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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마일-183화 (183/221)

< 『해외편 - 183』 >

『해외편 - 183』

부우- 웅!

“스윙! 타자 아웃!”

자신의 스윙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시다 타카시는 두 눈을 부릅뜬 상태로 포수 미트를 바라봤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노려봐도 포수 미트에는 새하얀 야구공이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한 새색시처럼 들어가 있을 뿐이다.

삼구삼진.

이시다 타카시에게는 굴욕스럽다 못해 치욕스러운 결과다.

‘결국은 던지고 말았네.’

최대한 자제했던 라이징 패스트볼을 이시다 타카시에게 마지막 결정구로 던지고 말았다.

앞 타석에서 승부를 피하냐는 조롱기 가득했던 이시다 타카시의 표정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기에 나도 모르게 승부욕이 생겨나버렸다.

한 경기에 여섯 번 정도는 손목에 큰 통증을 유발시키지 않았기에 괜찮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최대한 자제해야 하는 건 사실이었기에 남은 이닝 동안 또 다시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질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분하다는 듯 씩씩거리며 더그아웃으로 걸어가는 이시다 타카시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메이저리그 투수를 얕보지 말라고.’

다음 타석에서도 삼진으로 돌려 세우겠다고 생각하며 다음 타자를 상대했다.

원맨쇼.

형수 말처럼 오늘 경기는 아직까진 나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먹고 있었다.

아사노 쇼타의 포크볼에 완전히 농락당하고 있는 LA 다저스 타자들과 다르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내가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치면서 경기의 분위기를 완전히 돌려놨다.

거기에 5회에 들어선 지금까지 단 한 명의 타자도 출루시키지 않고 삼진과 범타 처리를 하고 있었으니 선발 투수로서도 눈부신 활약 중이었다.

성질 급한 일부 LA 다저스 팬들은 벌써부터 퍼펙트라는 문구가 쓰인 피켓을 들고 있기도 했다.

5회 마지막 타자마저 파워 커브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가면서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5이닝까지 던진 공의 개수는 총 58구.

무엇보다 5이닝까지 마친 상황에서 무려 열두 개나 되는 탈삼진을 잡고 있는 중이다.

작년 대회 우승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압도적인 투구 내용이었다.

호투를 따지자면 홈런을 맞기는 했지만, 아사노 쇼타 역시도 박수를 받을 만했다.

홈런 이후, 이닝마다 안타를 맞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추가 실점을 하지 않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다저스 타자들을 상대로 수준급의 완급조절 능력을 보여주며 포크볼이라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여전히 위협적으로 던지고 있었다.

특히, 5회 초에 보여줬던 아사노 쇼타의 스트라이크 존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포심 패스트볼은 가히 압권이었다.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무려 82마일.

엄청나게 느린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당연히 포크볼을 예상하고 있던 타자들의 허를 찌르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였다.

무엇보다 82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한 가운데로 던질 수 있는 배짱은 과연 현역 투수들 가운데 몇 명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물론, 포크볼이라는 아주 치명적인 무기로 타자들의 시선을 몽땅 빼앗았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다.

공을 느리게 던질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저절로 공이 느려지는 것과 다르게 95마일의 패스트볼을 던지다가 똑같은 투구폼에서 10마일 이상 느린 패스트볼을 던진다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나 역시 최대한 구속은 늦춘다 하더라도 10마일의 구속 차이를 낼 순 없었다.

어쩌면 아사노 쇼타의 진짜 무기는 포크볼로 위장할 수 있는 80마일 수준의 포심 패스트볼일 지도 몰랐다.

여기에 스트라이크 존 한 가운데에 꽂아 넣을 수 있는 볼 컨트롤과 배짱까지 갖추고 있으니 이만한 투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찾기 쉽지 않았다.

따악!

타구가 2루수와 1루수 사이를 꿰뚫고 지나갔다.

아사노 쇼타의 슬라이더를 6회 초, 선두 타자인 코리 시거가 가볍게 밀어쳤다.

선두 타자 출루에도 불구하고 아사노 쇼타의 투구는 변함없이 자신감이 넘쳤고, 그에 반해 4번 타자인 데니스 플린은 힘이 잔뜩 실린 호쾌한 스윙으로 허망하게 다시 한 번 포크볼에 당하며 삼진을 먹고 말았다.

“젠장!”

