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85화 (185/221)

< 『해외편 - 185』 >

『해외편 - 185』

LA 다저스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타석에 들어서는 1번 타자는 던컨 카레라스, 파워만 증가한다면 대형 중견수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주변의 아쉬움이 많은 선수다. 이 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파워를 제외하면 모든 부분에서 부족함이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파워라는 부분이 단순한 트레이닝만으로는 쉽게 증가시킬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체계적인 관리와 훈련을 통해 일정 부분 파워가 증가할 수는 있지만, 문제는 그렇게 파워에 집착을 하다가 다른 부분이 무너지는 경우가 무척이나 높았고 실제로도 그런 사례를 겪으면서 선수 생활에 위기를 맞거나 슬럼프에 빠진 선수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홈런 타자는 타고난 힘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가 있는 거다.

쇄애애애액.

퍼- 엉!

빠르다.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98마일.

“팔이 무슨 긴팔원숭이도 아니고 채찍처럼 휘두르네.”

인디오스 데 관타나모의 선발 투수, 오마 크루즈의 투구를 바라보며 형수가 혀를 내둘렀다.

우완 사이드암 투수인 오마 크루즈는 형수의 말처럼 평균보다 훨씬 긴 팔을 가지고 있었고, 투구 동작은 마지막까지 팔꿈치가 등 뒤에 숨었다가 순식간에 튀어 나왔기에 흡사 팔이 아닌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타자의 입장에서는 타이밍을 맞추기가 굉장히 까다로웠고, 공의 위력도 상당히 뛰어났기에 오마 크루즈와 같은 유형의 투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볼! 포볼!”

“제구가 완전 똥이네. 느긋하게 스트라이크 하나 먹고 들어가면 되겠다.”

형수의 말에 주변 동료들 또한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마 크루즈는 분명 희소성이 넘치는 투수지만, 기본적인 제구력과 변화구의 위력이 장점을 다 잡아먹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릴리스 포인트의 영점을 제대로 잡지를 못하네.’

독특한 투구폼에서 발생되는 릴리스 포인트 조정 실패다.

“볼! 포볼!”

연속 볼넷으로 크레이그 바렛까지 1루로 진출했다.

“오늘 경기 어쩌면 쉽게 풀리겠는데?”

형수가 헬멧을 머리에 쓰곤 날 바라보며 웃었다.

3점 차 승리를 해야만 무난하게 8강 진출이 가능한 다저스의 입장에서 선발 투수가 1회 초부터 제구력 난조를 보인다는 건 좋은 징조였다.

주자 1, 2루 상황에서 3번 타자 코리 시거마저 볼넷으로 출루에 성공했다.

세 타자 연속 볼넷이라는 최악의 피칭 내용으로 인해 1회 초, 아웃 카운트를 하나도 잡아내지 못한 상황에서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갔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상태로 신경질적으로 글러브를 주물러대는 오마 크루즈의 어깨를 투수 코치가 다독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제구력이 바닥인 상황에서 감정까지 흥분하면 대량 실점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에 투수 코치로서는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으로 완수하기 위해 선발 투수를 진정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투수 코치의 노력 덕분인지 오마 크루즈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투수의 목을 잔뜩 조이고 있었다.

투수나 야수들에게 있어 최악의 시나리오는 볼넷 남발 이후, 연속 안타였으니까.

‘데니스 플린의 타격이 중요하겠네.’

무사 만루 상황에서 데니스 플린이 우익수 앞쪽에 떨어트리는 안타만 쳐도 발 빠른 주자들로 인해 순식간에 2득점을 노려볼 수 있다.

너무 짧은 단타를 치면 1득점에서 끝나겠지만, 2루 주자인 크레이그 바렛의 발이 빠르고 주루 플레이에도 능하니 득점을 노려 볼만 했다.

‘최악은 투수 앞 땅볼.’

지금 상황에서 데니스 플린이 투수 앞 땅볼을 치면 상황은 정말 최악으로 변한다.

투수-포수-1루수로 이어지는 더블 플레이가 나오기 때문이다.

다저스의 선수들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투수 앞 땅볼만 치지 마라.

차라리 깨끗하게 삼진을 당하거나, 더블 플레이를 칠 거라면 3루 주자가 홈에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라도 만들어라.

그런 모두의 바람을 갖고 데니스 플린이 타석에 들어섰다.

올 시즌 데니스 플린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적다고 할 수도 없는 병살타를 기록하고 있었다.

