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96』 >
『해외편 - 196』
태극 마크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깨닫고 나니 내가 던지는 공의 위력도 훨씬 더 강력해졌다.
쿠바 대표팀 타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헛스윙을 하며 배트를 허공에 휘둘렀고, 주심은 이런저런 신경 쓸 필요 없이 스트라이크, 스윙, 타자 아웃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관중들은 목청이 터져라 내 이름을 부르며 열광했으며, 나 역시 아주 오랜만에 속이 다 시원해질 정도로 공을 뿌려대니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나는 강속구 투수다.
파워 커브, 체인지업, 12to6커브 등의 변화구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가장 자신 있게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공은 역시 포심 패스트볼이다.
칠 수 있으면 쳐봐라가 아니라 절대 칠 수 없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강력한 강속구에 쿠바 타자들은 연신 삼진을 당하며 타석에서 물러났다.
“후!”
숨이 차올랐다.
160km가 넘는 공을 계속해서 던져대니 자연스럽게 체력적인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빠른 공도 아니고 무려 100마일이 넘는 공을 계속해서 던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음 이닝부터는 완급 조절 좀 해.”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음료수를 들이키는 내게 형수가 말했다.
한국의 8월은 무척이나 덥다.
한낮의 기온은 30도를 우습게 넘기고 내려쬐는 태양빛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 몸의 체력을 급격하게 빼앗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전력을 다해 공을 던진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베테랑 투수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완급 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대로 가자.”
“이제 고작 5회가 지났을 뿐이야. 너 이렇게 계속 던지면 7회도 간당간당해. 끝까지 가자면서?”
형수의 걱정은 지극히 당연했다.
겨우 5회를 마쳤을 뿐인데, 체감상으로는 7회나 8회를 지난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내 체력 알잖아? 아직 3이닝은 충분히 더 던질 수 있어.”
“그렇지만…….”
“나 선발 투수잖아. 선발 투수는 어차피 오늘 경기이후 3일 이상의 휴식이 보장되잖아. 그러니까 오늘 경기에서 모든 체력을 소진해도 상관없어. 그게 선발 투수니까.”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선발 투수는 하루의 경기를 위해 며칠을 준비하는 보직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체력적으로 경기가 끝난 이후에도 큰 부담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쉽게, 쉽게 경기를 해나가고 있었다.
오늘 경기도 그랬다.
단기전이라는 대회 특성상 언제든 불펜 투수로도 마운드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내 머릿속에 담겨 있었던 거다.
내가 뭐라고.
선발 투수인 주제에 불펜 투수의 역할까지 혼자 생각했다니.
좋게 생각하면 팀을 위한 희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다른 투수들을 모두 믿지 못하는 독선적인 자만심일 뿐이었다.
내게 태극 마크가 부여된 이유는 선발 투수로서의 가치 때문이다.
국가대표 투수로 나를 차출했을 때에는 선발 투수로서 내가 마운드에 올라가는 경기를 책임져주길 바랐던 거지, 이 경기, 저 경기 모두 투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뽑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상대는 쿠바 대표팀이고, 절대 섣부르게 공을 던져서는 안 되는 팀이다.
이런 강적을 눈앞에 두고 내일 경기, 모레 경기를 생각했다니.
나 스스로 생각해도 참 한심한 생각이다.
따- 악!
“크다!”
어제 침묵했던 이규환 선배의 타구가 크게 날아올랐다.
전광판에 찍힌 158km의 패스트볼을 그대로 때려낸 이규환 선배였다.
마운드에서 담장 밖으로 넘어가는 타구를 바라보는 카를로스 올리베이라 쿠바 대표팀 선발 투수의 표정이 일그러져 보였다.
100마일의 공을 우습게 던지는 쿠바 대표팀 에이스 카를로스 올리베이라는 제2의 아롤디스 채프먼(Aroldis Chapman)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많은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는 선수다.
2m가 넘는 큰 키와 평균보다 긴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는 대단했다.
쿠바 리그에서는 공식적으로 106마일까지 던졌었고, 비공식적으로는 108마일까지도 던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타고난 쿠바의 강속구 투수다.
구속과 구위에 비해 구종의 다양성이 부족한 점과 실투가 조금 많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었지만, 이제 22살, 나와 동갑인 카를로스 올리베이라는 얼마든지 성장 가능성이 있었기에 향후 3, 4년 후에는 어떤 모습일지 예측이 불가능한 선수이기도 했다.
이규환 선배의 솔로 홈런으로 1점을 추가하며 2점을 앞선 한국 대표팀.
후속 타자들이 모두 삼진을 당하면서 더 이상의 추가 점수는 없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던져라.”
글러브와 모자를 챙겨서 마운드로 향하는 나에게 송진욱 투수 코치가 그렇게 말했다. 그 역시 내가 현재 오버 페이스 중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마운드에 올랐고, 타석에 들어서는 6회 초 쿠바 대표팀의 선두 타자 7번 베니토 페레르를 향해 초구를 던졌다.
쐐애애애액!
퍼- 어엉!
부웅!
