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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마일-178화 (178/221)

< 『해외편 - 178』 >

『해외편 - 178』

6월 3일 토요일,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경기.

워싱턴 내셔널스의 홈구장인 내셔널스 파크(Nationals Park)는 지옥을 방불케 했다.

경기장을 찾은 엄청난 수의 취재진과 관중들 때문이었다.

지난 이틀 동안 있었던 1차전과 2차전에서는 관중석 곳곳이 비어 있었지만, 오늘 3차전은 확연하게 달랐다.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면.

“원정 경기에서도 만원 관중 동원력을 발휘하다니… 정말 넌 대단한 놈이다.”

형수가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형수의 말대로 오늘 경기에서 내가 선발로 등판한다는 사실 하나가 관중몰이를 한 거다.

아직까지도 유지 중인 연속 이닝 무실점에 대한 기대.

7경기 연속 승리, 2경기 연속 완봉승.

마지막으로 라이징 패스트볼까지.

이런 점들이 수많은 취재진과 관중들을 끌어 모은 원동력이 됐다.

특히, 63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과 라이징 패스트볼은 단연 최고의 흥행 아이템이다.

오늘 경기 역시 미국 전역으로 생중계가 된다.

작년 시즌 워낙 압도적인 활약을 보였기에 올 시즌 개막전부터 시작해서 내가 선발로 등판하는 경기는 단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전국방송을 타고 있었는데, 메이저리그 투수들 가운데 유일하다고 했다.

시청률도 꽤 높은 편이라 덕분에 LA 다저스 구단은 꽤 짭짭할 중계료를 챙기고 있는 중이다.

“그나저나 토렌스 때문에 신경 쓰여서 죽겠다.”

형수의 말에 나 역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LA 다저스의 주전 포수 자리는 의외로 형수가 급성장을 하면서 2인 체제로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형수의 타격 능력이 토렌스에 비해 워낙 압도적인 것도 있었지만, 작년보다 월등하게 향상된 수비 실력이 현 상황을 만들어 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잔인했던 4월을 이겨낸 형수는 5월부터 무척이나 날아다니고 있는 중이다.

5월 성적만 놓고 보면 3할 중반의 타율과 6개의 홈런까지 팀의 중심 타선 역할을 맡겨도 충분할 정도였다.

여기에 5월부터 꾸준하게 나와 배터리를 맞추면서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으니 게레로 감독의 신임을 듬뿍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다.

토렌스는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주전 포수가 아닌 백업 포수인 형수와 지속적으로 선발 출장을 한다는 사실에 꽤나 불만을 갖고 있었다.

에이스 투수를 백업 포수에게 뺏겼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다.

“요즘에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니까.”

“자존심이 상했겠지.”

아직 32살 밖에 되지 않았고 작년까지 든든하게 LA 다저스의 안방을 지켰던 주전 포수였던만큼 아무리 성격이 좋은 토렌스라 하더라도 현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내가 왜 그렇게 타격에 집착을 했는지 알겠지? 포수로서 수비 능력도 중요하지만 타격 능력이 바닥이면 절대 주전포수로 살아남을 수 없다니까.”

목에 힘을 잔뜩 주며 말을 하는 형수의 모습에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에이~ 모르겠다! 그렇다고 맨날 내가 혼자 경기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감독이 생각하는 뭔가가 있으니까 너랑 나를 배터리로 내세우는 거 아니겠어? 더 이상 나도 토렌스 눈치 안보고 신경 쓰지 말아야지.”

어차피 경쟁이다.

다른 건 몰라도 주전 경쟁만큼은 절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참, 오늘 부모님 한국으로 돌아가신다고 했지?”

“경기 끝나고.”

부모님은 오늘 경기가 끝나는 즉시 한국으로 돌아가신다.

아무리 에이전시에서 사람들을 보내줬다고 하지만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인 지아를 너무 오랜 시간 홀로 방치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물론, 지아는 부모님이 조금 더 오래 미국에서 머물길 바라고 있겠지만.

“부모님 오랜만에 미국 오셨는데 경기 때문에 변변하게 식사 대접도 한 번 못 해드렸네.”