더그아웃으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데니스 플린이 헬맷을 집어 던지며 욕설을 내뱉었다.

오늘 포크볼에만 두 번씩이나 속아서 두 개의 삼진을 먹은 데니스 플린이다.

스스로 화가 날 상황인 건 이해가 가지만, 대놓고 더그아웃에서 과격한 행동으로 화풀이를 하는 건 다른 동료 선수들에게도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게레로 감독도 살짝 눈을 찌푸리는 것으로 데니스 플린의 경솔한 행동을 꾸짖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씩씩거리는 데니스 플린이었다.

“내가 이번에는 반드시 한 방 치고 만다!”

형수가 대기 타석으로 향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 형수 역시도 두 번 삼진을 당했고, 모두 같은 포크볼에 속았다.

타석에서는 마이크 트라웃이 아사노 쇼타의 포크볼을 아예 무시하기로 했는지 철저하게 패스트볼만 노리고 타격에 임했고, 결과적으로 포볼을 얻어내며 1루로 출루했다.

1사 1, 2루의 상황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서는 형수.

포크볼을 잘 구사하는 투수를 상대할 때는 확실히 포크볼을 아예 버리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어차피 포크볼로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오진 않았기에 애초부터 포크볼을 머릿속에서 싹 지워버리고 패스트볼이나 다른 구종을 노리는 편이 투수와의 승부에서 이길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부웅!

초구부터 포크볼을 던지면서 형수의 배트를 유인해 내는데 성공한 아사노 쇼타의 불규칙적인 투구 패턴이다.

루상에 주자를 두고도 거리낌 없이 포크볼을 던지는 아사노 쇼타는 그만큼 자신의 배터리인 고로 산이치의 블로킹을 믿는다는 소리다. 그리고 지금까지 고로 산이치는 그 믿음대로 단 하나의 포크볼도 빠트리지 않고 있었다.

초구에 포크볼이 날아올 줄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무조건 초구만 노렸던 형수는 1구부터 꼬여버리자 그 속마음을 대놓고 얼굴 전체에 드러냈다.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팍팍 쓰고 있는 형수와 다르게 아사노 쇼타의 표정에는 여유가 철철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2구.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가 날아왔고, 형수는 복잡하고 다급한 심정만큼이나 바닥을 드러낸 인내심으로 인해 엉덩이가 빠지는 추한 꼴로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저러다 3연속 삼진 당하겠네.”

어느새 내 옆에 앉은 토렌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제 경기에서 앞선 두 경기에서 선발로 출장했던 토렌스였지만, 내가 선발로 등판하는 경기에서는 여전히 형수에게 밀려 벤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그러겠어요. 바보도 아니…….”

퍼엉!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낮은 코스의 스트라이크 존을 관통한 81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에 형수는 꼼짝없이 눈 뜨고 삼진을 먹었다.

잔뜩 골이 난 얼굴로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형수는 설마 투 스트라이크 노볼 상황에서 대범하게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느린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내게 하소연을 늘어놨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아사노 쇼타의 투구 패턴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따악!

형수와 잠깐 잡담을 나누는 사이 깔끔한 타격음이 터졌다.

미치 네이가 좌중간을 꿰뚫는 2루타를 터트렸고, 발 빠른 주자인 마이크 트라웃까지 홈에 들어오며 순식간에 2득점을 올려버렸다.

“아… 내가 저렇게 깔끔하게 2루타를 때려줬어야 했는데.”

환호하는 동료들 속에서 홀로 아쉬워하는 형수였다.

추가 득점 없이 6회 초 LA 다저스의 공격이 종료됐다.

3점 차이의 리드 속에서 나는 6회 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공격을 삼진 하나와 땅볼 두 개로 막아내면서 퍼펙트 게임에 대한 팬들의 기대치를 더욱더 높여놨다.

7회 초에는 다시 한 번 타석에 들어섰다.

첫 타석에서 피홈런을 맞았던 아사노 쇼타는 두 번째 타석에서 나에게 삼진을 뺏어냈고, 세 번째 타석에서도 투수 앞 땅볼로 1루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 확인시켜주었다.

그렇게 아사노 쇼타는 7이닝을 마치고 더 이상 마운드에 올라오지 않았다.

반면, 나는 7회, 8회까지도 요미우리 자이언츠 타자들을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이어나갔다.

