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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마일-190화 (190/221)

< 『해외편 - 190』 >

『해외편 - 190』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40년 만에 한국에서 다시 한 번 올림픽이 개최됐다.

대한민국 제1의 항구 도시 부산에서 개최가 된 제34회 부산 올림픽에서 야구 경기는 8월 9일 수요일부터 경기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나와 형수는 인천 국제공항에서 다시 한 번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 늦게 대표팀에 합류했다.

“감독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기도 전에 찾아간 사람은 한국 야구팀을 이끌고 있는 백유홍 감독이었다.

대표팀 감독으로 백유홍 감독이 지휘봉을 잡는다는 소식에 나로서는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었다.

짧다면 짧은 1년의 시간동안 백유홍 감독 밑에서 프로선수로서 첫 데뷔를 했으니 아무래도 안면이 없는 다른 감독들보다는 훨씬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내 마음이 다 든든하군. 하하하.”

백유홍 감독의 웃음소리에 나 역시 마주 웃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형수라고 합니다! 감독님의 명성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대표팀 금메달을 위해 이 한 몸 아끼지 않고 경기에 임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곁에 서 있던 형수가 허리를 반으로 접어가며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자네의 경기 영상은 잘 봤네. 메이저리그에서 이미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모습만 봐도 이번 대회에서 자네가 얼마나 많은 활약을 해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네. 나 역시 잘 부탁하겠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약간 오버스럽기는 했지만, 이런 점 또한 형수의 사회성이라는 걸 알기에 그저 웃고 말았다.

“어제 경기에서도 좋은 피칭을 보여주더군. 딱히 흠잡을 구석은 없어 보이더군. 경기가 끝난 직후 여기까지 바로 왔을 텐데, 몸은 어떤가?”

“아주 멀쩡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대답에 백유홍 감독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세계최고의 투수가 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었는데… 자네를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무리 국내 무대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더라도 메이저리그인 만큼 어느 정도 적응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네. 자네가 가진 재능과 실력에 노력이라면 충분히 세계 최고의 투수가 될 거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과찬이십니다.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감독님의 도움이 컸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감독님께서 제가 프로 무대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주지 않으셨다면 지금처럼 빠른 성공은 결코 없었을 겁니다.”

“자네도 예전과는 많이 변했군.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말이야. 하하하.”

백유홍 감독의 놀란 표정과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 역시 내가 불과 2년 전과는 많이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짧지만 화기애애했던 백유홍 감독과의 만남을 마치고 나온 나와 형수는 곧바로 대표팀 코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감독만큼이나 코치들과의 유대관계도 중요했기에 번거로워도 반드시 예의를 갖춰서 인사를 해놔야 한다는 형수의 주장이 있기도 했고, 나 역시 건방지게 인사도 없이 짐부터 풀 생각은 없었기에 피곤해도 코치들을 찾아다니며 눈도장을 찍었다.

코치들 중 유일하게 아는 얼굴이라고는 송진욱 투수 코치뿐이었다.

백유홍 감독과 함께 대전 호크스에서 대표팀 코칭스태프로 차출된 송진욱 투수 코치는 나를 무척이나 반갑게 맞이했다.

곁에 서 있던 형수가 지루할 만큼 길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나와 형수는 이미 배정된 숙소에 짐을 풀 수 있었다.

“지혁아, 나가자.”

“어딜?”

“선배들한테 인사 다녀야지.”

“아.”

솔직히 귀찮았다. 아니, 피곤했다.

경기가 끝나고 곧바로 한국으로 오느라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도 못했다.

아무리 비행기에서 잠을 잤다고 해도 불편했고, 피로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피곤한 얼굴로 내가 느릿하게 움직이자 형수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소문 한 번 돌면 진짜 피곤해지는 곳이잖아. 솔직히 널 깔 수 있는 선배는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너도 할 말이 있고, 사실을 알았을 때 사람들도 널 지지해줄 것 아냐? 안 그래?”

형수의 말이 무조건 맞다.

실력만 믿고 건방지다, 예의가 없다, 잘난 체를 한다 등등 사소한 행동 하나를 얼마든지 부풀려서 소문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그런 소문이 덩치를 키워가며 빠른 속도로 퍼지는 곳이 이바닥이다.

피곤하고 귀찮고 번거로워도 후배로서 해야 할 당연한 행동은 거르지 말아야 했다.

“이게 얼마만이야? 같은 팀 동료로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갑다! 하하하! 난 아직까지도 개막전에서 너에게 삼진을 당했던 일을 꿈에서도 반복하고 있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어. 내가 지금까지 야구를 하면서 그때만큼 충격적인 순간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니까. 1년 동안은 무슨 짓을 해도 삼진만 당하더니 요즘에는 간간히 안타 정도는 치고 있거든. 웃기지? 내 꿈에서도 네게 만신창이가 되고 있으니 말이야. 하하하! 어쨌든 이렇게 한 팀이 되었으니 앞으로 잘 해보자.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고.”

