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77』 >
『해외편 - 177』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에서 LA 다저스의 구단주, 마크 앨런과 단 둘이서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워싱턴에서도 최고급이라 불리는 레스토랑이라 그런지 주변 손님들 모두 평범한 이들은 만나기조차 힘든 사람들뿐이었다.
“워싱턴에 올 때면 항상 오는 곳이네. 여기 음식이 내 입맛에는 잘 맞더군. 자네 입에는 어떤가? 먹을 만한가?”
“맛있습니다.”
대답은 짧았지만 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단어들은 굉장히 많았다.
단순히 맛있다는 말 자체가 음식에 대한 모욕일 정도로 대단했다.
‘내일이라도 부모님과 다시 와야겠어.’
스케줄 때문에 어제 급하게 떠난 안젤라를 생각하면 아쉬웠지만, 어쨌든 미국에 살고 있는 그녀와는 시간만 맞으면 얼마든지 올 수 있었기에 우선은 부모님을 모시고 LA로 떠나기 전에 꼭 다시 오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다.
“부족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더 시키도록 하게.”
“괜찮습니다.”
“아니지. 우리 다저스 구단의 위대한 투수인 자네가 지금처럼 좋은 경기력을 유지하려면 당연히 먹는 것부터 신경을 써야지. 내 앞이라고 체면 차릴 것 없네. 나도 자네 나이 때에는 정말 엄청 먹었으니까. 허허허!”
70살이 넘은 나이임에도 확실히 체격이 건장했다.
단순히 좋은 음식을 먹어서가 아니라 타고난 체격이 좋다는 뜻이고, 저런 좋은 체격을 지금까지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음식 섭취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 많을 수밖에 없었다.
끝내 마크 앨런 구단주는 지배인을 불러서 몇 가지의 음식을 더 시켰다.
“미안하군. 나만 혼자 이렇게 와인을 마셔서.”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마크 앨런 구단주가 마시고 있는 붉은 와인은 한 잔에 무려 800달러라고 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술이기에 저렇게 비싼 건지 의문이 생겼지만, 재벌의 입맛은 참 대단하구나 하고 말았다.
음식이 나올 때마다 나는 묵묵히 포크와 나이프만 움직였다.
그렇게 적당히 음식 섭취가 끝나자 마크 앨런 구단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선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군. 자네 덕분에 우리 다저스 구단의 위상이 무척이나 높아졌네. 전 세계적으로도 자네 덕택에 많은 홍보가 되고 말이야. 허허허!”
무척이나 기쁘다는 듯 마크 앨런 구단주는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에게 그 보답을 해야 할 것 같더군.”
“이미 충분한 연봉과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자네가 이번에 새롭게 세운 기록들이 어디 보통 기록들인가? 무려 40년 만의 기록이야. 더욱이 LA 다저스의 투수가 세웠던 기록을 다시 LA 다저스의 투수가 갱신했으니 구단주로서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네는 이미 연봉 이상의 활약을 해주고 있으니 이번 기록에 대한 보상이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알아보니 자네는 특별한 취미 활동도 없고, 다른 선수들처럼 특별히 좋아하거나 수집하는 것도 없는 것 같아서 고민 끝에 집을 하나 지어줄까 하는데 어떤가?”
“예?”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집이라니.
마크 앨런 구단주와 같은 재벌이 지어준다는 집이면 그 규모가 벌써부터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왜 집일까?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순간, 황병익 대표가 했던 말들과 연관이 지어졌다.
‘LA를 떠나지 말라는 의도인가?’
괜찮은 집을 사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짓는다?
LA에 정착을 하라는 뜻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자네에게 선물로 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의미가 없어 보이더군. 그래서 이왕이면 구장 인근으로 자네에게 딱 맞는 집을 하나 짓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네. 몇몇 건축가들을 자네에게 보내 줄 테니 그들을 통해서 외관부터 내부까지 모두 자네의 마음에 들도록 집을 짓게나.”
