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76화 (176/221)

< 『해외편 - 176』 >

『해외편 - 176』

“정말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내 물음에 게레로 감독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구단주님 특별 지시사항이니 걱정하지 말고 먼저 이동하도록 하게. 팀 동료들도 이 정도는 충분히 이해를 해줄 수 있는 문제고, 자네 마음이 불편하다면 휴식일에 팀 동료들에게 거하게 식사를 대접하면 되질 않겠나?”

“하지만.”

게레로 감독이 내 말을 가로 막았다.

“사실 자네가 남은 일정 동안 함께 움직이면 팀 동료들에게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거네.”

나를 취재하기 위한 기자들과 방송국 사람들을 생각하면 확실히 게레로 감독의 말이 옳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워싱턴에서 뵙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게레로 감독이 활짝 웃는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 덕분에 내 감독 생활이 무척이나 뜻 깊어서 고맙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었네. 고맙네.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좋은 인연으로 오랫동안 야구를 했으면 하네. 이건 내 진심이네. 사실, 자네처럼 무서운 투수를 상대편으로 만나고 싶지가 않거든. 하하하하!”

게레로 감독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나 역시 마주 웃었다.

오늘 인터뷰실에서도 게레로 감독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나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옆에서 듣는 내가 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과한 칭찬이었지만, 그것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게레로 감독에 대한 고마움도 커졌다.

자고로 선수는 감독과 불화가 있어서는 안 된다.

메이저리그의 경우 소위 슈퍼스타들은 감독의 말을 무시하는 경향이 종종 있었지만, 그런 행동이 좋은 방향으로 가는 일은 드물었다.

어쨌든 감독은 팀을 이끌어가는 사령관이다.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 하더라도 사령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행동하면 결국은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게레로 감독과의 돈독한 사이는 내게 있어서도 커다란 플러스 요인이 되고 있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배웅은 하지 않겠네.”

게레로 감독과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구단 직원의 차를 탔다.

오늘은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원정 3연전 중 1차전 경기였다.

내일과 내일모레 2번의 경기가 남아 있었지만, 나는 구단주와 감독의 배려로 먼저 워싱턴으로 향하기로 했다.

구단주의 특별 조치였고, 나 한 사람을 태우고 가기 위해 구단 전용기가 공항에서 대기 중이라고 했다.

당연히 워싱턴에서 구단주와의 약속 또한 잡혀 있었다.

형수는 특별 보너스를 받는 게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전용기에 올랐다.

펑펑펑! 펑펑펑!

비행기에 탑승하니 놀랍게도 폭죽이 터지며 날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지혁아, 축하한다!”

“아들! 너무 자랑스럽다!”

“척! 오늘 당신은 정말 최고로 멋있었어요!”

“차지혁 선수! 메이저리그의 역사에 남을 대기록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안젤라, 황병익 대표까지 모두 날 축하해주기 위해 모여 있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구단주와의 단독 전화, 인터뷰 등이 급하게 이뤄지는 바람에 정작 가장 보고 싶은 부모님과 안젤라를 만나지 못해 아쉬움이 컸고, 급한 일을 마치고 부모님과 안젤라를 만나려고 했더니 벌써 구단의 배려로 공항으로 떠났다고 했었다.

“오늘 경기 정말 고생했다. 네가 대기록을 세운 것도,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진 것도 모두 자랑스럽고 기특하지만, 언제나처럼 마운드 위에서 흔들리지 않고 네가 던질 수 있는 공을 자신 있게 던진 모습이 아버지로선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오늘처럼만 경기에 임하면 더 이상 아버지는 널 걱정할 일이 없을 것 같다. 장하다! 아들!”

아버지가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돌발 행동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적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내 나이가 한 살씩 늘어갈 때마다 아버지는 나에게만큼은 애정표현을 꺼리셨다. 아직까지도 지아와는 포옹도 하고 가끔 볼에 뽀뽀도 받거나, 해주시며 다정한 부녀 사이를 자랑했지만, 아들인 나와는 그저 남자 대 남자의 관계로만 대해주셨기에 지금처럼 포옹을 받은 게 언제인지 곧바로 기억도 나질 않았다.

‘그때는 아버지의 품이 무척이나 단단했었는데.’

아버지와의 포옹은 중학교 1학년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버지의 품은 단단했고 넓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오늘 아버지의 품은 한 없이 작고도 여리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작은 몸으로 나와 지아, 그리고 어머니의 든든한 기둥으로 우리 가족을 이끄셨다고 생각하니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저도… 없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아버지.”

