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95화 (195/221)

< 『해외편 - 195』 >

『해외편 - 195』

-무슨 작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조금 더 지켜본 이후에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투 볼 상황에서 차지혁 선수 제 삼구를 던졌습니다! 이번에도 볼입니다! 아슬아슬하게 로드리게스 선수의 몸을 비켜나갔습니다만, 자칫 데드볼로 타자를 루상으로 내보낼 수 있을 법한 공이었습니다! 로드리게스 선수 배트를 홈플레이트 위로 내던지며 씩씩거립니다! 연속적으로 몸 쪽을 위협하는 공을 세 개나 던졌으니 타자 입장에서는 확실히 화가 날만한 상황인 건 맞습니다.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로드리게스 선수를 주심이 겨우 진정시키고 경기를 재개합니다. 더불어 주심 투수 차지혁 선수에게도 경고를 합니다. 노 스트라이크 쓰리 볼 상황에서 차지혁 선수 네 번째 공을 던집니다! 스트라이크! 몸 쪽 스트라이크 존을 정확하게 꿰뚫고 지나가는 96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입니다! 잔뜩 흥분한 로드리게스 선수는 무서운 표정으로 차지혁 선수를 노려보며 타격 자세를 잡고 서 있습니다.

-방금 던진 공으로 확실해졌습니다. 벤치에서는 로드리게스 선수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최대한 건드려서 오늘 경기에서 그가 제대로 된 활약을 할 수 없게끔 만들고자 한 겁니다. 다혈질적인 선수들의 경우 흥분하면 경기를 망치는 일이 종종 있는데 한국 대표팀 벤치에서는 아마도 이 부분을 이용한 전략을 짠 것 같습니다.

-스윙! 체인지업에 헛스윙을 하며 로드리게스 선수 쓰리 볼 노 스트라이크 상황을 풀 카운트까지 이어갑니다. 장도형 해설위원님 말씀대로라면 이번에 차지혁 선수가 결정구를 던질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차지혁 선수는 쉽게 제구력 난조를 보이는 투수가 아닙니다. 오히려 완벽에 가까운 제구력으로 항상 볼 컨트롤을 자유자재로 하는 투수 중 하나입니다. 갑작스러운 연속 볼은 분명 의도된 것이 분명합니다.

-말씀하시는 차지혁 선수 제 육구 던졌습니다! 스윙! 약간 높은 코스의 스트라이크 존을 그대로 관통해버리는 99마일의 포심 패스트볼! 오늘 경기 최고 구속의 패스트볼이 나왔습니다! 연속으로 볼 세 개를 얻어내고도 결국 삼진으로 물러나고 마는 로드리게스 선수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그대로 배트를 부러트리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서도 헬맷을 던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경기 로드리게스 선수는 차지혁 선수를 상대로 꽤나 고전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흥분한 선수는 그만큼 수비에서도 에러를 범하는 확률이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로드리게스 선수가 냉정을 되찾지 못하는 이상 오늘 그의 수비 실력도 평소보다 좋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로드리게스 선수의 수비를 기대하며 1회 초, 마지막 타자가 될지도 모르는 3번 타자 호아킨 알론소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알론소 선수로 말할 것 같으면 쿠바 리그에서 타격왕을 무려 4번이나 차지한 무서운 타자이질 않습니까?

-타격 재능만큼은 정말 무시무시한 타자입니다. 한 때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리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걸려서 결국은 무산된 타자이기도 합니다만, 실력만 놓고 본다면 분명 메이저리그에서도 상위 클래스에 이름을 올려놔야 할 정도로 갖다 맞추는 능력이 뛰어난 타자입니다. 다만, 전성기가 끝나가는 선수인만큼 차지혁 선수를 상대로 얼마나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일 것 같군요.

-스트라이크! 차지혁 선수 초구부터 타자의 무릎을 살짝 스쳐지나가는 98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며 스트라이크를 잡았습니다. 제 이구! 파울입니다. 몸 쪽으로 붙어 오는 공을 알론소 선수 잡아당기려다 파울 라인을 크게 벗어나며 파울 타구를 만들어 내고 말았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알론소 선수는 특히나 몸 쪽 공에 대한 대처가 무척이나 좋은 편이라 일반적인 타자들을 상대하듯 몸 쪽으로 승부를 벌였다가는 크게 당할 수가 있습니다.

