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80화 (180/221)

< 『해외편 - 180』 >

『해외편 - 180』

“역시 한식은 부담이 없군.”

만족스러운 표정의 랜디 존슨의 모습에 매실차를 내어주고는 설거지를 했다. 이대로 아침까지 내버려두면 집에 냄새가 날 수도 있었기에 직접 밥도 차렸으니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끝마쳤다.

설거지를 끝내고 주혜영이 직접 구워놓은 쿠키와 우유를 들고 TV를 보고 있는 랜디 존슨의 맞은 편에 앉았다.

먹으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랜디 존슨은 쿠키를 하나 집어 입에 넣어 씹었다.

“달지도 않고 딱 좋군. 어디서 산 거지?”

쿠키가 입에 맞는지 랜디 존슨은 곧바로 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우리 집에서 일하시는 분이 직접 구웠습니다. 경기가 끝나거나, 밤에 출출하면 간식 대용으로 먹으라고 구워놓은 겁니다.”

워낙 운동량이 많은 남자 둘이 사는 집이다보니 주혜영이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를 해둔 영양 간식으로, 일반적인 쿠키와 다르게 몸에 좋지 않은 당분은 최대한 빼고 영양에 좋은 견과류 등을 직접 갈아서 만들었기에 몸에도 좋았고, 맛도 꽤 훌륭해서 형수와 내가 상당히 자주 먹는 간식이었다.

“정말 좋은 가정부를 뒀군.”

어느새 4개째 쿠키를 손에 들고 있는 랜디 존슨이었다.

꽤 많은 양의 쿠키를 먹고 나서야 랜디 존슨과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가장 먼저 랜디 존슨이 내게 한 말은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질 때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느냐는 거였다.

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비디오 분석 자료를 통해 확인을 했다면서 지속적으로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질 경우 손목에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당부를 해줬다.

“현재 던지고 있는 라이징 패스트볼은 어디까지나 네가 던지고자 하는 슬라이더 계열의 신구종을 위한 예행 연습이라는 걸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자칫 라이징 패스트볼에 현혹되어 오랜 시간 마운드를 떠나야 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걸 명심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자제하려고 하는 겁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랜디 존슨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랜디 존슨만큼은 내가 어째서 라이징 패스트볼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여겼고, 내 짐작대로였다.

“그래서 서서히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 한계 내에서 신구종을 던져볼까 합니다.”

“중지의 힘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뜻인가?”

“습관처럼 훈련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말을 하는 지금도 무거운 스냅볼을 중지만으로 튕기며 놀이마냥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중지의 힘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하고, 감각 역시도 항상 유지해야 내가 던지고자 하는 신구종을 던질 수 있었기에 손에서 스냅볼을 떨어트린 적이 없었다.

야구 선수, 특히 투수들의 경우 스냅볼을 항상 가지고 다녔기에 어느 누구도 내가 스냅볼을 이용해서 훈련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워낙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크게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너무 완벽한 투구폼이 오히려 고생길을 만들 줄이야.”

랜디 존슨의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슬라이더 하나를 던지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랜디 존슨과 내가 머리를 맞대서 준비 중인 신구종이 어떤 식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낼지 아직까지도 의문인 건 사실이지만, 우선은 최대한 해볼 수 있는 만큼 노력을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거.”

랜디 존슨이 한 권의 화보집을 내게 내밀었다.

표지에는 땀을 흘리고 있는 내 모습이 아주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이게 뭡니까?”

“작년에 내가 찍었던 사진들을 화보집으로 엮은 거다. 제법 잘 나왔다.”

“진짜로 그때 찍은 사진들로 화보집을 만들었습니까?”

작년에 부상을 당했다가 이후 몸을 만들 때, 랜디 존슨이 함께 훈련을 도왔던 때의 사진들이다.

제법 두툼한 화보집은 한 장, 한 장이 모두 생동감이 느껴졌다.

여느 모델들처럼 멋있는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사진 역시도 깨끗하고 세련된 이미지보다는 투박한 듯 하면서도 거친 느낌이 강했다.

“말했다시피 모델료는 순이익의 절반이다.”

“판매가 되겠습니까?”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웠지만, 과연 이런 화보집이 상업적으로 팔려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문감이 들었다.

처음부터 돈을 벌 목적으로 사진을 찍은 게 아니다.

화보집에 실린 사진들 역시 카메라 앞에서 사진 작가의 요구에 맞춰서 포즈를 취한 것도 없었다. 실제로 훈련을 하는 모습을 랜디 존슨 스스로 사진을 찍었고, 수천 장의 사진들 중 일부를 선별해서 그걸 화보집으로 엮은 것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한 일이라고는 훈련하는 모습을 찍는 것에 동의를 했을 뿐이다.