말을 하는 와중에 감정이 울컥 치솟아 눈물이 차올랐다.

안젤라와 황병익 대표가 보고 있다는 사실에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끝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말았다.

“…녀석. 다 큰 녀석이 울기는.”

내 등을 다독여주시는 아버지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고, 아버지 역시 음성이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러고 계속 있다가는 아이처럼 울 것 만 같았기에 재빨리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아버지의 품을 벗어난 것이 독이 될 줄은 몰랐다.

나와 아버지의 모습에 벌써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던 어머니가 나를 안으며 소리 내어 울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아들들은 어머니의 눈물에 덩달아 눈물을 흘린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나 역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고, 결국은 어머니와 함께 부둥켜안고 울고 말았다.

한참을 울고 나니 내 모습이 얼마나 꼴사납게 보였을까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은 시원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어머니의 품을 오랜 시간 독차지 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안젤라와 황병익 대표를 봤지만.

“내일 아침에 척의 눈이 두 배쯤은 커지겠는데요? 후훗!”

“다이아멘탈의 에이스가 이렇게 어린 아이처럼 울었다고 말하면 믿을 사람 없을 거라 생각하니 괜히 억울한 생각이 듭니다. 하하하!”

안젤라와 황병익 대표의 말에 내 얼굴엔 어색한 미소만 맴돌았다.

“자자, 이제는 축배를 들어야 하질 않겠습니까?”

황병익 대표가 샴페인을 들었다.

비행기 내부에는 조촐하지만 먹음직스러운 음식들과 음료와 술이 상당히 잘 구비되어 있었다.

시즌 중에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 원칙으로 인해 나만 홀로 음료를 마셔야 했고, 부모님과 안젤라, 황병익 대표는 샴페인을 마시며 즐거운 파티를 시작했다.

“하늘 위에서 파티라~ 이사장님, 제가 아드님 덕분에 이런 호화스러운 파티를 즐기게 되어 정말이지 인생 한 번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 같습니다.”

차앤울 재단 이사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아버지였다.

“황 대표님께서 물심양면으로 우리 지혁이를 잘 지원해주셨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날이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황 대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우리 지혁이가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지금처럼 잘 서포트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건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저야 말로 차지혁 선수와 함께 평생의 동반자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쪼록 부족한 부분이나, 혹시라도 서운하신 부분이 생긴다면 그때그때 제게 말씀을 해주셔서 더 큰 오해나, 감정이 상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황병익 대표와 아버지는 샴페인을 함께 마시며 그렇게 대화를 나누셨다.

반면, 어머니와 안젤라는 내 눈을 의심하게끔 만들 정도로 친근하게 대화를 하며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어머니의 영어 실력이 유창하지는 않았기에 대화가 조금씩 끊기거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도 했지만, 안젤라가 어떻게든 잘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어머니 눈에는 꽤 예쁘게 보인 모양이었다.

“무슨 대화를 그렇게 재밌게 나누고 있어요?”

내 물음에 안젤라가 대답했다.

“아! 척! 이번 여름에 나 한국에 가기로 했어요.”

“한국이요?”

“여름에 올림픽이 한국에서 열리잖아요? 어머니와 지아가 저를 초대하셨어요. 어차피 척도 올림픽 대표팀으로 한국에 가야 하니까 이번 기회에 함께 한국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지아요? 안젤라가 지아를 어떻게 알아요?”

“아까 공항에 오면서 어머니를 통해서 당신의 동생인 지아와 통화를 했어요.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 어떻게 척과 지아는 그렇게 성격이 달라요? 처음에 나 깜짝 놀랐잖아요.”

내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어머니가 대충 설명을 해주었다.

한국에서 내 경기를 중계로 보고 난 이후, 지아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는 거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경기 내내 TV 중계 카메라가 부모님과 안젤라의 모습을 자주 담았기에 그 모습을 본 지아가 안젤라에 대해 물었고, 어머니는 직접 통화를 해보라며 전화를 넘겼다는 거다.

사실상, 내게 있어 가장 부담스러운 존재가 바로 지아다.

부모님이야 내가 어떤 여자를 만나든 우선적으로 믿고 긍정적으로 바라봐주실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지아는 예전부터 온갖 잔소리를 해대고 있었기에 솔직히 안젤라와 지아의 만남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 꽤 고민도 했었다.

