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93』 >
『해외편 - 193』
올림픽 첫 번째 경기.
무척이나 중요한 제1경기의 격전지는 부산 사직 구장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사직 구장에는 엄청난 수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대부분 한국 관중들이었고, 개중에는 세계 각 구단의 스카우트들 또한 상당수가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찾아왔다.
“아까 봤는데 오늘 양동호 선배님 컨디션 죽이더라. 공이 쫙쫙 꽂히는 게 오늘 느낌 무진장 좋다. 흐흐흐!”
형수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양동호 선배의 몸 풀기 투구를 곁에서 지켜봤기에 오늘 경기가 생각보다 순조롭게 풀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양동호 선배는 광주 피닉스의 에이스인 동시에 마지막 남은 국내파 토종 에이스 투수다. 다시 말하면 광주 피닉스를 제외한 나머지 한국 프로 구단들은 단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에이스 자리를 외국인 투수들에게 빼앗겼다는 소리다.
국내 토종 에이스들이 거의 전멸했다고 봐도 틀린 소리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홀로 국내 선수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게 양동호 선배였으니 백유홍 감독의 기대가 얼마나 크겠는가?
양동호 선배로서는 반드시 오늘 경기에서 호투를 보여야만 했다.
“오늘 대만이 우릴 잡겠다고 나오는 거지?”
“왜?”
“그렇지 않고서야 천즈시엔을 선발로 내세웠겠어?”
“대만으로서도 미국, 쿠바, 일본을 제외하면 한국이 그나마 가장 상대하기 쉽다고 생각했겠지.”
내 말에 형수는 ‘우리가 왜 어때서?’라며 반박을 했지만, 냉정하게 평가를 내리면 대만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경기 시작 전, 한국의 1회 초 공격을 막기 위해 마운드에 오른 195cm가 넘는 좌완 투수 천즈시엔을 바라봤다.
대만 대표팀의 에이스라 불리는 천즈시엔이다.
미네소타 트윈스 산하의 트리플A에서 활약을 하고 있는 천즈시엔은 150km 중후반의 빠른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사용하는 강속구 투수다.
평소에는 제구력도 좋고, 구위도 뛰어난 편이지만 문제는 멘탈, 즉 정신력이었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와르르 무너지는 천즈시엔을 두고 국내 팬들은 두부 멘탈이라 부르며 한 번 으깨지면 다시는 회복되지 않는다고 조롱을 해댔다.
그 때문에 미네소타 트윈스에서도 선발 투수로서의 가능성은 높게 평가하지만 막상 빅리그 콜업에는 머뭇거리는 상태였다.
천즈시엔의 구속, 구종, 구위를 모두 평가했을 때, 자신감만 제대로 갖추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 투수인 건 확실했다.
쇄애애액!
퍼엉!
“공은 좋네.”
툴툴 거리던 형수가 솔직하게 평가했다.
천즈시엔의 패스트볼은 확실히 좋았다.
저런 멋진 공을 던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짱 있는 투구를 할 수 없다는 게 같은 투수 입장에서 참 안타까웠지만, 상대팀으로서는 어떻게든 한 번만 제대로 흔들면 마운드에서 쫓아버릴 수 있으니 행운이라면 이것도 행운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한국 대표팀의 1번 타자 장필성 선배가 타석에 들어섰다.
국가대표 1번 타자라는 자부심만큼이나 실력도 뛰어난 장필성 선배는 천즈시엔의 구위에 꼼짝없이 당했다.
“슬라이더가 미쳤네.”
형수가 혀를 내둘렀다.
장필성 선배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천즈시엔의 슬라이더는 명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2번 타자 김재호 선배 역시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결정구는 슬라이더였다.
“저건 못 치겠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김재호 선배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구속도 빠른데다 꺾이는 각도까지 가장 이상적이었기에 오늘 천즈시엔의 슬라이더는 소위 알고도 칠 수 없는 마구나 다름없었다.
“오늘 제대로 긁히는 날인가 보네.”
형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국내 타자들 중 가장 정확도 높은 타격을 한다는 타격 기계 이정훈 선배마저도 슬라이더에 삼진을 먹으며 순식간에 1회 초 한국의 공격이 삭제당하고 말았다.
3타자 연속 삼진.
대한민국 대표팀에게는 이보다 더한 치욕이 없었지만, 상대 투수가 워낙 잘 던지고 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괜찮아! 우리도 똑같이 갚아주면 되잖아!”
주장, 이규환 선배가 일부러 크게 외치며 격려했다.
“동호야! 아주 박살을 내버리자!”
“예!”