“나랑 다르게 넌 그럴 시간이 없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작년에 지혁이 네가 우리 집에 가서 나 대신 엄마랑 아빠한테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선물도 주셨다고 얼마나 나한테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8월에 부산에 가면 한 번 근사한 곳으로 모실 수 있어야 할 텐데.”

형수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기만 했다.

“오늘 같은 날이야 말로 화려한 복귀전으로 아주 제격이라고 생각 드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때?”

미치 네이가 나와 형수 사이에 끼어들며 히죽 웃었다.

오늘은 내 선발 경기인 동시에 미치 네이의 2028년 시즌 첫 경기이자, 작년 부상 이후 복귀를 하는 경기였다.

물론, 미치 네이의 복귀를 손꼽아 기다리는 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른 경기 날이었다면 충분히 그의 복귀를 환영했겠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메인이라 할 수 있는 나로 인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치 네이는 오늘을 복귀전으로 감독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전국방송이라는 점이 결정적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잘 부탁한다. 슈퍼 에이스! 오늘 확실하게 네 승리에 일조하겠다.”

부상에서 회복되어 복귀전을 치르기 때문인지 미치 네이는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몸 상태를 점검하고 올라온 트리플A 경기에서도 작년 시즌 막판에 보여줬던 상승세를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컨디션이 절정에 올라가 있음을 증명했기에 오늘 경기에서의 기대감도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클럽 하우스에서 보자고.”

어디론가 향하는 미치 네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형수가 내게 조용히 말했다.

“트레이드 이야기도 깨끗하게 들어갔고, 요즘 게레로 감독이랑 사이도 무척 좋아졌다고 하더니 그래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 보이네.”

“그러게. 컨디션이 좋으면 나야 고맙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수비는 미치 네이보다는 케럴이 훨씬 좋은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형수였다.

“그것보다도 너 어쩔 거야?”

“어쩌다니?”

“오늘 그거 던질 거야?”

“두 번. 경기 시작과 마지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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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스코어 8:2.

LA 다저스의 승리로 경기가 끝났다.

나는 8회까지 공을 던졌고, 9회에는 불펜에 마운드를 넘겨줬다.

2실점은 9회 말 불펜 투수의 자책점이다.

형수에게 말했던 것처럼 경기 시작 1번 타자에게 초구를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짐으로써 워싱턴 내셔널스 타자들에게 확실하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8회 말, 마지막 타자에게 마지막 결정구로 라이징 패스트볼을 다시 한 번 던짐으로써 경기장을 찾은 취재진과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줬다.

물론, 그들은 더 많은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져주길 원했겠지만.

오늘 경기는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경기 첫 번째 공부터 라이징 패스트볼로 워싱턴 내셔널스 타자들을 압박한 효과는 굉장히 컸다.

이후 마지막 공을 던지기 전까지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지지는 않았지만, 최고 101마일까지 나온 포심 패스트볼과 12to6커브를 적절이 이용해서 8이닝 무실점이라는 훌륭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내가 잘 던진 것도 있었지만, 워싱턴 내셔널스 타자들이 라이징 패스트볼에 대한 정신적 압박감이 내겐 큰 도움이 됐다.

패스트볼을 던질 때마다 움찔거리거나, 의도적으로 스윙 궤적을 평소보다 높게 그려내는 상대 타자들을 볼 때면 괜히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오늘 경기에서도 무실점을 기록하면서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이 71이닝으로 껑충 뛰었다.

경기장을 찾은 취재진들에겐 좋은 기사거리를 제공할 수 있었고, 내 경기를 보기 위해 티켓을 끊은 팬들에게도 의미 있는 경기를 관전시켜줌으로써 돌아가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줬다.

경기가 끝나고 수많은 취재진들과 간단하게 인터뷰를 마치고 곧바로 부모님을 모시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8월 달이면 올림픽 때문에 한국에 들어가지만, 대표팀 일정에 맞춰서 숙소 생활을 해야만 했기에 부모님과 함께 보낼 여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부모님을 공항까지 모셔다드리고 호텔로 돌아오니 황병익 대표가 전화를 했다.