-크게 와인드업을 하고 삼구 던졌습니다! 스윙! 1번 타자 세르지오 발데즈 선수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던 체인지업이 다시 한 번 위력을 발휘하면서 알론소 선수를 삼구삼진으로 침묵시켰습니다! 경기 초반부터 차지혁 선수의 체인지업이 그 어느 때보다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한국 대표팀의 1회 말 공격에 앞서 타순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1번 타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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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기분 나쁜 건 아니지?”

형수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작전인데 어쩌겠어.”

“기분 상했구나.”

이해한다는 듯 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리게스를 상대로 몸 쪽 위협구를 무려 3개나 던졌다.

처음 사인이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타자의 기를 꺾으려는 의도인가 싶어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까지 이어지는 위협구 사인은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당연히 날 믿지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니 백유홍 감독이 과연 날 믿지 못할까?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니 자연스럽게 고개를 젓게 됐다.

국내 프로 구단 감독 가운데 나를 가장 잘 아는 감독이 백유홍 감독이다.

고작 1년뿐이라고 하지만 감독과 선수로 잘 지냈고, 그게 벌써 2년 전 일이라고 하더라도 백유홍 감독만큼 날 잘 알고 믿는 국내 감독은 없었다.

자만이 아니라 자신하건데 백유홍 감독은 한국 대표팀 투수들 가운데 나를 가장 믿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나를 쿠바전 선발로 내세울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왜 백유홍 감독은 내게 위협구 사인을 냈을까?

내가 로드리게스를 상대로 안타나 홈런을 맞을까봐?

투수가 타자에게 안타를 맞거나 홈런을 맞는 일은 일상다반사고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난 경기 초반부터 로드리게스에게 안타나 홈런을 맞을 확률이 그리 높진 않았다.

그 말인 즉, 굳이 작전 따윌 지시하지 않아도 로드리게스를 상대로 아웃 카운트를 빼앗아 올 수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 왜?

딱.

시선은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지만,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으로 시야가 흐릿했던 내 정신이 타격음에 깨어났다.

타구는 그저 그런 평범한 내야 땅볼이었다.

어제 경기에 이어 오늘 경기에서도 1번 타자로 타석에 들어선 장필성 선배는 타구가 유격수 방면으로 향하는 걸 확인하고도 죽어라 1루를 향해 뛰었다.

굳이 저렇게까지 뛰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전투적인 전력 질주였다.

당연히 아웃이겠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어?”

평범한 내야 땅볼을 제대로 포구하지 못한 유격수가 한 차례 공을 더듬거렸고, 그 사이 1루를 향해 빠르게 내달리는 장필성 선배의 모습에 다급한 송구를 했지만, 그마저도 엉뚱하게 1루수 키를 훌쩍 넘기며 악송구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장필성 선배는 1루를 찍고 2루 베이스마저 밟고 섰다.

글러브를 패대기치며 성질을 부리는 유격수는 로드리게스였다.

‘설마?’

내가 백유홍 감독을 바라보니 그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혁이 널 믿지 못해서 그런 작전이 나왔던 게 아니다.”

내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며 등 뒤로 다가온 사람은 송진욱 투수 코치였다.

“감독님으로서도 고민이 많이 되는 작전이었지만, 오늘 경기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일념에 네게 그런 작전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로드리게스를 자극해서 그의 평정심을 깨트리고 수비 실책을 유도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까?”

“그것도 있고, 타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있지.”

“타자들이요?”

“어제 경기에서도 알다시피 우리 대표팀 타자들이 단 한 점도 내지 못해서 패배하고 말았으니 오늘 경기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란 법은 없지. 그리고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타자들 중 한 사람이라도 오늘 선발 투수가 지혁이 너라는 사실 때문에 마음 편하게 경기를 할까 싶어 오늘 경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똑똑하게 알리기 위해 너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거기도 하고.”

“아.”

송진욱 코치의 말을 들으니 그제야 머릿속이 맑게 개이는 느낌이 들었다.