“제안은 고맙습니다만,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지금 집에서 머물 수 있도록 구단에서 배려해준 것만 하더라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니야. 자네는 우리 다저스 구단의 전설이 될지도 모르는 투수인데 그 정도는 당연하지. 미리 해두는 말이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집을 팔아야 할 때가 오거든 시세보다 더 얹어서 구단 측에서 사들이겠네. 기념관으로 꾸며놓으면 참 좋을 것 같지 않은가? 허허허!”
이미 집을 지어주기로 확실하게 마음을 굳힌 마크 앨런 구단주였기에 어떤 말을 하더라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구단주의 호의를 거절하면 대놓고 다저스를 떠나겠다는 의도로밖에 비춰지지 않을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받아 들여야만 했다.
이후,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내용들은 큰 의미가 없었다.
팀 생활이나, 구장에 대한 불만, 구단에 대한 아쉬움 등부터 시작해서 7월에 있을 IBAF 챔피언스 리그에 대한 기대, 8월에 있을 올림픽 출전에 대한 이야기 등등 크게 기억에 남겨둬야 할 말은 없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가볍게 디저트를 먹을 때가 되어서야 마크 앨런 구단주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작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기억하고 있다.
‘자네가 정말 세계 최고의 투수가 된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약속을 하지. 자네가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 절대 부족함이 없는 세계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네.’
아직 이른 판단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많은 전문가들과 팬들은 나를 메이저리그 넘버원 투수라고 부르고 있기도 했다.
경력이 짧기는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성적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으니 반박을 하기 힘든 건 사실이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때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할 것 같네.”
마크 앨런 구단주의 얼굴엔 희미한 웃음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의 웃음인지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었지만, 꽤나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마크 앨런 구단주가 어떠한 제안을 하더라도 차지혁 선수는 우선 한 발 뒤로 물러나면 됩니다.’
황병익 대표가 오늘 아침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놀랄만한 조건을 내건다 하더라도 협상은 에이전트인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던 말.
그 다짐을 갖고 마크 앨런 구단주의 말을 기다렸다.
“나는 자네를 그 어떤 구단에도 보내고 싶지 않네. 그래서 감히 자네를 넘볼 수도 없게끔 만들기로 했지. 한 번 보고 판단해보게.”
마크 앨런 구단주는 레스토랑 지배인이 디저트와 함께 가지고 온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서류의 내용을 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내 계약 문제는 황병익 대표에게 모두 일임했으니 굳이 내가 여기서 서류를 볼 이유가 있나 싶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마크 앨런 구단주가 넌지시 말했다.
“궁금하지 않나? 구단과의 계약 협상은 에이전시에서 담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궁금증은 풀어야 하질 않겠나? 나 역시 이 자리에서 자네에게 어떤 확답을 받고자 하는 마음은 없으니 우선 조건이나 한 번 보도록 하게.”
궁금하긴 했다.
과연 마크 앨런 구단주가 직접 내린 나에 대한 가치 평가가 얼마나 되는지.
천천히 서류 파일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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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와 부모님과 황병익 대표를 만났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제안을 했는지 궁금해 하는 것들에 대해서 모두 설명을 해드렸다.
특히, 집을 지어주기로 했다는 말에는 모두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집은 확실히 예상하지 못했던 보상이군요.”
황병익 대표도 구단주의 통 큰 선물에 혀를 내둘렀다.
어느 정도의 규모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순 없어도 다저 스타디움 인근에 집을 짓겠다는 건 최소 수백만 달러의 지출을 예상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폭탄은 이제 시작이다.
“황 대표님 말씀처럼 구단주가 직접 계약 조건 변경을 제의했습니다.”
“혹시, 승낙하셨습니까?”
황병익 대표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내 대답에 그제야 황병익 대표의 얼굴 표정이 가볍게 풀렸다.
“어떤 식으로 계약 조건을 변경하고자 하던가요?”
“우선 계약 기간 설정을 종신으로 하고자 했습니다.”
“예?”
종신 계약.
말 그대로 선수 생활을 LA 다저스에서만 해달라는 말이다.
황병익 대표는 대충 10년에서 15년 정도를 예상했기에 내 말에 놀란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물론, 10년에서 15년만 하더라도 내 선수 생활의 전성기를 모두 쏟아 붓는 거지만 종신 계약과는 분명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 확연하게 달랐다.