이런저런 노력을 따졌을 때, 순이익의 절반이나 내게 주겠다는 랜디 존슨의 말은 확실히 과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일차적으로 팔려야 되겠지만.’

과연 팔릴까?

일부 팬들의 호기심과 팬심에 의해 어느 정도는 팔리겠지만, 랜디 존슨이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받을 정도로 많은 판매가 되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살 사람은 사겠지. 그것보다도 판매처 문제로 인해 네 에이전시와 연락을 했으면 좋겠다.”

“제가 연락을 해보라고 말은 해두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하다는 듯 랜디 존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샤워 좀 하고 자야겠군.”

제 집처럼 자연스럽게 욕실로 향하는 랜디 존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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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일 화요일, 리글리 필드.

시카고 컵스와의 원정 3연전 중 마지막 3차전에 선발로 마운드에 올라야 했다.

리글리 필드에 대한 기억은 오직 하나 뿐이다.

작년 6월 3일, 안젤라와 공개적으로 연인 관계임을 생중계했고, 그날 경기에서 시즌 3번째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안젤라와 연인이 된지도 1년이 지났다.

요즘 안젤라는 무척이나 바빴다.

6개월 동안 고생하며 찍었던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었기에 본격적으로 영화 홍보를 다녀야 했다.

덕분에 지난 번 워싱턴에서 헤어지고 지금까지 전화 통화만 할 뿐, 만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다른 연인들처럼 1주년 기념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였다.

“흐흐흐! 어때?”

오늘도 역시나 내 공을 받기 위해 포수 마스크를 쓴 형수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뭐가?”

“1년 만이잖아. 다시 한 번 퍼펙트 게임을 해줘야 하지 않겠어? 너 작년에는 여기서 3번째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잖아?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올 시즌에는 고작 한 번 밖에 없잖아? 1년 하고도 열흘이나 지났으니 작년에 비하면 페이스가 너무 떨어진 거 아냐? 힘 좀 팍팍 내서 퍼펙트 게임 좀 해봐.”

형수는 퍼펙트 게임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헛소리 그만하고 가자.”

“두 번째 퍼펙트 가자!”

형수의 말을 흘려들으며 마운드에 올랐다.

1회 초, LA 다저스의 공격은 득점 없이 끝나고 말았지만, 요즘 다저스 타자들의 컨디션이 최고조에 올라 있었기에 득점 지원에는 큰 걱정이 없었다.

선발 투수 입장에서 타자들이 요즘처럼만 타격을 해주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정도였다.

타자들 전체적으로 모두 타격 감각이 좋았지만, 그 중 복귀전 이후 미치 네이의 방망이가 무척이나 뜨거웠다.

미치 네이는 3일 복귀전에서 5타수 3안타를 시작으로 어제 7일까지 무려 21타수 12안타를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팀의 중심 타자로서 홈런이 없다는 게 흠이긴 했지만, 고타율을 내달리고 있는 이상 언제든 홈런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타격 감각이 탁월했다.

연습 투구를 마치고 나니 타석으로 타자가 들어섰다.

오늘은 형수와 미리 말을 했던 대로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지지 않을 생각이다.

손목에 대한 부상 방지도 필요했고, 이미 타자들에게 라이징 패스트볼에 대한 경각심을 가슴 깊이 심어둔 이상 굳이 무리해서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질 이유가 없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경기장을 찾은 팬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몸에 무리를 가할 순 없었다.

초구는 빠르게 사인을 주고받은 뒤 곧바로 던졌다.

쇄애애액.

퍼엉!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몸 쪽을 꽉 찬 스트라이크를 던져 넣었다.

타석에서 한 발 물러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언론의 호들갑으로 전 세계적으로 나를 인식하는 가장 첫 번째 단어가 바로 라이징 패스트볼러다.

자연스럽게 타자들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 내가 단순한 포심 패스트볼을 던진다 하더라도 타자들 입장에서는 공이 포수 미트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혹시라도 라이징 패스트볼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할 틈을 주지 말고 몰아치자.’

오늘 경기에서 나와 형수가 세운 계획이다.

2구는 바깥쪽.

퍼엉!

“스트라이크!”

형수에게 공을 전달 받기가 무섭게 3구.

부웅!

“스윙! 타자 아웃!”

바깥쪽으로 빠지는 체인지업에 타자는 성급하게 배트를 휘두르고 말았다.

