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82화 (182/221)

< 『해외편 - 182』 >

『해외편 - 182』

아사노 쇼타의 초구는 대범하게도 스트라이크 존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전광판에 찍힌 95마일의 구속은 타자가 초구를 노리고 들어갔다면 얼마든지 장타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위험한 공이었다.

“메이저리그에 올 자신은 없는 놈이 초구부터 허세네. 제발 나한테도 그렇게 허세 한 번 부려줬으면 좋겠다. 그대로 넘겨버리게. 흐흐흐!”

형수의 시끄러운 목소리를 옆으로 흘려들으며 아사노 쇼타의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두 번째 공은 볼, 바깥쪽을 살짝 벗어난 듯 보였다.

공을 던지고 난 아사노 쇼타와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고로 산이치가 스트라이크가 아니냐는 어필을 했지만, 주심은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볼임을 강조했다.

“좀 애매했지?”

형수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였다.

주심 성향에 따라서 스트라이크를 선언해도 될 정도로 정말 괜찮은 공이긴 했다.

원 스트라이크 원 볼 상황에서 고른 아사노 쇼타의 세 번째 공은 던컨 카레라스의 몸 쪽 높은 코스를 찌르고 들어간 스트라이크였다.

코스가 워낙 좋았기에 어설프게 타격을 하려고 하기 보단 그냥 지켜보는 쪽이 더 나은 훌륭한 공이었다.

지금까지 모두 포심 패스트볼만 던졌다.

일본 내에서 극찬을 아끼지 않는 포크볼과 수준급의 슬라이더를 가지고 있는 아사노 쇼타였기에 결정구로는 포크볼이나 슬라이더가 올 것이라는 건 모두가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아니나 다를까, 아사노 쇼타는 길게 승부를 가져가고 싶지 않다는 듯 스트라이크 존으로 날아오는 공을 던졌다.

부웅!

퍽.

타자 바로 앞에서 급격하게 꺾이면서 바운드가 되어버릴 정도의 포크볼에 던컨 카레라스는 헛스윙을 당하고 말았다.

포수인 고로 산이치가 재빠르게 블로킹을 해서 공을 잡고는 1루를 향해 던졌다.

낫아웃 상황에서 던컨 카레라스는 1루를 향해 절반도 달리지 못하고 아웃당하고 말았다.

“포크볼이 좋다고 하더니… 뭐, 나쁘진 않네.”

말과 다르게 표정은 떨떠름함이 가득한 형수였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멋진 포크볼이야. 조심해라. 오늘 저 공을 공략하지 못하면 점수내기 쉽지 않겠어.”

“걱정마라! 저 정도 포크볼은 단숨에 날려버릴 테니까!”

자신 있게 말을 하는 형수였지만, 내 머릿속에는 이미 과도한 스윙으로 삼진을 당하는 형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다른 타자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던컨 카레라스를 시작으로 크레이그 바렛과 코리 시거마저 아사노 쇼타의 포크볼에 꼼짝없이 삼진을 당하며 1회 초부터 세 타자 연속 삼진이라는 굴욕을 맛봐야만 했다.

결정구는 모두 포크볼이었다.

“지혁아, 너도 깔끔하게 세 타자 연속 삼진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타자놈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줘. 메이저리그를 제패하고 있는 세계 최강의 투수가 뭔지 확실하게 보여줘라. 알겠지?”

형수의 말에 피식 웃고는 마운드에 올라 연습투구를 시작했다.

컨디션은 그냥 보통 때와 다름없었다.

몸이 가볍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연습투구를 마치고 나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번 타자 히가시데 카즈키가 타석에 들어섰다. 170cm가 겨우 넘을 정도로 야구 선수치고는 작은 히가시데 카즈키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부동의 2루수다.

전력분석실에서 가져다 준 데이터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모든 능력적인 면에서 1번 타자로서 손색이 없지만, 역시 취약점이라면 파워 부족.’

일본 프로 무대에서 8년째 활약을 하고 있는 히가시데 카즈키였지만, 그를 한 마디로 압축하면 이거였다.

사토시 준의 다운그레이드.

그건 곧 내게 있어 최하위 사냥감이라는 뜻이다.

‘아사노 쇼타의 초구가 95마일이었으니까.’

형수와 사인을 주고받고 곧바로 1구를 던졌다.

쇄애애애액.

퍼엉!

“스트라이크!”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바라보니 98마일의 구속이 찍혀 있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구속이 나왔다.

좋은 공이라며 연신 나이스를 외치며 공을 돌려주는 형수의 모습에 히가시데 카즈키의 표정이 살짝 못 마땅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세 타자 연속 삼진이라.’

