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88』 >
『해외편 - 188』
경기가 시작되기 3시간 전, 한창 몸을 풀고 있던 나에게 게레로 감독이 찾아왔다.
오늘 경기 선발 등판 취소라는 말을 듣고 게레로 감독의 생각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 차렸다.
어제 분위기에 이끌려 성급한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런 걸 알면서도 몸 상태가 괜찮았기에 이왕지사 상승세를 탄 분위기를 이끌고 2차전에서 대회를 끝내버리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을 부린 것 또한 사실이다.
오늘 등판에 맞춰서 컨디션까지 다 끌어올렸으니 강짜를 한 번 부려볼까하는 마음이 살짝 들었지만, 이내 게레로 감독의 말대로 순순히 내일 등판을 준비하기로 했다.
‘설마, 오늘 경기로 끝나려나?’
오늘 LA 다저스가 승리하면 내일 경기는 존재하지 않으니 살짝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갑작스럽게 선발로 등판할 수 있는 투수가 있습니까?”
어제 클럽 하우스에서 모든 선수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나에게 선발 등판을 요구했으니 다른 선발 투수의 몸 상태가 준비가 되었을지 의문스러웠다.
“그리핀이 등판하게 될 걸세.”
포스터 그리핀이라면 챔피언스 리그에서 선발로 등판한 적이 없었다.
일정은 짧지만 중간중간 휴식일이 존재하는 챔피언스 리그의 특성상 1, 2, 3선발 투수만으로도 대회를 꾸려가기엔 크게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와 딜런 아담스, 존 로더키가 번갈아가며 챔피언스 리그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고, 포스터 그리핀과 나단 코스코는 단 한 차례로 챔피언스 리그 마운드에 올라간 일이 없었다.
충분히 기분이 상할 만한 일이지만, 단기전의 특성상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는 선발 투수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었다.
‘포스터 그리핀으로서는 기회겠네.’
게레로 감독의 지시로 인해 언제든 불펜 투수로 등판할 수 있게끔 꾸준히 몸은 풀어놨으니 오늘 갑자기 선발로 등판한다고 해서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혼란을 줘서 미안하네. 오늘 경기를 지켜보면서 내일 벌어질지도 모르는 경기를 대비하도록 하게.”
게레로 감독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바쁘게 자리를 벗어났다.
갑작스럽게 선발 투수가 변경되었으니 거기에 맞는 타당한 이유를 대회 측에 알리고, LA 에인절스 구단에도 알려야 했으니 바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등판이 취소되니까 뭔가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든다.”
형수의 말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결승 2차전이 시작됐다.
물러설 곳이 없는 LA 에인절스는 선발 투수로 에이스 브라이언 와그너를 마운드에 올렸다.
4강 경기를 건너뛰었기에 휴식을 충분히 취했는지,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모습 자체만으로도 힘이 넘쳤다.
브라이언 와그너는 1회 초부터 힘 있는 투구로 다저스 타자들의 상승세에 찬물을 끼얹었다.
최대 98마일까지 나오는 포심 패스트볼과 싱커, 슬라이더를 섞어가며 삼진 하나와 땅볼 두 개로 가볍게 1이닝을 마치고 내려갔다.
‘쉽지 않겠네.’
경기를 지켜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컨디션이 정말 좋을 때의 브라이언 와그너는 메이저리그 정상급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투구를 보였다.
아쉽게도 오늘이 그런 날인 듯 보였다.
공의 무브먼트도 좋았고, 자신 있게 타자를 상대로 공을 던지는 모습이 제구력도 잘 받쳐주는 날인 듯 싶었다.
1회 말 다저스의 수비를 하기 위해 포스터 그리핀이 마운드에 올랐다.
확실히 체력적으로는 아무런 부담이 없는 듯 힘 있게 공을 던지고 있었지만, 문제는 경기 감각이었다.
무려 22일 동안 휴식기를 가졌다.
로테이션에 맞춰서 등판하다보니 6월 27일 시카고 컵스와의 시즌 경기를 끝으로 시합에 투입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자체 연습과 개인 훈련을 꾸준히 하면서 몸을 관리했다고 하지만 경기와는 분명 다르다.
이런 우려대로 포스터 그리핀은 1회 말, 선두 타자부터 볼넷을 내주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힘이 너무 들어간 것 같지 않아?”
케럴 발렌타인이 내 곁에서 그렇게 말했다.
미치 네이가 부상에서 회복되면서부터 경기에 출장하는 시간이 대폭 줄어든 케럴 발렌타인이다.
나름 괜찮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다저스 내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가 꽤 높아져 차기 1루수로 내정될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았다.
하지만, 구단에서 차기 1루수로 내정했다 하더라도 선수 본인이 경기에 출장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초조해질 수밖에 없다.