너무 힘이 잔뜩 들어가는 스윙으로 인해 땅볼 유도를 잘하는 투수들에게 간간히 병살타를 헌납했기 때문이다.

4번 타자와의 대결이라 그런지 마운드에 서 있는 오마 크루즈의 표정도 딱딱하게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초구는 커브.’

나라면, 내가 마운드에 서 있는 오마 크루즈라면 데니스 플린을 상대로 초구는 커브를 던진다.

스트라이크 존을 가까스로 걸치고 들어가는 커브로 카운트를 뺏거나, 패스트볼을 노리고 스윙을 할 데니스 플린에게서 땅볼을 유도할 거다.

문제는 현재 오마 크루즈의 제구력이 형편없다는 사실과 그의 커브는 포심 패스트볼만큼 구위가 좋지 못하다는 점이다.

데니스 플린이라고 이걸 모를까?

3루 주자를 바라보던 오마 크루즈가 빠르게 초구를 던졌다.

오늘 경기 첫 번째 슬라이더였다.

우타자인 데니스 플린의 몸 쪽을 찌르고 들어오는 고속 슬라이더를 던졌다.

딱.

‘짧다.’

배트의 손목 부근에 공이 맞으면서 타구가 먹혀 들어갔다.

3루 라인을 타고 굴러가는 타구를 3루수가 빠르게 달려 나왔고, 동시에 적당한 리드폭을 가져갔던 던컨 카레라스가 홈으로 쇄도했다.

3루수는 타구를 손으로 집어 그대로 1루를 향해 던졌다.

아웃.

발 빠른 좌타자였다면 충분히 살 수도 있을 상황이었지만, 데니스 플린의 주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무사 만루 상황에서 1사 2, 3루 상황으로 변했고 다행스럽게도 1점을 올렸다.

팀 내 4번 타자로서 칭찬을 받을 정도의 타격은 아니었지만, 모두 일어나서 데니스 플린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그를 격려했다.

‘차라리 잘 됐어.’

아웃 카운트 하나를 점수 1점과 맞교환을 했지만 더 이상 더블 플레이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차라리 타석에 서는 타자들에게는 긴장감을 덜어줄 수 있게 됐다.

5번 타자 마이크 트라웃이 타석에 들어섰다.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까지도 생각하고 있는 트라웃이었기에 어쩌면 그에게 챔피언스 리그 역시도 마지막이 될지 몰랐다.

따악!

타구가 높이 떠오르며 중견수 깊숙한 곳까지 날아갔다.

중견수의 글러브에 타구가 들어가는 순간 3루 주자 크레이그 바렛이 홈을 향해 달렸고 어려움 없이 득점을 올릴 수 있었다.

6번 타자 미치 네이는 외야 뜬공으로 물러나며 1회 초, 다저스의 공격이 끝이 났다.

무사 만루 상황에서 2점 밖에 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쉽기는 했지만, 점수를 아예 내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좋게 생각하며 수비를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

인디오스의 1번 타자에게는 9개의 공을 던지며 삼진을 잡아냈다.

초구부터 포심 패스트볼로 카운트를 유리하게 끌고 갔지만, 2스트라이크 이후 짧게 쥔 배트로 툭툭 끊어서 파울 타구를 만들어내는 타자로 인해 투구수가 생각지도 못하게 늘어나고 말았다.

오늘 경기는 최소 8이닝을 책임져야만 한다.

무리하게 삼진을 잡아가며 타자를 상대하기보다는 적당하게 맞춰주는 투구를 하는 게 현명했다.

9개나 던졌던 1번 타자와 다르게 2번 타자에게는 3개의 공만 던지면서 유격수 땅볼로 아웃 카운트를 쉽게 얻어냈다.

그리고 수많은 언론이 기대하고 집중 조명을 했던 세르지오 발데즈가 타석에 들어섰다.

16강 경기를 치르면서 타율이 떨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5할이 넘는 타율을 유지하고 있었고, 홈런도 1방을 추가하면서 이번 대회 최고의 타자로 활약을 하고 있는 세르지오 발데즈는 190cm가 넘는 키에 100kg이 넘는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탄탄한 근육과 유연성은 물론 탄력까지 갖추고 있는 세르지오 발데즈는 외모만 놓고 본다면 한국 나이로 18살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외모적인 느낌으로 봤을 때 단번에 떠오르는 선수가 있었다.

