.
반드시 인터뷰를 통해 내가 직접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을 때였다.
“사람들에게 제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강속구 투수였다는 것 하나만 각인하고자 합니다. 오늘 경기가 그 시발점이 되어 앞으로도 오늘과 같은 경기가 꾸준히 이어지도록 노력을 할 겁니다.”
하고자 했던 말을 끝냈기에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자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딜 가냐며 나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코칭스태프들에게 가로 막혀서 결국은 인터뷰가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치고는 숙소로 돌아와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지만,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확실하게 정한 날이라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날이었다.
눈을 뜨니 이미 아침이었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십여 통이나 와 있었다.
황병익 대표를 비롯해서 몇몇 사람들이었고, 간단하게 샤워부터 하고 연락을 꼭 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만 간단하게 전화를 했다.
-맥브라이드 단장이 어찌나 전화를 하던지, 아마도 어제 경기를 지켜보고 무척이나 놀란 모양입니다.
놀랄 만도 하겠지.
혹시라도 내가 너무 무리해서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했을 테고, 갑작스럽게 바뀐 내 투구 스타일에 우려도 했을 거다.
-놀라긴 했지만, 어쨌든 차지혁 선수가 어제 보여줬던 투구 내용으로 인해 다저스 구단이 꽤나 급해졌을 겁니다.
“급해지다니요?”
-아시다시피 계약 문제를 지금까지 올림픽 이후에 마무리 짓자고 저희 쪽에서 미루고 있질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제 차지혁 선수의 투구로 인해 지금 몇몇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영입 경쟁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돌변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다저스로서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확실하게 계약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계약 문제야 전적으로 황병익 대표에게 모두 일임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황병익 대표도 내가 반응이 별로 신통치 않다는 걸 알곤 대화의 내용을 다른 쪽으로 자연스럽게 돌렸다. 그렇게 10분가량 통화를 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고 안젤라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는 여전히 부모님, 지아와 함께 부산 관광을 하고 있었다.
-몸은 괜찮아요?
“푹 자고 일어났더니 멀쩡해요. 마음만 같아서는 나도 안젤라와 함께 관광이라도 하고 싶지만, 오늘도 대표팀 경기가 있어서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아요.”
-당연한 걸요. 대신 13일에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내게 미안해하지 마요. 미안하기로 따지면 제가 척에게 미안하죠.
“왜요?”
-척이 없는데도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말과 함께 진심으로 밝게 웃는 안젤라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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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쿠바에 이은 세 번째 한국 대표팀의 상대는 네덜란드였다.
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은 8개국 가운데 최약체로 분류가 되어 있는 네덜란드는 확실히 첫 경기부터 일본에게 8점 차이로 대패를 하고, 어제는 그나마 해볼만하다 싶었던 멕시코에게도 5점 차이로 패배를 하며 4강 진출은커녕, 1승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네덜란드와의 경기를 위해 한국 대표팀은 부산에서 창원으로 향했다.
올림픽 야구 경기는 부산 사직 구장과 창원 구장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쿠바전에서 기분 좋은 승리를 거뒀기 때문인지 대표팀의 분위기는 상당히 좋았다.
백유홍 감독은 상승세를 탄 선수들에게 불필요한 말이나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그 결과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국 대표팀은 12대0이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이날 경기에서 이규환 선배는 이틀 연속 홈런을 터트리며 최고의 컨디션을 자랑했고, 어제까지 안타를 하나도 치지 못했던 타자들도 모두 안타를 기록하며 내일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예고했다.
12일, 멕시코전.
다시 한 번 창원 구장을 찾은 한국 대표팀이었고, 이날 경기 선발로는 유한석 선배가 마운드에 올랐다.
“한석 선배가 피칭하는 모습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후 처음이니까 벌써 몇 년이냐.”
곁에 앉은 형수의 말에 나 역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석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그해 있었던 전국 고교 야구 대회에서 유한석 선배는 탈고교급의 압도적인 모습으로 일석 고등학교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도 과연 유한석 선배처럼 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우리 두 사람의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었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유한석 선배의 컨디션은 굉장히 좋았다.
제구가 낮게낮게 잘 깔리면서 구속, 구위 모두 만족스러워 멕시코 타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한석 선배 저렇게 던지는 거 보니까 꼭 우리 고딩 시절로 돌아간 것 같지 않냐? 그때가 벌써 몇 년 전이냐? 그런데도 아직도 생생한 게 엊그제 일 같다. 흐흐흐.”
“왜 돌아가고 싶어?”
내 물음에 형수가 끔찍한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정색을 했다.
7이닝 무실점.
유한석 선배는 박수 받을 정도로 훌륭한 투구 내용으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오늘과 같은 모습만 유지한다면 머지않아 유한석 선배도 시애틀 매리너스에서도 확실하게 선발 자리를 꿰찰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운드에서 유한석 선배가 멕시코 타자들을 꽁꽁 묶었다면 타선은 어제 네덜란드 전에 이어 맹타를 휘두르는 타자들로 인해 일찌감치 5회 8점이라는 점수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최종 결과 11대0.
