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79』 >
『해외편 - 179』
그럴 수 있을까?
맥브라이드 단장의 말을 가만히 생각해봤다.
지금까지 나는 대부분의 투수들이 꿈꿔왔던 일들을 거의 다 이뤄냈다.
고작 데뷔 2년 차의 신인이지만, 투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사이영상, 시즌 MVP, 신인왕, 역대 최저 평균자책점, 20승 달성, 퍼펙트 게임, 올스타 선정, 각종 기록 등등 짧은 시간 내에 거의 모든 걸 다 이뤄냈다.
유일하게 하나 남은 것이 있다면 월드 시리즈 우승뿐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LA 다저스에서만 선수 생활을 할 경우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하면 그것 하나만이 후회로 남게 된다.
LA 다저스는 무려 40년 동안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다.
40년이 50년이 될 수도 있고, 60년이 될 수도 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월드 시리즈 우승과 인연이 없다면 어느 팀을 가더라도 은퇴하기 전까지 우승 반지를 껴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저 가능성에 기대를 걸 뿐이다.
LA 다저스의 월드 시리즈 진출과 우승 가능성은?
매년 30개의 메이저리그 구단들 중 1, 2순위에 꼽히는 LA 다저스다.
올 시즌에도 월드 시리즈 우승 1순위에 당당히 선정된 LA 다저스였다.
그러나 확신은 없다.
보유하고 있는 선수단의 최상의 전력을 통한 비교 분석일 뿐이다.
핵심 선수들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거나, 컨디션 난조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는 이상 그 어떤 구단보다 월드 시리즈 우승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니 머지않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일궈낼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은 건 사실이다.
‘월드 시리즈 우승만 한다면… 후회할 일 없겠지.’
대답을 기다리는 맥브라이드 단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LA 다저스와 제가 같은 꿈을 꾸고 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같은 꿈을 꾼다는 건, 서로 함께 노력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약속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내가 LA 다저스에 바라는 건 그 정도면 충분했다.
“같은 꿈이라… 그렇다면 이 계약 어긋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맥브라이드 단장이었다.
맥브라이드 단장과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커쇼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던진 공이 정말 라이징 패스트볼이야?”
첫 인사부터 커쇼가 날 찾아온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서서 대화를 나누기엔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자리부터 옮기시죠.”
“물론이지!”
들뜬 표정의 커쇼와 함께 다저 스타디움에 있는 선수 휴게실로 향했다.
이른 오전 시간이었기에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약간 여유로운 스타일이었던 커쇼였기에 재촉하는 그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라이징 패스트볼에 대한 궁금한 점이 높다는 뜻이었기에 랜디 존슨과의 이야기부터, 신구종에 대한 것까지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긴 설명이 끝나자 커쇼는 자신의 궁금증이 모두 해소됐다는 듯 개운한 표정을 보였다.
“손목은 어때? 평소보다 손목이 아플 것 같은데?”
역시 커쇼였다.
단순한 설명만으로도 어디에 문제가 있을지 한 눈에 파악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한 경기에 많은 공을 던질 순 없습니다. 손목에 통증이 생기거든요.”
“그렇겠지. 조심해야 해. 투수의 몸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서 오랜 습관에서 벗어나면 자연스럽게 밸런스가 깨지고, 그렇게 깨진 밸런스로 인해 무리하게 투구를 하다보면 결국에는 치명적인 부상이 발생하거든.”
“알고 있습니다.”
“손목 통증 때문에 지난 경기에서 라이징 패스트볼을 두 번 밖에 던지지 않은 거야?”
“그런 이유도 있지만, 굳이 라이징 패스트볼을 많이 던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쿠어스 필드가 아니니 다른 구종들로도 충분히 타자들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랬군. 하지만, 타자들을 압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징 패스트볼을 꾸준하게 던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면 타 구단의 전력 분석원들이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내게 될 거야.”
커쇼의 말에 나는 슬쩍 웃었다.
“상관없습니다. 알게 된다 하더라도 어차피 공을 던지지 못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하긴.”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지기 직전 어떤 특별한 징후나, 습관, 버릇 등이 드러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지금으로서는 내가 한 경기에 라이징 패스트볼을 많이 던지지 못한다는 걸 알아도 아무런 문제가 될게 없었다.