경기 감각을 유지하지 못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성적 하락은 구단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자연스럽게 돌려질 수밖에 없었으니 선수로서는 당장 한 경기라도 더 뛰는 게 어찌되었든 이득인 셈이다.
“아무래도 좀 그렇겠지.”
어쩌면 나보다 케럴 발렌타인이 현재 마운드에 서 있는 포스터 그리핀의 심정을 가장 잘 알고, 이해하고 있을 거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3선발이었는데 올 시즌 4선발로 밀려나면서 챔피언스 리그에서 완전히 외면을 받고 있었으니까.
결승전인 오늘 같은 경기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실하게 입증하고 싶을 테지.
따악.
안타가 터지면서 순식간에 무사 1, 3루의 상황이 되고 말았다.
마운드에서 공을 만지작거리는 포스터 그리핀의 얼굴이 밝을 수가 없었다.
그런 포스터 그리핀의 얼굴은 다음 타자에게 2루타를 맞으면서 완전히 일그러졌다.
“힘드네.”
케럴 발렌타인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포스터 그리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한 상황에서 2실점을 해버리고 주자마저 또 다시 득점권인 2루에 두고 있었으니 포스터 그리핀의 마음이 어떨지 충분히 공감이 갔다.
4번 타자에게는 볼넷을 5번 타자와 6번 타자를 내야 뜬공과 삼진을 잡아내며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게 됐다.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몸 쪽으로 바짝 붙인 패스트볼에 주심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했고, 타자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과 몸짓으로 주심에게 억울하다는 듯 항변을 했지만, 이미 다저스의 수비수들은 빠르게 더그아웃을 향해 달려왔다.
“수고했어요.”
비록 2실점을 하긴 했지만, 그나마 거기서 그친 게 다행이었다.
포스터 그리핀 역시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서 음료수를 들이켰다.
1회 2점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닝을 생각했을 때, 타자들에게 큰 부담이 되는 점수는 아니다.
하지만, 다저스의 타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 첫 번째 이유로는 상대 선발 투수 브라이언 와그너의 컨디션이 너무 좋다는 사실이다. 저렇게 좋은 컨디션으로 투구를 하는 선발 투수에게 2점 이상을 뽑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두 번째는 포스터 그리핀의 불안한 출발이다.
선발 투수가 불안한 출발을 할 때, 바로 잡아 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바로 타자들이다.
별다른 것 없다.
점수를 많이 내주면 선발 투수로서는 1, 2실점에 부담 갖지 않고 편안하게 자신의 공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부담감이 큰 타자들로서는 경기를 풀어나가기 쉽지 않았다.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오늘 경기 희망적이지는 않겠어.’
그리고 경기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브라이언 와그너는 7이닝까지 무실점으로 완벽한 투구 내용을 이어갔다.
피안타를 5개나 맞기는 했지만, 득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발성 안타들이었다.
그렇게 브라이언 와그너가 호투를 벌이는 동안, 포스터 그리핀은 5회에 마운드를 내려가고 말았다.
4.2이닝 6실점.
선발투수의 역할을 전혀 해주지 못했다.
마운드를 내려온 포스터 그리핀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너무나도 실망한 듯 더그아웃에서 글러브를 내던지며 자기 자신에게 극도로 화를 냈고, 결국은 경기를 끝까지 지켜보지도 않은 채 더그아웃을 떠나버렸다.
“지난 4년 동안 그리핀이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무척이나 실망한 모양이야.”
“그런가요?”
“응. 척 너도 알다시피 그리핀은 성격이 온화한 편이잖아. 웬만해서는 저렇게까지 화를 내지 않는데… 아마도 오늘 경기가 자기 뜻대로 전혀 풀리지 않아서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아.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챔피언스 리그에서 완전히 밀려서 벤치에만 앉아 있었으니 오늘 같은 기회를 이렇게 무기력하게 날려버렸으니.”
토렌스의 말에 나 역시 그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렇지 않아도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포스터 그리핀과 나단 코스코를 대체할 수 있는 선발 투수를 새롭게 키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꽤 나돌고 있는 중이었다.
전반기 포스터 그리핀이 4승, 나단 코스코가 5승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평균자책점이나 경기 내용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다저스 타자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2승정도는 반납해야 할 정도로 좋지 못했다.
내가 18승, 딜런 아담스가 11승, 존 로더키가 9승으로 전반기를 마쳤으니 확실히 4, 5선발의 힘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가 확연하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척 네가 없는 사이 어쩌면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네.”
“일이요? 무슨 말이에요?”
“올림픽 대표팀 차출로 네가 8월에 팀을 떠나 있어야 하잖아?”
“그렇죠.”
