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81화 (181/221)

< 『해외편 - 181』 >

『해외편 - 181』

“지혁아! 이게 얼마 만이냐?”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이제는 세계적인 스타인데 얼마나 바쁘겠냐? 잊지 않고 가끔씩이라도 연락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하게 생각한다.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한국에서 네 경기는 꼬박꼬박 잘 챙겨보고 있다. 예전에 내가 알던 차지혁이랑은 완전히 달라졌던데? 도대체 넌 뭘 어떻게 하길래 2년 만에 그렇게 폭풍 성장을 한 거냐?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는 거야? 응? 있으면 이 형에게도 좀 알려줘라. 요즘 형이 죽겠다. 이러다가 내년이라도 은퇴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도대체 비결이 뭐야? 응?”

장난스러운 정현우 선배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지난 겨울 한국에 갔을 때, 만났던 모습 그대로인 정현우 선배였기에 편안했다.

“뭐야? 이 여유 있는 웃음은? 예전에는 잘 웃지도 않고 그러더니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이제 세계적인 최고 스타라고 여유가 흐른다 이거냐?”

“여유는요 무슨.”

“주영이 형! 이 자식 좀 봐요. 완전 사람이 달라졌다니까요?”

정현우 선배의 호들갑에 오주영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라졌네. 역시 세계적인 스타답네. 멋있어 졌어. 하하하!”

반가운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내가 처음으로 프로 생활을 했던 대전 호크스의 정현우 선배와 오주영 선배를 미국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이들이 미국으로 온 이유는 간단하다.

작년 한국 프로 리그에서 대전 호크스는 시즌 성적 4위를 기록하며 제11회 IBAF 챔피언스 티켓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C조라 하셨죠?”

“응. 조 대진표가 최악이야.”

정현우 선배가 죽는 소리를 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조 1위야 어차피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죄다 시드 배정을 받으니 애초부터 욕심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심 조 편성만 잘 받으면 조 2위 정도는 노려볼만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끝을 흐리는 정현우 선배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총 8개의 조별 경기는 각 조 1, 2위만 16강에 올라갈 수 있다.

기본적으로 메이저리그 구단의 경우 세계 최고의 리그였기에 디비전 시리즈에 진출한 8개 구단-와일드카드 결정전 승리팀 포함-의 경우 각 조에 시드(seed) 배정을 받는다.

챔피언스 리그 자체가 미국에서 열리기도 했고, 메이저리그 구단끼리 조별 리그에서 맞붙어 탈락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비메이저리그 구단들에게는 불합리한 조 편성이었지만, 아직까지 야구에 있어서만큼은 메이저리그의 파급력을 따라갈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했다.

챔피언스 리그 조편성 룰에 따라 작년 시즌 내셔널리그 서부 지구 우승팀인 LA 다저스는 C조 1순위로 편성이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C조에 대전 호크스가 함께 속하게 됐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봤을 때, 대전 호크스가 LA 다저스를 상대로 이길 확률은 무척이나 희박하다. 놀라울 만한 이변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은 대전 호크스가 LA 다저스를 이길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렇기에 애초부터 대전 호크스는 메이저리그 구단을 제외하고 조 2위만 하자라는 심정이었지만, 올 시즌 C조의 편성이 결코 희망적이지 못했다.

“왜 하필이면 작년 대회 우승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C조에 속했냐고.”

과도한 행동과 함께 절규에 가까운 탄성을 터트리는 정현우 선배의 말에 오주영 선배가 피식 웃었다.

오주영 선배의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LA 다저스라는 가장 적은 어차피 논외로 친다.

그렇다면 남은 건 나머지 두 팀이다.

그런데 그 중 한 팀이 공교롭게도 지난 대회 우승팀이자 작년 시즌 일본 프로리그 우승 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였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대전 호크스 전력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마지막 남은 한 팀조차 대만 프로 리그 우승팀인 라미고 몽키즈였으니, 조 2위를 노리고 있는 대전 호크스로서는 절망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인거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이번 대회에서도 꽤 주목을 받고 있는 팀으로 전력이 대단히 뛰어났기에 솔직히 LA 다저스 입장에서도 만만하게 볼 수가 없었다.