계획에 전혀 없던 일이었지만, 아사노 쇼타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팀 타자들의 기운을 북돋아 줄 겸 1회부터 전력을 다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거기에 작년 대회에서 메이저리그 팀들을 연속으로 격파하며 우승까지 차지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콧대를 확실하게 꺾어놔야 한다는 생각도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한 번 가보자.’

글러브로 가린 공을 가볍게 만지며 2구를 준비했다.

퍼어어엉!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타석에 서 있던 타자가 주심을 향해 거칠게 어필을 했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좀 벗어났다! 멀었다! 이걸 스트라이크 선언하면 어떻게 하느냐!

타자의 언성이 생각보다 컸고, 주심은 마스트를 벗고 그를 가만히 노려봤다.

씩씩거리는 타자는 눈치가 없는 건지, 자신의 생각이 정당하다 여기는 건지 주심의 싸늘한 눈초리에도 물러설 기세가 전혀 아니었다.

‘저러다 퇴장 당하지.’

같은 미국인이라고 봐준다?

메이저리그 주심들에게는 손톱만큼도 통하지 않을 말이다.

메이저리그 주심들은 혈연관계에 얽혀 있다 하더라도 주심의 권위에 도전하는 선수에게 있어서만큼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엄격한 대처를 해오고 있었다.

예상대로 주심은 결국 언성을 높이며 강하게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타자에게 퇴장 명령을 내렸다.

퇴장 명령이 떨어지자 타자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주심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흥분한 타자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치들이 가까스로 말리며 끌고 갔다.

“뭘 저렇게까지 어필하는 거야? 적당히 했어야지 예전에 메이저리그에 올라왔을 때에도 주심과 싸우길 밥 먹듯이 했다고 하더니 예전 버릇을 전혀 못 고쳤군.”

형수의 말대로, 지금 퇴장 당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3번 타자 로빈 카윌은 4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탬파베이 레이스에서 백업 선수로 실력적인 면에서는 충분히 주전 선수 자리를 노려볼만했다.

하지만, 불같은 성격과 그로 인해 동료 선수들과 어울리지 못하면서 결국은 일본에서 제2의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어설프게 백업 선수로 메이저리그에 붙어 있는 것보다 일본에서 몇 배나 더 많은 돈을 받으며 용병 생활을 하는 것이 로빈 카윌에게도 더 나았고, 실제로도 그런 삶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선수들이 많았다.

“저것만 봐도 일본에서 얼마나 거들먹거리면서 살았을지 뻔히 보인다.”

형수가 혀를 차고는 타석에 설 준비를 했다.

“내 말처럼 지혁이 네가 세 타자 연속 삼진으로 1회 말, 수비를 멋지게 막았으니 이제 내가 한 방 제대로 터트리고 돌아오마.”

앞선 타자들이 줄줄이 삼진이나 범타로 무기력하게 물러나는 걸 봤음에도 형수는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

더그아웃을 나가기 전 무슨 생각인지 형수가 음료를 담아 둔 아이스박스에서 사각 얼음 하나를 꺼내 자신이 앉았던 의자에 올렸다.

“이 얼음이 다 녹기 전에 한 방 날리고 돌아오겠다.”

삼국지의 유명한 장면을 패러디하곤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더그아웃을 빠져나가는 형수였다.

그리고.

자신의 말처럼 형수는 사각 얼음이 다 녹기 전에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멋진 삼진 잘 봤다.”

“젠장! 포크볼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알고 있었는데 왜 헛스윙을 했어?”

“공이 눈에 너무 딱 들어와서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다, 다음에는 내가 진짜 반드시 보여줄게.”

예상대로 아사노 쇼타의 포크볼은 LA 다저스 타자들을 무척이나 괴롭게 만들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흔하게 볼 수 없을 정도로 명품 포크볼인 건 확실했다.

흔한 말로 알고도 못 치는 공이 현재 아사노 쇼타의 포크볼이었다.

‘두 번째 타석에는 좀 달라지려나?’

명색이 메이저리거들이니 기대를 해볼만 하겠지만, 오늘 아사노 쇼타의 컨디션이 너무나도 좋아 보였기에 왠지 쉽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2회에도 2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당당하게 마운드를 내려가는 아사노 쇼타.

‘생각 외로 투수전이 될 수도 있겠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경기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시다 타카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최고의 타자, 작년 챔피언스 리그에서 엄청난 활약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끈 주역.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활약으로 많은 메이저리그 구단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지만, 결국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이적을 거부하는 바람에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된 선수이기도 했다.

올해 29살의 나이는 충분히 메이저리그 구단에서도 계약을 진행시킬 만했다.

잘 나가는 타자들은 대략 서른 중반까지도 꾸준하게 활약을 해주기 때문에 이시다 타카시 역시 그런 가능성을 생각했을 때, 이적시킬 만한 매력적인 선수였다.