“네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투수는 없지만, 어쨌든 로테이션은 돌려야 하니까 마이너리그에서 선발 투수 하나를 올려야 할 것 아냐?”
“그렇겠죠.”
“그렇게 올라온 선발 투수가 좋은 활약을 하면 어떻게 되겠어?”
“아.”
토렌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다.
“요즘 마이너에서 꽤 잘 던지고 있는 선발 투수가 두 명이나 있다고 하더라고. 한 명으로는 어쨌든 불안하니까 게레로 감독으로서는 두 명 모두 올려달라고 해서 시험을 해보지 않겠어? 내가 감독이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은데.”
나 역시 마차가지다.
더욱이 다저스는 꾸준히 투수 유망주가 많은 팀으로 유명했다.
마이너리그에서 착실하게 선발 수업을 쌓은 유망주들이 메이저리그에 올라와서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한다면 게레로 감독으로서도 4, 5선발에 대한 자리를 얼마든지 경쟁으로 돌려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따- 악!
“아무래도 내일 척, 네가 경기를 끝내야 할 것 같군.”
좌중간 담장을 넘어가는 타구를 바라보며 토렌스의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경기 최종 결과는 7점 차의 LA 다저스의 대패.
1차전에서 맛봤던 승리의 달콤함이 2차전의 패배로 인해 오히려 더욱더 쓰게 느껴졌다.
그렇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은 3차전으로까지 이어졌고, LA 다저스의 우승은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 번 증명하고 말았다.
쐐애애애액!
퍼- 어엉!
“스트라이크!”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나를 노려보는 타자를 무시하고 로진백을 손에 묻혔다.
하루를 더 휴식했기에 확실히 몸 상태는 더 좋았다.
선발 투수의 몸은 일정한 주기에 맞춰서 리듬을 타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그걸 지켜주는 게 좋다. 물론, 어제 마운드에 올랐어도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겠지만 오늘만큼 쉽게 경기를 끌고 나가지는 못했을 거다.
어제와는 전혀 다르게 6회 말, 현재 LA 다저스가 4점 차이로 리드를 하고 있었으니까.
선발 투수인 나는 LA 에이절스 타자들을 완벽하게 봉쇄하고 있는 중이고, LA 다저스 타자들은 상대 투수에게서 무려 10안타를 뽑아내며 점수를 올리고 있었다. 열 개나 되는 안타를 때리고도 고작 4점 밖에 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아쉽다면 아쉬울 뿐이었다.
형수의 사인을 받고 잔뜩 웅크리고 있는 타자를 향해 공을 던졌다.
후우욱.
부웅!
“스윙! 타자 아웃!”
12to6커브에 완벽하게 당해버린 타자는 배트로 바닥을 후려치고는 몸을 돌렸다.
“역시 넌 승률 백퍼센트의 사나이! 승리의 남자라니까! 흐흐흐!”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며 형수가 내 옆구리를 툭 치며 웃었다.
“내가 무슨 승률 백퍼센트야? 나 1패 한 거 잊었어?”
“아~ 그랬던가? 거의 다 승리한 거 같아서 까먹고 있었네. 흐흐흐!”
형수의 활짝 펴진 얼굴만큼이나 화창한 7월 21일 금요일에 LA 다저스는 결국 LA 에이절스를 꺾고 제 11회 IBAF 챔피언스 리그 첫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대회 MVP에는 최초로 투수인 내가 수상을 했다.
“챔피언스 리그부터 시작이냐? 시즌 MVP에다가 사이영상도 거의 확정적이니 벌써 삼관왕이네. 욕심 많은 놀부 같은 놈!”
트로피와 상금을 받고 돌아오는 내게 형수가 그렇게 툴툴거렸다.
“오늘 고기 사줄게.”
“최고급 한우 꽃등심으로!”
“그러던지.”
일정을 마치고 밥을 먹으려고 나가니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던 모든 다저스 선수들과 감독, 코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상금 100만 달러 모조리 털어버리자!”
형수의 외침에 동료 선수들이 하나 같이 왁자지껄 떠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모든 게 형수의 계획임을 알았지만 함께 고생하며 우승을 한 팀 동료와 감독, 코치에게 지금까지 변변한 식사 대접 한 적이 없었기에 기꺼이 그들을 모두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처럼 기쁜 날 내가 빠질 수가 없겠더군. 혹시 내가 못 올 곳에 온 건 아니겠지?”
한창 식사 중인 자리에 거물이 나타났다.
LA 다저스의 마크 앨런 구단주와 맥브라이드 단장이었다.
구단주의 등장에 나는 살짝 웃으며 생각했다.
‘돈 굳겠네.’
설마,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진 마크 앨런 구단주가 나 같은 서민에게 얻어먹지 않겠지?
< 『해외편 - 18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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