작년에 대만 리그 정상에 올랐던 라미고 몽키즈의 경우 다저스 입장에서는 방심만 하지 않으면 무난하게 승리가 예견되었지만, 대전 호크스 입장에서는 가장 약체라 부를 수 있는 팀조차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전문가조차 C조에서 최약체로 선택한 팀이 대전 호크스였다.

“다른 만만한 팀들도 많은데 왜 하필 일본하고 대만에서 우승을 한 팀들이 죄다 몰렸냐고.”

정현우 선배가 죽을 상을 하며 그렇게 투덜거렸다.

“우리도 2년 전에는 한국에서 우승했던 팀이잖아.”

오주영 선배의 말에 정현우 선배가 피식 웃었다.

“그때야 괴물 같은 지혁이가 있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고요. 지금은 지혁이도 없는데 누구 믿겠어요? 미리 말하지만 형은 믿고 싶지 않으니까 사양할게요.”

“나도 날 못 믿는다. 됐냐?”

“어쨌든! 도대체 우리 호크스는 누굴 믿고 C조에서 경기를 하냐고!”

말은 저렇게 해도 막상 시합이 벌어지면 누구보다 이를 악물고 뛸 선수가 정현우 선배였다.

“그나저나 너야 어차피 요미우리 전에 선발로 등판할 테고, 우리랑 붙을 때는 누가 선발로 나오냐?”

정현우 선배가 은근하게 물어왔다.

어제까지 경기를 했었던 다저스였기에 선발 로테이션을 조금만 생각하면 얼마든지 예측이 가능했고, 딱히 비밀도 아니었기에 대답을 해주었다.

“존 로더키가 선발로 나갈 겁니다.”

“존 로더키?”

LA 다저스의 3선발 투수, 전반기 9승을 거두며 무난하게 3선발 투수로서의 자리를 확실하게 지켜낸 존 로더키다.

대전 호크스 입장에서는 나나 딜런 아담스가 아니라는 점에서 환영해야 할지 모르나, 존 로더키 역시 무척이나 상대하기 곤란한 투수인 건 사실이었다.

“음… 지혁아.”

“예?”

“이건 어디까지나 너와 함께 생활했던 옛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존 로더키 약점이 뭐냐? 많이는 바라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풀어놔봐.”

정현우 선배의 말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따- 악!

형수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타구는 빠른 속도로 다저 스타디움의 가장 깊숙한 코스의 펜스를 넘겨버렸다.

홈런을 맞은 대전 호크스의 투수 김영석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6회 말, 어느덧 점수는 7점 차이로 벌어졌다.

3회 말까지만 하더라도 LA 다저스와 대전 호크스의 대결은 생각 외로 팽팽했다.

존 로더키를 상대로 대전 호크스 타자들은 매 이닝마다 안타를 치고 나가면서 득점 기회를 얻었고, 대전 호크스의 선발 투수 해니시 커튼은 다저스 타자들을 상대로 3이닝 동안 탈삼진 4개를 뽑아내며 예상외의 호투를 보여줬다.

6년 동안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던 투수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실력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4회 말, 선두 타자였던 코리 시거가 좌측 펜스를 넘기는 솔로 홈런을 터트리면서 해니시 커튼의 좋았던 분위기를 흐려놨다.

이어진 타자, 데니스 플린이 2루타를 때렸고 득점권에 주자를 둔 상황에서 마이크 트라웃은 오늘 경기 두 번째 홈런을 터트렸다.

이후에도 미치 네이와 형수가 안타를 터트리자 해니시 커튼은 자신감을 잃고 볼넷으로 추가 실점을 허용하며 겨우 4이닝을 채우고 쫓기듯 마운드를 내려갔다.

다저스 타자들이 점수를 뽑아내자 존 로더키 역시 대전 호크스 타자들을 상대로 한층 위력적인 투구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경기 초반 단타를 터트리며 안타를 계속해서 생산했던 대전 호크스 타자들은 오히려 5회, 6회에는 삼자범퇴, 그것도 각 이닝마다 2개의 삼진을 헌납하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점수 차이가 7점으로 벌어지자 게레로 감독은 대거 주전 선수들을 교체시켰다.