“그럼 신구종은 어떤 공이지?”
커쇼의 눈동자가 다시 반짝였고, 그걸 바라보는 나는 괜히 부담스러웠다.
커쇼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니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오전 운동을 간소하게나마 해뒀지만, 훈련량이 부족했기에 점심을 먹고 곧바로 훈련을 시작했다.
“나 먼저 갈까?”
가방을 어깨에 짊어진 형수가 나를 찾아와선 그렇게 물었다.
오늘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홈 3연전의 첫 번째 경기가 있었다.
나야 선발 투수에다 로테이션에 맞춰서 이번 애틀랜타 홈 3연전에는 마운드에 올라갈 일은 없었지만, 본의 아니게 팀 경기 때마다 참석하는 것보다 빠졌던 날들이 많았기에 동료 선수들의 눈치가 보였다.
“잠깐만 기다려.”
하던 운동을 마무리하고 재빨리 가방에 짐을 챙겨 형수와 함께 다저 스타디움을 향해 걸었다.
“계약은 어떻게 잘되고 있어?”
형수가 처음으로 계약에 대해서 물었다.
황병익 대표의 당부도 있었지만, 나 역시 아직 계약이 협상 중이라 섣부르게 말을 꺼내기 싫어 가장 친한 형수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었다.
형수 역시도 계약 문제는 워낙 민감한 사항이라 내게 묻질 않았는데 눈치는 무척이나 궁금해 하는 게 며칠 전부터 느껴졌었다.
“황 대표님이 다 알아서 하는 거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기본적인 계약 내용이나 진행 상황은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냐?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정말로 다저스에서 종신 계약을 요구했냐?”
말을 할까, 말까 갈등하다 이내 형수에게는 말해도 괜찮다 싶어 대답해줬다.
“그래.”
“대박! 그럼 계약금도 정말 3억 달러야?”
언론 보도에서는 계약금이 3억 달러라고 나와 있었다.
“그건 협상을 해봐야 아는 문제라 지금 내가 뭐라고 확실하게 대답을 해줄 수가 없다.”
“그건 그렇다 치고, 연봉은? 종신 계약이면 연봉 무지막지하게 주겠지? 너 정도라면 최소 연 평균 2500만 달러에서 3천만 달러는 되겠지?”
계약금만 따로 3억 달러라고 생각하면 형수의 말대로 연봉을 예상하기 쉽다.
“그것도 나는 잘 몰라. 확실한 건 황 대표님의 협상 능력에 달려 있는 거니까.”
“하긴. 다년 계약도 아니고 종신 계약이니 앞으로 10년 후의 화폐 가치나 시장 경제 등을 생각했을 때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겠다. 어쨌든 부럽다. 종신 계약이라니. 운동 선수에게 그것보다 좋은 계약이 어딨겠냐?”
형수가 부럽다는 듯 날 바라봤다.
“지혁아, 나도 이번 기회에 다저스와 종신 계약을 시도해볼까?”
“뭐?”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너를 상대로 타자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다. 고등학교 때나 네가 한국 무대에서 활약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언젠가는 너와 멋진 승부를 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요즘 네가 던지는 공을 받다보면 자신감이 없어져서 말이야.”
“그래서 나랑 같은 구단에서 평생 함께 하겠다고?”
“좋잖아? 이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 어딨겠어? 그리고 나중에 변명 거리도 되고.”
“변명 거리라니?”
내 물음에 형수가 음흉스럽게 웃었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너와 투수와 타자로 대결을 하지 않았으니까 우리 사이의 승부는 무승부잖아? 대부분의 타자들이 너한테 박터지게 깨졌어도 나는 아니라 이거지. 나중에 애들 낳으면 얼마든지 내 마음대로 말을 할 수도 있고. 흐흐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저런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하지만, 뒤이은 형수의 말은 전혀 한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생 네 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나 역시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억해주지 않겠어? 네가 전설적인 기록들을 세울 때마다 내가 함께 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나 역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메이저리그를 호령했던 포수로 남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네가 정말 다저스와 종신 계약을 하게 된다면 나 역시 어떻게든 다저스를 떠나지 말고 네 곁에서 너의 공을 가장 많이 받았던 메이저리그 포수로 남고 싶다고.”