이번 올림픽 대표팀 주장으로 선임된 이규환 선배다.

거구의 이규환 선배는 타석에서 투수를 잡아먹을 것처럼 무서운 표정으로 타격에 임하지만, 실제 성격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유쾌하다고 하더니 말투나 표정으로는 확실히 그런 듯 싶었다.

이규환 선배는 수년 전부터 국가대표 4번 타자로 활약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전성기가 지났다는 말이 슬슬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소속 팀인 대구 블루윙즈에서 4번 타자로서의 역할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었기에 이번 대회에서도 팀 4번 타자로서 활약을 할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았다.

그나저나 나와의 첫 대결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이었던 걸까?

악몽처럼 꿈까지 꿀 정도였다니.

‘하긴, 나라도 쉽게 잊을 수가 없긴 하겠네.’

신인 데뷔전, 개막전, 노히트.

무척이나 강렬한 단어들이 한 경기에 모두 속해 있었다.

무엇보다 국가대표 4번 타자라는 자존심마저 버리고 배트를 짧게 쥐고 어떻게든 타격을 하겠다고 노력했던 이규환 선배를 상대로 162km의 공을 던지면서 삼진을 잡았으니 확실히 그의 프로 인생에 있어 쉽게 잊을 수 없는 기억 중 하나가 될 것은 분명했다.

“안녕하십니까!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선배님! 장형수라고 합니다!”

“어~ 네가 형수구나! 지혁이랑 같이 다저스에서 환상의 배터리로 메이저리그를 씹어 먹는거 잘 보고 있다. 화면으로 보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까 포수를 보기엔 체격이 굉장히 좋네!”

“칭찬 감사합니다!”

“덩치는 곰 같은 놈이 엄청 싹싹하네. 마음에 든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예! 선배님!”

확실히 형수랑 함께 다니면 비교가 된다.

예전보다 말수도 늘고, 최대한 사교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하지만 넉살 좋은 형수 옆에 있으니 티도 나지 않았다.

“오늘 도착한 거지?”

“예! 선배님!”

“감독님과 코치님들은 만나고 왔겠고, 날 찾아온 걸 보면 선배들에게 인사라도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맞지?”

나와 형수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이규환 선배가 자신이 직접 선배들을 소개시켜 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을 했지만, 모든 팀원들이 친해질 수 있도록 이끄는 것도 주장의 임무라며 끝내 나와 형수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형수는 이규환 선배의 곁에 바짝 붙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꺼내며 대화를 나누었다.

내 입장에서는 참 무의미한 말이구나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이 급격하게 가까워지는 걸 보니 저런 게 바로 사교성이구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나 역시 간간히 대화에 참여했고, 이규환 선배와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지혁아!”

정현우 선배가 나를 발견하곤 양팔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선배님, 잘 지내셨죠?”

“나야 당연히 잘 지냈지! LA에서 보고 이렇게 부산에서 보니까 또 느낌이 다르네. 그렇지 않냐?”

“예. 그렇네요.”

“짜식! 너 챔피언스 리그 MVP 먹었는데 이 형한테 한 턱 안 쏘냐?”

“식사 한 번 하시죠.”

“오케이! 오늘 저녁 콜!”

여전히 활기찬 기운이 뻗치는 정현우 선배였다.

그 외에도 많은 선배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나야 몇 명을 제외하곤 대부분 국내에서 경기를 치러봤기에 안면 정도는 있었지만, 형수의 경우에는 소수의 몇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형수가 선배들과 훨씬 빠르게 친해졌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한창 선배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누군가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해왔다.

고개를 돌리니 반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국진이구나!”

형수가 가장 먼저 반가워하며 고국진을 끌어안았다.

일석고등학교 1년 후배인 고국진은 고교시절 나와 형수를 무척이나 잘 따르던 후배 중 하나였다. 포지션도 투수였기에 함께 훈련을 하는 일도 많았고, 1년 후배들 중 국진이가 가장 돋보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일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후배는 보이고 선배는 안 보이는 모양이군.”

그제야 나와 형수는 국진이의 뒤쪽에 서 있던 유한석 선배와 홍재석 선배, 황찬 선배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급히 인사를 했다.

“뭐야? 니들 여기서 일석고 동창회 하냐? 하긴, 여기서 일석고 졸업생이 아닌 사람을 찾는게 더 빠르겠지.”

정현우 선배가 입을 삐죽거리며 우리를 타박했지만, 나만 그것이 장난임을 알곤 태연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당황해서 급히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는 변명을 하기에 바빴다.

“장난이야, 장난. 오랜만에 선후배들이 만났는데 편하게들 회포 풀어라.”