초구부터 패스트볼을 노리고 들어왔다는 듯 주저 없이 배트를 휘두르는 베니토 페레르였지만, 전광판에 찍힌 구속처럼 163km의 패스트볼은 쉽게 칠 수 있는 그런 공이 아니다.
아무리 노리고 있다 하더라도 타자 바깥쪽으로 낮게 깔려 들어가는 공을 때린다는 건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타자들이라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
배트를 꽉 쥐고 서서 나를 노려보는 베니토 페레르의 모습을 바라보며 와인드업을 했다.
두 번째 공은 타자의 몸 쪽 스트라이크 존을 관통하는 161km의 패스트볼.
“스트라이크!”
160km가 넘는 공이 몸 쪽으로 들어오면 타자는 배트를 휘두를 생각보다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는게 먼저다.
베니토 페레르도 그랬다.
분명 치겠다는 의욕이 넘쳐흘렀지만, 흡사 총알처럼 몸 쪽으로 날아오는 공에는 공포감을 느끼며 움찔 거리기만 할 뿐 배트를 휘두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속적으로 강속구를 던지면서 체력 소모가 큰 건 사실이지만, 투구수를 줄이면 확실히 이닝은 늘어나기에 나는 유인구 따위 던질 생각하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구를 던졌다.
틱!
타구가 배트 윗부분에 살짝 걸리면서 내야에 높이 떴고, 콜 플레이와 함께 유격수 정요한 선배가 안정적으로 잡아내며 아웃 카운트를 올렸다.
이어진 타자들을 상대로도 5개의 공만 던져서 이닝을 종료시켰다.
5개 중 3개가 포심 패스트볼로 160km가 넘는 공들이었고, 나머지 2개만이 컷 패스트볼이었지만 그조차도 157km가 찍히면서 사직 구장을 찾은 관중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제 남은 이닝 3이닝.’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며 어떻게 던질 것인지를 생각했다.
@
부- 웅!
“스윙! 타자 아아- 웃!”
관중들의 함성소리에 묻히지 않기 위해 주심이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지, 지금까지 삼진이 몇 개죠?”
차동호는 테블릿pc 기록표에 숫자를 정정했다.
SO(삼진) : 18.
“이번으로 열여덟 개.”
차동호의 말에 후배 기자는 질렸다는 듯 마운드를 내려오는 차지혁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흡사 괴물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오늘 경기 엄청나네요. 2회부터 8회까지 미친 듯 한 강속구 퍼레이드라니… 그래도 차지혁 선수도 사람은 사람인가 보네요. 꽤 지쳐 보이는 모습이 9회는 힘들 것 같네요.”
푹푹 찌는 무더위 속에서 8이닝 동안 83개의 공을 던진 차지혁이었다.
차지혁의 강철 같은 체력을 생각했을 때, 100구는 기본이고 조금 무리를 한다면 120구까지도 가능했으니 83구는 확실히 적은 숫자였지만, 문제는 이 중 60구 정도가 100마일에 육박하거나, 그 이상의 강속구라는 점이다.
투수의 강속구는 타고난 어깨도 중요하지만 체력도 무척이나 중요하다.
지금까지 많은 경기를 봐왔지만 오늘처럼 선발 투수가 강속구를 많이 던진 경기는 단 한 경기도 없었다.
‘오늘 경기는 차지혁의 새로운 면이 부각될 거야!’
차지혁이 강속구 투수이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라는 사실이 사람들 머릿속에 박혀 있지만, 실제로 그를 강속구만 뿌려대는 투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완급 조절과 던지는 변화구 모든 구종들이 리그 정상급의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경기는 자신의 변화구를 이용한 타자들과의 심리 싸움이나, 완급 조절 능력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단순하지만 강속구 하나만으로 타자들을 압도하는 파괴적인 모습은 전율이 일 정도였다.
이전까지의 모습이 노련한 사냥꾼 같았다면, 오늘은 거친 야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온 모든 도전자들을 오로지 힘으로 짓누르고 파괴하는 야성미마저 느껴지는 차지혁의 투구는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은 시원함을 선사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카타르시스의 절정이라고나 할까?
많은 언론들이 라이벌 식으로 묶었었던 세르지오 발데즈는 오늘 경기에서 차지혁에게 삼진을 3번씩이나 당하면서 한참이나 부족한 모습을 보였고, 쿠바 특급 내야수로서의 가능성을 가진 호세 안토니오 로드리게스 역시 연속 삼진으로 자존심을 완전히 구겼다.
‘하긴, 오늘 경기에서 제대로 이름값을 한 타자가 있지도 않지.’
쿠바 리그 타격왕, 홈런왕이라 불리던 3, 4번 타자들 역시 톡톡히 망신을 당했으니 오늘은 완전히 경기를 지배한 차지혁이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방금 끝난 8회, 2아웃 상황에서 6번 타자 하신토 초렌스의 타구가 빗맞으면서 안타가 되어 퍼펙트 게임이 깨져버렸다는 사실이다.
‘오늘 경기가 퍼펙트 게임이 되었다면… 역대 퍼펙트 게임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게임이 되었을 텐데.’