압도적인 승리도 기분 좋았지만, 무엇보다 3경기 연속 무실점이라는 한국 마운드의 높이가 눈에 띄는 결과였다.
선발 투수들은 제 몫을 충분히 해주고, 불펜 투수들 역시 체력적인 소모가 거의 없었기에 하루 휴식 후에 있을 미국전에 대한 좋은 경기 결과를 기대해볼만 했다.
휴식일이 되자 오전 팀 전체 훈련을 가볍게 소화하고 나서야 선수단 전체에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많은 선수들이 가족, 혹은 애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젤라랑 데이트 가냐?”
옷을 차려입는 나를 형수가 부럽다는 듯 한 눈으로 쳐다봤다.
“주전 포수가 되기 전까지는 여자 만날 생각이 없다면서 뭘 그렇게 부럽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이씨! 그 정도로 의지가 확고하다는 걸 말하는 거지! 그러지 말고 안젤라 친구들 좀 소개시켜 줘! 사람들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안젤라랑 어울리는 친구들이면 얼마나 끝내주겠냐? 너랑 나처럼! 흐흐흐!”
“안젤라 친구들이면 안젤라처럼 잘 나갈 텐데?”
“그게 뭐?”
“그렇게 잘 나가는 여자들이 고작 백업 포수를 만나겠어?”
“…개시키.”
잔뜩 치켜뜬 눈으로 날 노려보는 형수를 뒤로하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숙소를 빠져나오자 여느 때처럼 나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숙소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특히,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훨씬 더 많았는데, 이런 여자들을 두고 형수는 이렇게 말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거지.”
안젤라 쉴즈라는 무적의 방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의 심리상 우선은 한 번이라도 찔러보자는 식이라고.
그러면서 말하길.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거 봤냐? 어차피 여자들 입장에서는 널 찔러봐서 넘어오면 대박인거고, 안 넘어오면 그만이잖아? 팬심? 순수한 척 하기는! 팬심은 겉치장일 뿐이야. 속마음은 어떻게든 널 한 번 자빠트려서 인생 역전 해볼까 하는 여자들이 수두룩할 걸?”
형수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었지만, 확실히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날 찾아오는 여자 팬들의 노골적인 시선은 껄끄러운 게 사실이었다.
따지고 보면 한국 여자들은 그나마 정도를 지킬 줄이라도 알지, 미국에서는 대놓고 잠을 자자느니, 선물이랍시고 자신의 속옷이나 누드 사진을 보내주는 걸 보면 기가 막힐 정도였다.
특히 가슴을 드러내놓고 사인을 해달라고 했던 팬은…….
‘정상이 아니야.’
이정도면 자유분방한 정도를 넘어선 방탕이다.
“꺄악! 차지혁 선수!”
“차지혁 선수다!”
나를 발견한 여자들이 무서울 정도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침착하게 대응했다.
사인을 원하는 팬들에게는 사인을 해주었고, 그 이상의 무리한 요구를 하는 여자들에게는 칼같이 거절을 표시했다.
하지만, 아무리 침착하고 냉정하게 행동해도 팬들에게 둘러싸여 시간을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틈이 없다고 생각할 때였다.
“척!”
익숙한 음성, 내게 있어 너무나도 달콤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나를 꽁꽁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군계일학.
주변에 나름 한 미모 한다는 여자들도 꽤 있었지만, 그런 여자들마저 오징어를 만들어버리는 신의 축복을 듬뿍 받은 여신이 활짝 웃으며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
“안젤라!”
내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가자 안젤라가 수많은 여자들이 보는 앞에서 나에게 키스를 했다.
가볍게 입술끼리 맞닿자 주변에서 자지러지게 소리를 지르는 여자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쳐다보는 여자들, 재빠르게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여자들, 기분 나쁘다는 듯 눈에 쌍심지를 켜는 여자들 등등 각양각색의 반응이 나왔다.
“가요!”
안젤라의 말에 나는 그녀와 함께 팔짱을 끼고 유유히 걸음을 내딛었고, 우리는 그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데이트를 즐겼다.
그렇게 나와 안젤라가 데이트를 즐기는 사이 나와 안젤라가 키스하는 장면이 인터넷을 도배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지아가 내게 말했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 건데?”
“겨, 결혼이라니?”
내가 당황해서 지아를 바라보자 뭘 당황하냐는 듯 대꾸했다.
“그렇게 공개적으로 연애를 해놓고 다른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겠다고? 와~ 정말 비양심적이다!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요? 오빠랑 헤어지고 다른 남자 만나서 결혼할 수 있어요?”
“글쎄요.”
안젤라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고, 지아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날 바라봤다.
“언니의 대답으로 확실해졌네.”
“뭐가 확실해져?”
“프로포즈하라고 이 멍청아!”
< 『해외편 - 19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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