그렇게 말을 한 정현우 선배는 나서서 다른 선배들까지도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결국 나, 형수, 유한석 선배, 홍재석 선배, 황찬 선배, 국진이만 남게 됐다.

현재 국가대표팀 내에서 일석고등학교를 졸업한 선배는 몇 명이 더 있었다.

다만, 우리 중 가장 선배인 유한석 선배조차 함께 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기에 너무 먼 선배인지라 깊은 유대관계가 부족할 뿐이었다.

이 중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은 나와 형수, 유한석 선배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국내파였다.

홍재석 선배는 서울 버팔로스의 불펜 투수로 자리를 잡았고, 황찬 선배는 강북 바이킹스의 주전 포수로 활약하고 있었으며, 국진이는 수원 드래곤즈에서 이미 선발 투수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자식! 2년 만에 선발 투수로 자리를 확실하게 잡았다니 기특한데?”

고교시절에도 국진을 꽤 챙겼던 형수였기에 남들보다 확실하게 빠른 성공에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확실히 국진이는 스타로서의 싹이 보였던 후배였다.

타고난 재능도 좋았고, 남들 못지 않은 노력으로 실력을 꾸준히 쌓았으며, 바른 인성으로 주변의 신뢰를 받았기에 부상이라는 치명적인 악재만 없다면 동기들 중 가장 빠르게 성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국진이가 아무리 대단해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지혁이 앞에서는 거북이 걸음일 뿐이지.”

홍재석 선배가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난 지금도 가끔 지혁이가 나보다 1년 후배라는 게 믿기지가 않을 때가 있다니까. 한석 선배도 그렇지 않아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내가 아는 사람들한테 지혁이가 나랑 같이 야구했던 후배라고 하면 뻥치지 말라는 소리를 얼마나 들었는지 알아? 너무 유명해지면 과거조차 과거 같지 않게 변한다니까. 내 친구 놈 중 하나는 지혁이가 외계인이라고 믿고 있을 정도다.”

황찬 선배의 말에 형수와 국진이가 낄낄 거리며 웃었다.

외계인이라니.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살짝 당황스러웠다.

“뻥치고 있네! 외계인이 말이 되냐? 하여간, 너는 학교 다닐 때도 그러더니 왜 이렇게 뻥이 심하냐? 작작 좀 해라.”

“뻥 아니라니까! 진짜 지혁이가 외계인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놈이 있다니까! 안 믿기면 내가 당장 전화 걸어서 확인해줄까?”

“전화 해봐! 어디서 구라를 치고 있어! 당장 해보라니까!”

“딱! 기다려! 내가 전화 건다!”

재석 선배와 황찬 선배가 학창 시절 때처럼 티격태격 거리자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는 사이 유한석 선배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팔이랑 어깨는 괜찮은 거냐? 고등학교 졸업하면서부터 너무 많은 이닝을 던지고 있는 것 같던데.”

유한석 선배의 진심이 담긴 걱정에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확실하게 관리를 하고 있다고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 다저스에서도 널 보물처럼 귀하게 여기고 있을 테니까. 내 괜한 걱정이겠다.”

“선배님은 시애틀에서 기회를 얻으셨는데 이렇게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어 아쉽진 않으세요?”

내 물음에 유한석 선배는 쓴 웃음을 짓기만 했다.

고교 넘버원, 대한민국 국보급 유망주라는 소리를 들으며 야심차게 메이저리그로 직행했지만, 아쉽게도 기회는 많이 주어지지 않았고, 어렵게 주어진 기회조차 제대로 살리지 못해서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전전해야만 했던 유한석 선배였다.

물론, 미국 진출 5년 만에 메이저리그의 선발 자리를 차지했으니 그 역시도 무척이나 빠른 성공이라 부를만했다.

실제로 미국 내에서도 초특급 유망주가 아닌 이상에야 5년 만에 메이저리그에 자리를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다만, 역시 문제는 나였다.

비교 대상이 항상 내가 되어버리니 유한석 선배의 빠른 성공도 더디게 느껴지는 거였다.

“참! 오늘 지혁이가 한 턱 쏜다고 했습니다!”

“정말?”

“이야~ 역시 메이저리거는 다르네! 통이 커!”

“선배님! 잘 먹겠습니다!”

내가 형수를 바라보자 히죽 웃고 있었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입술을 가만두지 못하는 형수를 바라보니 정현우 선배에게만 저녁을 사려고 했던 계획을 아무래도 확대시켜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날 저녁, 본의 아니게 나는 올림픽 대표팀 전체 회식을 책임져야만 했다.

“얼마나 나왔냐?”

말 대신 영수증을 형수에게 보여줬다.

“상금 탄 거 다 털어 먹으려면 올림픽 기간 내내 밥을 사도 부족하겠네!”

형수의 말에 나는 졌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 『해외편 - 190』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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