양동호 선배가 투지 넘치는 얼굴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같은 투수로서 상대 투수의 호투에 경쟁심이 생겨난 듯 싶었다.
“이제 고작 1회야!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자!”
이규환 선배는 수비를 위해 그라운드에 나온 야수들을 상대로 그렇게 외치고는 파이팅 넘치는 모습으로 1루 수비를 하기 위해 뛰어나갔다. 그런 이규환 선배의 행동에 자연스럽게 야수들 또한 자신의 수비 위치를 향해 힘껏 뛰었다.
“1회부터 동호가 불타오르겠네.”
김재호 선배에게 밀려 백업 멤버로 더그아웃에 자리를 잡고 앉은 정현우 선배가 그렇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형수의 물음에 정현우 선배가 턱짓으로 마운드 위에서 전력으로 연습투구를 하는 양동호 선배를 가리켰다.
“동호 재가 원래 태극마크 달면 없던 애국심도 발휘하는 놈이거든. 오늘 경기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을 텐데, 1회부터 천즈시엔이 3타자 연속 삼진으로 우리 타자들 기를 죽여놨으니 열 받을 만하지. 거기에 승부욕까지 있고, 걱정되는 부분이라면… 불타는 동호의 생명력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 정도인데. 쩝.”
“예? 생명력이 길지 않다니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렇게 1회부터 전력 피칭을 하면 얼마나 버티겠냐? 길어야 5이닝 정도 되려나? 대신, 아마 5이닝은 확실하게 막을 걸?”
정현우 선배의 말에 나와 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운드 위에서 연습 투구를 하는 양동호 선배의 공은 놀라울 정도였다.
포수 미트 가죽이 찢어질 것 같은 파열음과 함께 파이팅 넘치는 양동호 선배의 투구 모션은 쉽게 마운드를 내려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1회 말, 대만 대표팀의 공격이 시작됐다.
대만 대표팀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타자는 대만 프로리그 최고의 타자라 불리는 위샤우허(퉁이 라이온즈)다.
6년 연속 40홈런을 때려냈을 정도로 파워와 정확도를 두루 갖춘 대만 4번 타자다.
한때는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지만, 타격 능력에 비해 빈약한 수비와 느린 발이 결국은 문제가 되고 말았다. 주력이야 메이저리그에서도 위샤우허보다 느린 타자들이 널렸기에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수비는 그렇지 못했다.
결국, 수비 문제가 발목을 잡아서 메이저리그 진출이 무산된 위샤우허였다.
위샤우허 외에도 일본 지바롯데 마린스에서 활약하고 있는 순홍레이 역시도 강타자였고,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의 트리플A에서 활약하고 있는 천웨이우도 만만하게 봐선 안 되었다.
“쟤가 보스턴 유망주 순위 전체 2위라는 놈이지?”
형수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석에 들어선 천웨이우는 190cm가 넘는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거구의 선수다.
현재 21살이었고, 보스턴 내야 유망주 1순위에 올라가 있을 정도로 미래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타자다.
3루수로 유연한 몸놀림과 넓은 수비 범위, 그리고 강인한 어깨까지 대다수의 전문가들로 하여금 잠재력만 터져준다면 메이저리그를 대표할 3루수가 될 수도 있다는 후한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한창 성장 중인 어린 선수일 뿐이었다.
부웅!
퍼엉!
“스윙! 타자 아웃!”
잔뜩 벼르고 있던 천웨이우는 양동호 선배가 던진 체인지업에 타이밍을 빼앗겨 헛스윙을 하며 삼진을 당했다.
천즈시엔의 호투를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양동호 선배 역시도 세 명의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1회 말 대만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선배님! 최고입니다!”
“나이스 피칭!”
“우리 동호! 오늘 살아 있네~!”
더그아웃의 분위기가 단숨에 뒤집혔다.
이게 바로 투수의 힘이다.
어째서 야구가 투수 놀음인지, 선발 투수의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는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규환 선배! 한 방 제대로 날려버리고 와요!”
더그아웃을 나가며 이규환 선배는 걱정 말라는 듯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고는 자신 있게 타석에 들어섰다.
국가대표 4번 타자라는 부담스러운 명칭을 수 년 동안 달고 단 이규환 선배는 천즈시엔이 던진 초구를 공략했다.
딱!
타구가 빠른 속도로 3루 베이스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촤아악. 턱!
기가 막힌 수비가 나왔다.
3루수 천웨이우가 믿기지 않는 슬라이딩으로 타구를 잡고는 그대로 1루로 공을 뿌렸다.
“아웃!”
발이 빠르지 않은 이규환 선배는 당연히 아웃을 당했고, 완벽하게 3루 베이스를 빠지는 안타라 여겼던 선수들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탄식했다.