-계약 조건 조정에 진전이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가 원하는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기에 조금 더 조정을 이끌어 낼 생각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이번 협상에 대한 소문을 살짝 유포하게 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차지혁 선수가 LA 다저스에 남고자 하는 마음은 알지만, 이번 협상의 조건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선 다저스의 협상팀이 생각할 틈을 줘서는 안 됩니다. 하하하. 이 바닥이 원래 좀 그렇습니다. 어쨌든 그 부분에 있어서는 차지혁 선수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다만, 재계약 소문이 떠돌더라도 차지혁 선수는 이번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신경 쓸 이유도 없다는 액션만 보여주시면 됩니다. 부탁드립니다.“

황병익 대표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내 계약 문제에 매달렸다.

두 번 다시 없을 초대형 계약이니 당연했다.

어떤 식으로 계약을 진행하든 결과적으로는 만족하지 않을 수 없는 계약이기에 나로서는 그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황병익 대표와의 전화 통화를 마치고 나자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랜디 존슨이었다.

내가 세운 기록들에 대해서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8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LA 홈경기에 직관을 하겠다고 전해왔다. 당연히 경기가 끝나면 나와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생각이니 이틀 정도만 우리 집에서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다시 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클레이튼 커쇼였다.

-척! 축하해!

약간 흥분한 듯 한 커쇼의 음성이었다.

놀랍게도 커쇼는 현재 LA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순전히 나를 만나기 위해 LA에 온 거라면서 이번 워싱턴 원정 경기가 끝나고 LA로 돌아가면 꼭 만나자는 약속을 하곤 전화를 끊었다.

메이저리그의 살아있는 전설들이 나를 만나려고 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야구를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일은 상상도 못해봤었는데.”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과 함께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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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에 있었던 워싱턴 원정 4차전까지 마치고 LA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진수성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푸짐한 요리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대기록 달성 축하합니다. 달리 해드릴 건 없고, 맛있는 음식이라도 드시고 더욱 힘내서 앞으로도 지금처럼 꾸준한 활약으로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가 되길 바랍니다.”

주혜영이 내 기록들에 대한 축하의 의미로 차린 음식들이었다.

“오늘 배터지게 먹어보자! 흐흐흐!”

가장 신난 사람은 형수였고, 그날 저녁은 정말 소화제를 마셔야 할 정도로 과식을 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단장실로 향했다.

“차지혁 선수!”

업무를 보고 있던 맥브라이드 단장이 나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달려와 힘껏 포옹을 했다.

“제가 지금까지 다저스의 단장으로 있으면서 차지혁 선수를 영입한 건 일생일대의 최대 행운일 겁니다! 하하하!”

격한 환영 인사에 한 번 웃어주고는 자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예상은 했지만, 재계약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미 몇몇 언론을 통해서 대대적으로 기사화되었기 때문이다.

LA 다저스에서 종신 계약을 준비 중이다, 계약금만 몇 억 달러다, 연봉이 얼마다 등등 금액적인 부분에서는 틀린 부분이 다소 존재했지만, 계약 진행에 대한 기사는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덕분에 난리가 났다.

미국과 한국은 물론, 일본까지도 인터넷 세상에서는 내 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핫 키워드로 떠올라 있었다.

“다저스 구단의 입장은 확고합니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차지혁 선수를 타 구단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거죠. 알고 있겠지만, 현재 에이전트와 계약에 대한 협상 상황도 긍정적입니다.”

맥브라이드 단장의 말을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사소한 행동과 말 하나가 황병익 대표의 움직임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뚜렷한 긍정도, 부정도 보일 수가 없었다.

“계약 진행에 앞서 선수 본인의 의지를 단장으로서 확인하고 싶군요. 솔직하게 대답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차지혁 선수에게 LA 다저스는 어떤 의미입니까? 진심으로 후회 없이 선수 생활을 끝마칠 수 있는 구단이라 생각하고 있습니까?”

< 『해외편 - 178』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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