차동호는 왜 하필이면 빗맞은 안타가 나와서 역대급 경기에 초를 쳤는지 모르겠다는 듯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다.
“오늘 경기만 놓고 보면 왜 야구를 투수 놀음이라 하는지 확실하게 증명이 되네요. 차지혁 선수가 오늘처럼만 경기력을 유지한다면 미국도 상대가 되질 않겠는데요.”
후배 기자의 말에 차동호는 피식 웃었다.
미국 대표팀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 올스타 대표를 선발해도 오늘 차지혁의 공을 칠 타자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싶었다.
“어? 또 나오네요!”
한국 대표팀 공격이 끝나고 9회 초가 되자 더그아웃에서 차지혁이 걸어 나왔다.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여전히 마운드에 올랐다.
“마지막 이닝에도 불같은 강속구를 연달아 던질까요?”
“그럴지도.”
그럴 만한 체력이 남아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차동호는 왠지 그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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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욱! 후욱! 후욱!”
머릿속이 멍해질 정도로 체력 소모가 심했다.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고, 당장이라도 투수 교체 사인을 보내고 싶었다.
‘다 왔어.’
마지막 종착역까지 왔다.
여기서 투수 교체를 하고 싶지 않았다.
경기를 종료시킬 수 있는 마지막 아웃 카운트는 단 하나.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내놔야만 하는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재밌게도 경기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지도 모르는 타자는 세르지오 발데즈였다.
상대 전적 7타수 1안타.
그 중 하나의 안타는 홈런이고, 나머지 여섯 타석은 모두 삼진이다.
놀라울 정도로 극단적인 상대 전적이다.
타석에 선 세르지오 발데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홈런을 친 이후 내리 6연속 삼진을 당했으니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겠는가?
‘일곱 타석 연속으로 보내주겠어.’
초구를 던졌다.
약간 높은 코스였지만, 여전히 160km가 넘는 강속구가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고, 세르지오 발데즈는 스윙 대신 공을 지켜보며 배트를 바짝 조여 쥐었다.
세르지오 발데즈는 다시 한 번 내게서 한 방을 노리고 있을 거다.
9회 말 2아웃 상황이라고 하지만, 점수도 2점 차이밖에 나질 않으니 여기서 내게 홈런을 때리면 감정적인 쿠바 선수들의 특성상 뜨겁게 달아올라 역전을 허용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희망의 불씨,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면 오늘 경기의 주인공은 세르지오 발데즈로 바뀔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은 절대 없어야 해.’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 일어나서 내가 던지는 공 하나, 하나에 환호하고 열광하는 관중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역전의 발판을 만들어 줄 순 없었다.
쐐애애애애액.
딱.
무릎 높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쳐가는 공을 세르지오 발데즈는 때려냈다. 비록, 파울 타구가 되고 말았지만 이제 100마일의 빠른 강속구가 확실하게 눈에 익었다는 의미다.
역시 타고난 천재들은 다르다는 건가?
주심에게서 새로운 공을 받은 형수가 직접 공을 들고 마운드로 올라왔다.
“저 자식, 패스트볼을 노리고 있어.”
변화구로 가자는 형수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혁아, 우리 쉽게 가자. 여기서 커브 하나 던지면 꼼짝없이 삼진이라니까. 경기 끝내야지.”
“너는 내가 도망가길 바라는 거야?”
“뭐? 야! 그게 왜 도망가는 거야! 투수가 변화구를 던지는 게 당연하지! 주구장창 패스트볼만 던지는 투수가 어딨어? 그리고 변화구에 속으면 그게 병신이지!”
“투수는 말이야. 타자의 도전을 피하면 더 이상 마운드에 서 있을 이유가 없어.”
“답답하네! 도전은 무슨! 그런 식으로 따지면 넌 앞으로도 계속 패스트볼만 던질 거냐?”
“가능하다면.”
“뭐?”
“지금까지 난 어떤 투수였다고 생각해?”
무슨 소리냐는 듯 형수가 눈을 찌푸렸다.
“사람들 말처럼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투수로서 대단한 커리어를 쌓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난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공을 던졌던 투수였어. 딱히 날 돋보이게 하는 말이 없었어.”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다른 투수들이 모두다 너처럼 되고 싶어 하고, 타자들도 너를 상대로 벌벌 떠는데 도대체 뭐가 더 필요한데? 아니, 넌 도대체 뭐가 더 부족한 건데?”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강속구 투수.”
“뭐?”
“투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말이잖아. 주심이 눈치 준다. 그만 가봐.”
형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인상을 팍 쓰며 돌아갔다.
나를 수식하는 단어는 많지만, 뚜렷하게 날 증명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오늘 경기를 통해 확실하게 정하고 싶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강속구 투수가 누구인지를.
타석에 서 있는 세르지오 발데즈를 바라보며 포심 패스트볼 그립을 잡았다.
‘패스트볼을 노리고 있다면 쳐봐. 절대 칠 수 없을 테니까.’
와인드업을 하고 오늘 경기를 끝낼 마지막 공을 던졌다.
< 『해외편 - 19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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