어차피 C조에서 최약체로 평가를 하고 있던 대전 호크스였으니 굳이 주전들의 체력을 소모시킬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린 거다.

대전 호크스 입장에서는 굴욕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백업 선수들이 대거 투입되었음에도 경기는 일방적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최종 스코어 12:0.

존 로더키는 7이닝 무실점으로 무난하게 승리투수가 되었고, 불펜 투수들 역시 실점을 허용하지 않으며 대전 호크스 타자들을 침묵시켰다.

경기가 끝나고 분한 모습으로 돌아가던 정현우 선배의 모습이 살짝 마음에 쓰였지만, 내가 뭐라고 위로를 건넬 입장은 아니었기에 그저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대만 프로구단 라미고 몽키즈와의 두 번째 32강 조별 경기가 열렸다.

예상대로 전날 경기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패배한 라미고 몽키즈는 LA 다저스를 상대로 어떻게든 끈질기게 상대를 해보겠다는 듯 악착같이 시합에 임했다.

그러나 라미고 몽키즈 역시 다저스의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3회에만 5실점을 하며 일찌감치 승부가 결정지어졌다.

오히려, 대전 호크스보다 더 빈약한 투수진으로 인해 7회에만 15점을 낸 다저스 타선이었다.

경기 결과는 17:2.

2점이나 실점을 했지만, 경기 내용을 살펴보면 모든 선수들이 교체가 된 다저스의 수비진은 게레로 감독과 코치진의 시험적인 선수 기용에서 일어난 실수일 뿐이었다.

실력적인 면에서는 확실히 라미고 몽키즈나 대전 호크스나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그나마 조금 더 손을 들어주자면 대전 호크스 쪽이었다.

그러나 대전 호크스 역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는 부족한 점이 많은 상대였다.

5:2라는 점수로 패배를 하고 만 대전 호크스는 조 2위의 꿈을 깨끗하게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모두가 기다렸던 LA 다저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시합날이 되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선발 투수는 팀 에이스라 평가를 받고 있는 아사노 쇼타로 평균 155km, 최고 158km까지 나오는 빠른 공을 던질 줄 아는 강속구 투수였다.

일본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투수였고, 인기와 실력을 겸비한 만큼 예전부터 메이저리그 구단의 관심을 받고 있었지만, 아사노 쇼타 스스로 미국 진출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독특한 투수기도 했다.

작년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상대로 꽤 좋은 모습을 보였기에 다저스 타자들로서도 이전 대전 호크스나 라미고 몽키즈의 투수들을 상대할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을 가져야 했다.

“공 좋네.”

마운드 위에서 힘차게 공을 던지는 아사노 쇼타를 바라보며 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수의 말처럼 확실히 아사노 쇼타의 공은 인정할 만했다.

낮게 깔리면서 묵직하게 포수 미트에 박혀 들어가는 포구음이 메이저리그 평균 이상이었다.

‘다저스에 온다면 포스터 그리핀보다는 나을 것 같네.’

LA 다저스의 1, 2, 3선발이 워낙 막강했기에 그렇지, 선발진이 조금만 빈약한 구단이라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3선발은 꿰찰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이 아무리 좋으면 뭐해. 간이 콩알만 한 놈인데.”

형수의 말에 픽 웃고 말았다.

“말이 좋아서 일본 야구를 지키겠다는 거지, 솔직하게 말해서 미국에서 아무리 성공한다 하더라도 일본에서만큼 성공할 자신이 없으니까 일찌감치 포기한 거 아닌가? 사내새끼가 저렇게 야망이 없어서야! 야구를 시작했으면 못 먹어도 고! 메이저리그에는 서봐야 하는 거 아니냐?”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묻는 형수였다.

“옛말에도 있잖아.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가 되겠다고.”

“흐흐흐! 딱이다! 딱!”

좋다고 웃는 형수를 뒤로하고 타석에 들어서는 1번 타자 던컨 카레라스와 아사노 쇼타의 대결을 진지하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 『해외편 - 181』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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