야시엘 푸이그(Yasiel Puig).

LA 다저스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다 돌연 뉴욕 양키스로 이적을 한 메이저리그의 야생마.

3년 전, 경기 도중 무리한 플레이로 큰 부상을 당해 아직까지도 재활에 전념 중인 야시엘 푸이그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인기 타자 중 한 명이다.

그런 야시엘 푸이그의 그림자가 세르지오 발데즈에게서 얼핏 보였다.

형수는 초구로 몸 쪽 높은 코스의 포심 패스트볼을 요구했다.

이번 대회에서 세르지오 발데즈를 분석한 결과 그나마 몸 쪽 코스에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와인드업을 하고 몸 쪽 높은 코스의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쐐애애애액.

퍼- 엉!

“스트라이크!”

98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이 몸 쪽으로 강하게 찌르고 들어오자 세르지오 발데즈가 눈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봤다.

무척이나 도전적이면서도 반항적인 느낌이 강한 시선에 헛웃음이 나왔다.

프로에 데뷔를 한 지 3년 차에 들어선 나였다.

아직까지는 선배들이 절대다수였기에 나보다 나이가 어린 선수들의 시선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 시범경기에서는 어린 유망주들을 몇 명 상대해봤지만 세르지오 발데즈처럼 날 도전적으로 노려보는 어린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기에서 눌렸다고 해야 할까?

나이 차이는 고작 1, 2살 밖에 나지 않지만 이미 메이저리그 정상에 올라서 있는 투수였기에 도전적으로 노려보기보다는 경외와 존경의 눈빛이 더 컸다. 물론, 그들도 타석에 서면 나를 상대로 안타를 치고 말겠다는 열의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세르지오 발데즈처럼 노골적으로 날 노려보는 반항적인 눈빛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뭔가 느낌이 묘하게 다가왔다.

항상 어린 선수, 루키라는 주변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무척이나 색다른 기분이 전해졌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이제 나도 후배 선수들을 맞이해야 할 나이가 되어가고 있구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세르지오 발데즈의 뜨거운 도발을 덤덤하게 받아넘기며 두 번째 공을 던졌다.

바깥쪽을 살짝 걸치고 들어가는 컷 패스트볼이었는데, 세르지오 발데즈는 가볍게 배트를 휘둘러 타구를 파울라인 밖으로 밀어냈다.

2스트라이크 노볼 상황에서 던진 세 번째 공은 홈플레이트 앞에서 존 아래로 떨어지는 파워 커브.

“볼!”

어깨가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세르지오 발데즈는 볼을 골라내며 공보는 눈이 나쁘지 않고, 성격 또한 성급하지 않다는 걸 내게 알려줬다.

네 번째 공은 몸 쪽으로 붙는 포심 패스트볼이었는데, 손가락 끝에서 살짝 벗어나면서 또 다시 볼이 되고 말았다.

2스트라이크 2볼 상황.

타석에서 물러난 세르지오 발데즈가 허공에 체크 스윙을 하고는 타석에 다시 들어섰다.

가볍게 쥔 배트와 편안한 자세와는 다르게 두 눈을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승부욕이 상당히 강한 선수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꺾어줘야지.’

원래 계획에 없었던 공을 던질 생각에 형수에게 사인을 보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형수의 입가가 씰룩거리는 게 보였다.

그 모습만으로도 형수가 어떤 유치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했다.

천천히 와인드업을 하고 공을 던졌다.

투수는 안다.

와인드업을 하고 몸의 회전을 마치고 마지막 순간에 모든 힘을 손가락 끝에 모아 던졌을 때, 실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심장을 후벼 파는 서늘한 감각이 전해지면 내가 아무리 잘 던진 공이라 하더라도 가장 끔찍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걸.

지금이 그랬다.

내가 던지고자 했던 구종, 코스, 마지막 투구 동작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음에도 공이 내 손끝에서 떠나는 순간 서늘한 느낌이 심장을 관통했다.

따- 아아악!

투수로서 가장 듣기 싫은 경쾌한 타격음이 고막을 때렸다.

배트에 맞는 순간 이미 내 머리 위를 미사일처럼 날아가는 타구는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여유롭게 배트를 던지고 1루를 향해 뛰어가는 세르지오 발데즈와 벌떡 일어나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포수 마스크를 벗어던진 형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라이징 패스트볼이 무적이 아니라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 『해외편 - 185』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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