타자와 투수는 자고로 타이밍 싸움에서 판가름이 난다.

지금처럼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으며 빠르게 몰아치면 타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내 속도에 따라오느라 생각이 더뎌질 수밖에 없다.

부웅!

“타자 아웃!”

높은 코스의 포심 패스트볼에 타자의 방망이가 헛돌며 순식간에 1회 말이 끝났다.

“컵스 놈들 완전 얼이 빠져있더라. 흐흐흐!”

형수의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며 나 역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캬아~ 지혁아, 하늘 좀 봐라. 오늘 날씨 정말 죽이지 않냐? 퍼펙트 게임 하기에 딱 좋은 날씨다. 안 그렇냐?”

쉬지 않고 퍼펙트 타령을 하는 형수였다.

4회 말, 드디어 깨지고 말았다.

실투였다.

컷 패스트볼이 밋밋하게 들어가면서 한 가운데로 몰렸다.

이런 공을 타자가 못 때리면 그건 그날 투수의 운이 최고라 부를 만하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내가 세계 최고의 무대에 올라선 투수라면 타석에 들어서 있는 타자 역시 마찬가지로 천재 소리를 밥 먹듯 들으며 메이저리그 무대에 올라온 야구 선수였으니까.

손끝에서 실밥이 제대로 긁히지 않는 순간, 공이 날아가는 궤적을 보는 순간, 타자의 배트가 타격에 성공하는 순간, 타구를 날리고 팔로우 스윙을 가져가며 입가에 함박 웃음을 짓는 타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순간, 순간이 투수에게는 아찔함을 선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따- 아아악.

고막을 관통하는 타격음은 돌아보지 않아도 공이 펜스를 넘길 것을 확신하게끔 만든다.

한 폭의 그림처럼 배트를 어깨 뒤로 던지며 양손을 하늘로 번쩍 치켜드는 시카고 컵스의 3번 타자 존 카펠로는 마치 시즌 MVP라도 받은 것마냥 환하게 웃었다.

경기장 한 쪽에서는 열광적인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나머지 한 쪽에서는 안타까움의 탄식과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이걸로 끝났다.

메이저리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연속 이닝 무실점 신기록이 82.2이닝으로 마감됐다.

기존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는 대기록을 달성했기에 아쉬움은 없었지만, 좀처럼 실투를 하지 않는 내가 실투에 의해 안타도 아니고 홈런을 허용하면서 기록이 깨졌다는 사실에 솔직히 입 안이 쓰게 느껴졌다.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벌여 타자에게 홈런을 허용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올 시즌 첫 번째 피홈런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마냥 위풍당당하게 베이스를 도는 존 카펠로를 바라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 정말 부담감에서 해방된 거다.

딱히 기록에 연연하지는 않았지만, 연일 기록에만 집중하는 언론과 팬들로 인해 신경이 쓰였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이 세상에 실점하지 않는 투수가 어딨겠어.”

작게 중얼거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로진백을 내려뒀다.

타석을 바라보니 타자 박스에는 무언가 기대에 가득 찬 4번 타자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전 타석까지만 하더라도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였던 타자가 내가 실점하니 자신감을 회복한 거다.

“…다시 기록에 도전해볼까.”

피식 웃고는 힘차게 초구를 던졌다.

《차지혁,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 82.2이닝에서 마감!》

《기록을 저지시킨 존 카펠로(CHC)의 호쾌한 한 방!》

《시즌 첫 번째 피홈런에 고개를 떨구는 차지혁!》

《9이닝 1실점, 호투로 시즌 16승을 달성한 LA 다저스 슈퍼 에이스 차지혁!》

《10연승 질주! 누가 차지혁을 막을 것인가!》

《차지혁, 150이닝 돌파! 평균자책점 0.53! 255K! 2년차 징크스 따윈 없다!》

《LA 다저스 차지혁과 연장 계약에 자신 있다!》

《슈퍼 에이스 차지혁, 시즌 17승! 11연승! 브레이크 없는 승리 질주!》

《시즌 18승 실패, 6이닝 2실점 최저 올 시즌 최저 이닝 기록!》

《30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상대로 시즌 18승을 따내며 전반기를 마친 차지혁!》

《MLB 최고의 스타에 차지혁 압도적인 차이로 1위에 뽑히다!》

《2028 시즌에도 사이영상과 MVP 수상이 유력한 LA 다저스 차지혁!》

6월이 그렇게 지나고, 7월이 시작됐다.

< 『해외편 - 180』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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