말을 하며 형수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형수의 진심이 느껴졌다.
나 역시 형수가 나와 함께 전설적인 포수가 된다면 얼마나 기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너 계약 얼마나 남았다고 했지?”
“3년. 에이전시 계약은?”
“그렇지 않아도 올해 재계약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황 대표님과 이야기를 좀 해봐.”
“나도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내가 너랑 같은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있으면 아무래도 왠지 비교당하는 기분이 들까봐 좀 그렇더라.”
형수 입장에서는 충분히 걱정할 수 있는 부분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황병익 대표라면 그래도 나와 형수의 관계를 아는 이상 형수를 섭섭하게 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했다.
“판단은 네가 하는 거지만, 너도 황 대표님 자주 봐서 알잖아? 내 생각에는 네가 섭섭할 정도의 행동은 없을 것 같은데.”
“그럴 려나?”
형수가 고민을 하는 사이 어느덧 다저 스타디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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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LA 홈 3연전은 2승 1패를 기록하며 위닝 시리즈를 가져갔다.
내셔널리그 서부 지구 1위에 오른 이후로 단 한 번도 2위로 내려앉지 않고 있을 정도로 올 시즌 다저스는 승률이 높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다저스에 밀려 2위를 달리고 있지만,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승률 또한 만만찮기 때문이었다.
반면, 항상 지구 1, 2위를 다투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하락세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현재 순위 4위.
기어이 콜로라도 로키스에게 3위 자리마저 내주고 말았다.
딱히 주전 선수들의 부상이나 부진이 많은 것도 아니었음에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승률은 급속도로 낮아지고 있었다.
“자이언츠가 이렇게까지 망가질 줄이야. 어제 경기까지 패배하면서 벌써 9연패지?”
9연패.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라는 강팀에 어울리지 않는 연패다.
보스턴 원정, 세인트루이스 원정, 그리고 홈에서의 충격적인 3연패까지.
밑바닥까지 떨어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팬들은 지구 라이벌인 다저스 원정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을 정도였다.
불운하게도 이번 LA 원정에서 맞상대를 해야 할 다저스의 선발 투수들은 나를 비롯해서 딜런 아담스, 존 로더키였다.
현재 우리 세 사람을 두고 내셔널리그 막강 선발 트리오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로 승률이 굉장히 높았다.
현재 내가 14승, 딜런 아담스 8승, 존 로더키 7승으로 도합 29승을 합작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엇보다도 딜런 아담스와 존 로더키의 경우 다저 스타디움에서의 승률이 무척이나 높았기에 다저스 팬들 사이에서는 이번 원정으로 인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치욕의 12연패에 빠지게 될 거라는 조롱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1차전.
역시나 엄청난 수의 취재진과 구름처럼 몰려든 관중들의 관심은 나에게 있었다.
특히, 원정 경기에서 라이징 패스트볼을 선보인 나에게 홈팬들은 홈구장에서의 라이징 패스트볼을 강렬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관중들 사이사이에 피켓을 든 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라이징 패스트볼이 적혀 있을 정도였다.
팬들의 바람대로.
쐐애애애애애액.
부우웅!
퍼어- 어엉!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1번 타자 데릭 힐에게 결정구로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짐으로써 첫 번째 삼진을 잡아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관중들의 함성이 다저 스타디움을 뒤덮었다.
원정 경기까지 따라다니며 경기를 직관했던 팬들과 다르게 홈에서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라이징 패스트볼에 관중들의 흥분도는 무척이나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도 라이징 패스트볼은 극도로 자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패의 늪에 빠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타자들은 무기력하게 타선에서 물러났고, 8회까지 단 하나의 안타만을 내주며 무실점 기록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어렵지 않게 시즌 15승을 올렸고, 79이닝 연속 무실점으로 대기록을 연장시켰다.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니 약속대로 랜디 존슨이 집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배가 고프군.”
랜디 존슨의 첫 마디는 밥 달라는 말이었다.
< 『해외편 - 17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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