내년 시즌까지 계약이 남아 있다고 했으니 올 시즌이 끝나면 이사다 타카시 스스로 메이저리그 진출을 강력하게 희망할 경우 요미우리 자이언츠로서도 놔줄 수밖에 없다.

타석에 선 이시다 타카시는 187cm의 키에 적당하게 근육이 붙은 체형으로 파워와 주력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매년 30개의 홈런을 때려내고 있었고, 20개 이상의 도루도 해주고 있었으니 이만한 타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가볍게 초구부터 넣어 보자.’

몸 쪽 공에 대한 대응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몸 쪽으로 꽉 차게 들어가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미동도 없이 공을 그대로 보내는 이사다 타카시였다.

전형적으로 자신의 공이 아니면 쉽게 배트를 휘두르지 않는 유형의 타자라는 데이터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듯 보였다.

좋은 타자는 절대 초구부터 멋대로 배트를 휘두르지 않는다.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코스의 공이 날아오면 거침이 없겠지만, 대다수 그런 공은 오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스트라이크가 된다 하더라도 카운트를 주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두 번째 공은 빠지는 유인구.

퍼엉.

“볼.”

이번에도 이시다 타카시는 미동이 없었다.

세 번째로 던진 공은 이시다 타카시가 가장 좋아하는 바깥쪽 높은 코스에서 살짝 벗어나는 유인구를 던졌다.

딱!

배트가 나오며 타구가 파울 라인으로 들어가 버렸다.

스트라이크를 잡겠다고 던졌다면 여지없이 안타나 장타를 맞았을 정도로 타이밍도 좋았다.

공 두 개를 지켜보면서 포심 패스트볼의 타이밍을 맞췄다는 건 확실히 타격 감각과 재능이 뛰어다는 뜻.

이제 다음 공이 중요해졌다.

‘패스트볼? 커브? 승부? 유인구?’

고민을 하다 이내 커브를 결정구로 삼기로 했다.

‘파워 커브보다는 12to6커브로 가자.’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춘 이시다 타카시의 허를 찌르기에 12to6커브보다 더 좋은 결정구는 없다.

형수와 사인을 맞추고 곧바로 12to6커브를 던졌다.

퍼엉!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역시나 12to6커브에 대한 대처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라 눈뜨고 아웃 카운트를 헌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시다 타카시의 표정은 웃음기가 가득했다.

다만, 그 웃음기가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분 나쁜 비틀린 웃음이었다.

아마도 패스트볼을 기다렸던 것 같다.

속으로 생각하겠지.

비겁하게 승부를 피했다고.

삼진을 당하고도 아주 당당하게 더그아웃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시다 타카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은근히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래서 다짐했다.

다음 타석에서는 이시다 타카시의 표정을 완전히 일그러트리고 말겠다고.

이후 타자들을 상대로 삼진 하나와 외야 뜬공으로 이닝을 마치고 돌아와선 타석에 설 준비를 했다.

“포크볼 조심해라.”

형수의 말에 나는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이곤 내 타석을 기다렸다.

‘초구를 노린다.’

어차피 내 타격 실력으로 아사노 쇼타의 포크볼을 공략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있는 공에 확률을 높일 수밖에 없다.

초구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는 패스트볼을 친다.

지금처럼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투수라면 자신이 던지는 모든 공에 자신감을 갖기 마련이다.

경기 초반 한 가운데 패스트볼을 던진 건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 자신의 컨디션을 점검하면서 운도 시험한 거다.

그 결과 깨끗하게 카운트를 올렸으니 아사노 쇼타는 오늘 자신의 경기가 아주 술술 풀리고 있다 여길 가능성이 농후했고, 그런 상황에서 타석에 서는 상대편 투수를 상대로 초구부터 유인구나 볼을 던질 가능성은 무척이나 희박하다.

‘나라도 그렇게는 안하니까.’

그렇기에 초구를 노리고 스윙을 가져간다.

오늘 아사노 쇼타의 패스트볼 최고 구속은 95마일.

이 정도의 공이라면 충분히 타이밍을 맞출 수 있었다.

내 앞에서 두 명의 타자가 내야 땅볼과 삼진으로 물러났다.

타석에 들어서니 아사노 쇼타의의 표정이 더그아웃에서 볼 때보다 더욱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도 그렇겠지.

메이저리그 구단, 그것도 현재 내셔널리그 서부 지구 1위를 달리고 있는 LA 다저스를 상대로 훌륭하다 칭찬을 받을 정도의 호투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와인드업을 하고 아사노 쇼타가 초구를 던졌다.

‘한 가운데 패스트볼이라니.’

아무리 내가 물방망이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따- 아아악!

타구가 총알처럼 아사노 쇼타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 『해외편 - 182』 > 끝

ⓒ 독고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