세계 최정상급 투수라 하더라도 오늘의 승리를 위해 자존심을 버려가며 팀을 위해 희생한다. 어제 경기와 같은 결과는 물론이고, 타자들의 정신 상태를 확실하게 일깨워주기 위한 백유홍 감독의 경고인 셈이다.

‘그래서 그랬던 건가?’

1회 초 수비를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올 때, 야수들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세 명의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다른 때였다면 너나 할 것 없이 좋은 투구였다며 칭찬 세례를 하며 무척이나 분위기가 밝았겠지만, 내게 내려진 위협구 작전에 대한 불쾌함으로 주변 반응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내야 땅볼을 치고도 1루를 향해 이를 악물고 뛴 장필성 선배의 모습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오늘 경기 반드시 이겨야 한다.”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호투를 요구하는 송진욱 코치였다.

딱!

타구가 높이 솟아 우익수 깊은 곳까지 날아갔다.

2루 주자인 장필성 선배는 우익수가 공을 잡기가 무섭게 3루를 향해 내달렸고, 어깨가 좋은 우익수의 송구에 맞춰서 길게 슬라이딩을 하며 3루에 안착했다.

경기 초반부터 유니폼이 지저분해졌지만 장필성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흙을 툭툭 털어내며 득점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백유홍 감독의 의지대로 타자들은 팀을 위한 배팅을 했고, 그 결과 장필성 선배는 오늘 경기 첫 번째 득점을 올릴 수 있었다.

집중력 있게 타격에 임했지만, 후속 타자들은 더 이상 출루하지 못하고 1회 말 공격이 끝나고 말았다.

“기분 좀 나아졌냐?”

더그아웃을 빠져나온 형수가 내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물었다.

“형수야.”

“응?”

“오늘 경기 끝까지 한 번 가보자.”

“끝까지? 완투 하겠다는 거야?”

“선배들이 저렇게까지 열심히 뛰어주는데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겠어?”

“당연하지! 이왕이면 퍼펙트 콜?”

과장된 행동으로 말을 하는 형수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짜식! 이제야 웃네! 흐흐흐!”

마운드에 올라서니 관중들이 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외치며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열정적으로 나를 응원해주는 관중들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이번 올림픽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참가를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적이라 욕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군대 면제다.

군대 면제가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한 구석에 분명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번 올림픽이 아니더라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면 되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단에서도 편하고 확실한 아시안게임이 있으니 굳이 어렵고 불확실한 올림픽에 나가 무리를 할 필요가 있겠냐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한국 대표팀의 전력은 미국, 일본, 쿠바에 비교하면 한 수 아래인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더욱이 단기전인 만큼 투수인 내 활약이 두드러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구단에서는 한국 대표팀의 올림픽 금메달을 그리 희망적으로 전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단에서는 차출 의무가 없는 아시안게임 출전까지 약속 했었다.

하지만, 결국 올림픽 게임 출전을 결정했다.

어쩌면 난 스스로를 변명하고자 이번 올림픽에 참가했을지도 모른다.

금메달 가능성이 높지 않은 올림픽을 피하고 아시안게임에만 나가는 꼴사나운 모습을 피하기 위해 올림픽에 어쨌든 출전을 했다라는 방패가 필요하다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했을지 몰랐다.

그래서 였을까?

대만 전에서 패배를 했을 때에도 그렇게 절망적이라거나, 절박한 느낌이 없었다.

‘도대체 난 태극마크의 무게를 얼마나 가볍게 여겼던 건가?’

나를 열광적으로 응원해주는 관중들이 모습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운드에 서서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는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지금부터라도.’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자.

국가, 나라를 대표하는 투수로서의 실력을 제대로 입증해야만 한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경기, 수많은 사람들의 응원에 보답하는 경기력을 보여줘야 할 때다.

타석에 들어서는 쿠바 대표팀의 4번 타자 후안 아리아스.

쿠바 리그 홈런왕이라 불리는 쿠바 국가대표 4번 타자였지만, 내 눈엔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지금부터 내가 던지는 공은 타자를 상대하기 위한 공이 아니라, 내 존재를 증명하고,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던지는 공이다.

와인드업을 하고 힘껏 디딤발을 내딛으며 전력으로 공을 던졌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액-!

퍼어- 어어어엉!

“스, 스트라이크!”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은 164km가 찍혔다.

< 『해외편 - 195』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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