8회에는 선두 타자로 나온 이시다 타카시를 상대로 다시 한 번 삼진을 잡았는데, 파워 커브에 속아서 헛스윙을 하고 나자 타석에서 그대로 배트를 부러트리는 매너 없는 행동으로 주심에게 경고를 받아야만 했다.

9회 초, LA 다저스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불펜 투수인 하야시다 유지를 상대로 코리 시거와 마이크 트라웃이 백투백 홈런을 터트렸고, 형수 역시도 깨끗한 좌전안타를 터트리며 겨우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다.

5:0의 스코어 속에서 9회 말, 마지막 수비를 위해 마운드에 올라섰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제 아웃 가운트를 세 개만 잡으면 퍼펙트 게임이다.

오늘 경기에서의 퍼펙트 게임은 무척이나 의미가 깊었다.

IBAF 챔피언스 리그의 첫 번째 퍼펙트 게임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라고 해봐야 고작 10년, 올해로 11회 차를 맞이하는 짧은 대회였기에 당연히 퍼펙트 게임처럼 대기록은 쉽게 나올 수가 없었다.

쉽게 생각하면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경우 비메이저리그 구단을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의외로 퍼펙트 게임은 물론 노히트 게임조차도 없었다.

그러니 오늘 경기에서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면 무척이나 의미가 있다 부를 만했다.

마운드에 서서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를 바라봤다.

퍼펙트 게임을 앞두면 언제나 마음이 들뜬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기에 겉으로는 무덤덤해 보이지만, 심장은 굉장히 빠르게 뛰고 머릿속에서도 어떤 구종을 어떤 코스로 던져야 할지 복잡하게 계산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후우우우.”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마지막 이닝 첫 번째 공을 던졌다.

쇄애애애액.

퍼엉!

“스트라이크!”

바깥쪽 낮은 코스를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가는 포심 패스트볼에 타석에 선 타자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날 질려버린 눈으로 바라봤다.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96마일.

한 때는 내구성과 체력에 있어 의문을 표했던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이었지만, 이제는 메이저리그의 모든 투수들 가운데 체력적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나다고 인정을 받고 있는 나였다.

두 번째 공은 역시나 낮은 코스의 스트라이크 존을 관통하는 컷 패스트볼이었고, 타자는 배트를 휘둘러 공을 맞추기는 했지만 타구는 여지없이 파울 라인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하위 타선을 상대로 승부를 질질 끌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곧바로 승부구를 던졌다.

타자의 눈에 확 들어오는 높은 코스의 포심 패스트볼.

부웅!

“스윙! 타자 아웃!”

이걸로 남은 아웃 카운트는 두 개.

로진백을 주무르며 천천히 날숨을 뱉어냈다.

따악!

타구가 머리 위로 높이 솟구쳤다.

마운드에 서서 왼손 검지를 하늘로 찌르며 몸을 돌리자 중견수인 던컨 카레라스가 타구의 낙구지점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서 있었다.

턱.

타구가 글러브에 들어가는 순간.

고요했던 다저 스타디움이 열광적인 환호성과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로 뒤덮였다.

“지혁아아아아~!”

포수 마스크와 글러브를 내던지며 형수가 달려와 나를 번쩍 안았다.

“이 멋진 새끼! 넌 정말 최고다! 세계 최고라고!”

형수의 칭찬에 나 역시 녀석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었다.

모든 동료 선수들과 감독 이하 코치들까지도 마운드로 달려 나와 축하 인사를 건네주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첫 번째 퍼펙트 게임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벌써 5번째 퍼펙트 게임이라 이제는 예전만큼 특별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남들이 들으면 재수 없다 할 수 있겠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 경기는 미국보다는 한국과 일본에 더욱더 이슈를 남겼다.

특히, 한국의 경우 일본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기사를 엄청나게 쏟아냈고, 인터넷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조롱하고 비하했다.

일본에서는 한국이 아닌 메이저리그에 졌을 뿐이라고 반박 기사를 내놓았지만, 그런 변명은 통할 리가 없었다.

아니다 다를까, 한국에서는 일본의 저열한 언론 플레이를 더욱더 조롱하며 양국 간의 팽팽한 설전이 쉬지 않고 벌어졌다.

스포츠는 마약만큼이나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어쨌든 그렇게 LA 다저스는 3전 전승으로 챔피언스 리그 32강을 조 1위로 무난하게 통과했다.

< 『해외편 - 183』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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