“저런 체구에서 무슨 저런 수비가 나오냐.”
형수가 놀랬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분명 여기서 이규환 선배의 타구가 빠졌다면 아무리 발이 느려도 2루까지는 충분히 갔을 것이고, 그건 곧 1회 초 놀라울 정도의 호투를 보였던 천즈시엔을 단번에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좋은 찬스가 될 수 있었을 거다.
‘수비까지 도와주면 천즈시엔을 공략하기가 쉽지 않겠는데.’
멘탈이 약한 천즈시엔에게 야수들의 호수비는 엄청난 힘이 된다.
그건 곧 자신감을 얻고 배짱 있는 투구를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고, 그런 천즈시엔을 한국 타자들이 공략하는 건 무척이나 어려워 질 수밖에 없다.
“어째 기분이 쎄하다.”
형수의 중얼거림에 나 역시 무겁게 고개를 움직여 동의했다.
오늘 경기 예상보다 훨씬 힘들어 질지도.
따악!
“넘어… 갔다.”
형수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원망스럽게 타구를 바라봤다.
더그아웃 분위기는 찬물을 잔뜩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7회에 터진 솔로 홈런 한 방.
6회까지 103구를 던지며 호투를 벌인 양동호 선배가 내려가고 7회에 홍재석 선배가 마운드에 올랐다.
선두 타자를 상대로 삼진을 잡아내며 기분 좋은 출발을 보였고, 이어진 후속 타자에게도 내야 뜬공을 이끌어내며 빠르게 아웃 카운트를 늘려갔다.
그리고 이어진 타자와의 승부에서 홍재석 선배는 4구째 던진 패스트볼이 실투가 되면서 타자가 치기에 딱 좋은 높은 코스로 날아갔고, 행운의 여신은 홍재석 선배를 외면하고 말았다.
“재석 선배… 흔들리겠지?”
형수의 물음에 대답 대신 마운드 위에서 로진백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재석 선배를 바라봤다.
완전하게 가라앉은 얼굴 표정이 재석 선배의 머릿속을 알게 해주고 있었다.
팽팽했던 0:0의 균형이 깨졌다.
6회까지 전력 피칭으로 대만 타자들을 봉쇄했던 양동호 선배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건, 오늘 경기에서 패배하면 4강 진출을 낙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거기에 6회에 물러난 양동호 선배와 다르게 천즈시엔은 자신 있게 자신의 공을 던지며 한국 타자들을 확실하게 압도하고 있었다.
‘지난 이닝까지 투구수 89개를 던졌으니 8회까지는 충분히 마무리하겠지.’
자신감만 있으면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 공을 가진 천즈시엔의 진가가 하필이면 오늘 경기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특히, 오늘 경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슬라이더는 메이저리그 최정상급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완벽했다.
도저히 공략할 틈이 보이질 않는 천즈시엔이었다.
“볼! 볼넷(Base on Balls)!”
연속 볼넷이 나오면서 결국 다시 주자를 1루로 내보내는 재석 선배였다.
결국, 송진욱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가 투수를 재석 선배에게서 공을 받아들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재석 선배가 안쓰럽게 보였다.
재석 선배를 대신해서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송염우 선배였다.
강남 맨티스의 특급 불펜으로 활약을 하고 있었고, 그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듯 무사히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며 7회 말, 대만 대표팀의 공격을 저지했다.
“충분히 따라갈 수 있어! 아직 2번의 공격이 남았잖아! 선두 타자부터 성급하게 덤벼들지 말고 출루를 하는 것에만 집중하자! 알겠지!”
이규환 선배가 선수들을 응원하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았다.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몇 점이나 득점을 할 수 있는 게 야구다.
집중력을 발휘해서 끈질기게 투수를 물고 늘어지면 고작 1점 차이는 순식간에 역전시켜버릴 수 있었다.
그 점을 알기에 타석을 기다리는 타자들의 눈엔 투지와 집념이 가득했다.
그러나.
“젠장!”
장필성 선배가 헬멧을 집어 던지며 욕설을 내뱉었다.
오늘 1번 타자로 나서서 단 한 번도 1루를 밟지 못했다.
마지막 타석에서도 내야 땅볼을 치며 아웃되고 말았다.
어떻게든 점수를 내려고 노력했지만, 9회 초 3개의 아웃카트가 모두 채워지기 전까지도 단 한 점도 점수를 내지 못하고 말았다.
영봉패.
반드시 이겨야만 했던 상대인 대만을 상대로 첫 패배를 하며 불안하게 출발하는 한국 대표팀이었다.
< 『해외편 - 19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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