하지만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계약금으로 5억 달러를 주겠다고 합니다.”
“예에?”
얼마나 놀랐는지 황병익 대표가 벌떡 일어나며 두 눈을 부릅떴다.
“초상권 수익 배분 비율은 기존 45%에서 75%까지 늘려주겠다고 했습니다.”
“허!”
초상권 수익 배분 비율이 구단과 선수 간에 얼마나 민감한 사안인지 잘 알고 있는 황병익 대표였기에 그의 놀람은 당연했다.
75%의 비율을 선수가 가져간다는 건 엄청난 조건이다.
그 어떤 슈퍼스타라 하더라도 가져갈 수 없는 비율이라고 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쯤되면 이제 연봉이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연봉은… 얼마를 주겠다고 했습니까?”
물음을 건네 오는 황병익 대표의 음성이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봉은 매년 3천만 달러에다가 옵션을 대량 삽입한 조건이었습니다.”
생각 외로 적다 느꼈는지 황병익 대표가 살짝 실망한 표정을 드러냈다.
확실히 연봉만 놓고 보면 적다 느낄 수 있지만, 계약금 5억 달러까지 더하면 10년만 LA 다저스에서 선수 생활을 해도 무려 8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셈이다.
과연 어느 누가 적다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옵션 조건이 따로 있었다.
“출장 수당으로 10만 달러, 승리 수당으로 30만 달러의 기본 옵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 추가 수당제라는 겁니까?”
아직까지 야구계에서는 축구계처럼 수당제가 도입되어 있질 않았기에 황병익 대표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예. 매년 3천만 달러는 기본 연봉이라서 제가 부상을 당한다 하더라도 매년 보장되는 금액입니다.”
“아!”
보장 금액이 3천만 달러다.
이건 의미하는 바가 무척이나 클 수밖에 없다.
야구 선수들은 부상을 당하면 1, 2주는 가볍게 넘기는데 부상 기간이 길어지거나, 자주 부상을 당해서 경기에 출장하는 빈도가 줄어들면 당연히 연봉이 삭감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아무리 고연봉을 받는다 하더라도 부상으로 한 시즌을 통째로 날리거나 하면 실질적으로 수령하는 연봉은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보장 금액 3천만 달러는 엄청난 액수라 부를 수 있었다.
여기에다 매년 사이영상, MVP를 수상하면 보너스로 500만 달러, 올스타에 선정되면 100만 달러를 추가로 지급 받는다. 작년 같은 경우라면 무려 이것만으로도 1100만 달러를 받게 되는 셈이다.
그 외 세부적으로 이닝 보너스, 평균 자책점 보너스 등까지 더하면 작년과 같은 경우 계약 내용대로라면 무려 5060만 달러의 돈을 다저스로부터 받을 수 있게 된다.
매년 변동폭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작년과 같은 성적을 꾸준히 유지하기만 한다면 매년 5천만 달러를 받는 첫 메이저리거가 되는 셈이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황병익 대표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지금까지 이런 형식의 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어서 좀 낯설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하지만 분명 엄청난 계약 조건인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우선 종신 계약이라는 점이 확실히 큰 단점으로 남아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당연히 좋은 계약 조건이지만, 앞으로 10년 후에는 지금의 계약 조건이 좋다고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순 없습니다.”
맞는 말이다.
10년 전 물가와 지금의 물가가 큰 차이가 나듯이 지금 계약 조건 역시 10년 후에도 좋다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구단주의 의중을 알았으니 협상은 더 쉬워질 겁니다.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으니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무척이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 그런데 바이아웃 조항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습니까?”
황병익 대표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내 웃음에 황병익 대표는 물론, 옆에 앉아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모두 왜 웃냐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구단주가 에이전트를 만나거든 이렇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다른 계약 조건은 모두 변경을 할 수 있지만 바이아웃 금액만큼은 절대 변경 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도대체 금액이 얼마기에 그렇게까지 말을 한 겁니까?”
궁금해 하는 황병익 대표의 얼굴을 보며 나는 다시 마크 앨런 구단주가 건네줬던 서류의 한 부분을 떠올렸다.
바이아웃 : $ 10,000M.
< 『해외편 - 17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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