그런 내 고민이 민망할 정도로 지아와 안젤라는 무척이나 즐겁게 통화를 나눴고, 안젤라에게 한국에 놀러오라고 먼저 제의한 것도 지아라고 했다.

“스케줄 괜찮겠어요?”

혹시라도 무리해서 한국에 가겠다고 한 말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들었다.

“스케줄이야 조정을 하면 되요.”

안젤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했고, 다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자들의 수다에 남자가 끼어들 틈은 없다는 말처럼 나는 두 여자의 곁을 맴돌다 슬그머니 아버지와 황병익 대표에게로 다가갔다.

“보기 좋구나.”

아버지는 어머니와 안젤라가 서로 웃으며 말을 나누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으셨다.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어떠세요?”

“안젤라 말이냐?”

“예.”

“예쁘고 착한 아가씨인 것 같더구나. 남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이지.”

“예?”

당황하는 내 모습이 재밌다는 듯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이왕이면 운동 선수인 네 뒷바라지를 열심히 해줄 수 있는 여자와 만났으면 했지만, 그건 구시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나 네 엄마의 생각일 뿐이고. 저렇게 예쁘고 착한 아가씨라면 좋은 감정으로 예쁘게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넌 괜찮은 거냐? 너도 바쁜데, 상대방까지 바쁘면 아무래도 길게 연애를 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젤라가 제 일을 존중하듯이 저 역시 안젤라의 일을 존중하려고요. 우선은 그런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해요.”

“그래. 그럼 됐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조심하고. 흠흠.”

조심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차지혁 선수가 어디 쉽게 실수할 사람은 아니질 않습니까? 하하하.”

황병익 대표가 그렇지 않냐며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분위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아서 재빨리 대화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모레 마크 앨런 구단주와 점심 약속이 잡혀 있는데, 황 대표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물음에 황병익 대표가 씨익 웃었다.

“몸이 달아올랐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물론, 아버지 역시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황병익 대표를 바라봤다.

“메이저리그 데뷔와 동시에 신인왕, 사이영상, 시즌 MVP를 거머쥔 차지혁 선수입니다. 더불어 최초로 한 시즌 3번이라는 퍼펙트 게임도 기록했죠. 언론에서 아무리 2년차 징크스가 온다 어쩐다 떠들어도 실질적으로 차지혁 선수가 리그 정상급의 선발 투수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차지혁 선수도 아시다시피 올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얼마나 많은 곳에서 이적 협상 제의를 해왔습니까? 말은 하지 않았어도 마크 앨런 구단주 입장에서는 속 꽤나 끓였을 겁니다. 하하하!”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린 황병익 대표는 잔에 남아 있던 샴페인을 깨끗하게 입안에 털어 넣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 경기를 지켜보고 마크 앨런 구단주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니, 다른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겠습니까?”

대답을 하지 않는 나를 대신해서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영입하고 싶다고 생각을 하질 않았겠습니까?”

“이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LA 다저스를 제외한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차지혁 선수를 반드시 자기네 구단으로 영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반대로 마크 앨런 구단주는 반드시 차지혁 선수를 타 구단에 빼앗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을 했겠죠. 그럼 마크 앨런 구단주가 차지혁 선수와 만나서 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가 뭐겠습니까?”

나와 아버지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은 있었지만, 설마하는 생각이 뒤따랐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답은 질문을 한 황병익 대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 예상대로라면 모레 차지혁 선수와의 점심 자리에서 새로운 계약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무척이나 클 겁니다.”

“하지만, 이제 고작 계약 2년 차일 뿐인데 계약 조건을 변경한다는 건 좀…….”

“계약 자체만 놓고 본다면 2년 차겠지만, 차지혁 선수는 우선 4시즌 이후, 선수 본인의 선택에 따른 옵트 아웃 조건이 걸려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실질적인 계약 기간은 7년이 아닌 4년, 그마저도 이제 2년 반 가량 남았다고 보면 됩니다. 작년 시즌 아시다시피 양대리그 최고의 선발 투수를 보유하고도 LA 다저스는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를 했습니다. 올해도 다르지 않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죠. 무엇보다도 차지혁 선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마크 앨런 구단주 입장에서는 매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하는 구단에서 계속 뛰어야 하나 선수 스스로 회의감이 들 수도 있다 여길 겁니다. 만약, 양키스와 같은 월드 시리즈 진출이 굉장히 유력한 구단에서 차지혁 선수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연봉을 제시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전 LA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굳이 다른 곳으로 갈 필요는 없습니다.”

단호한 내 대답에 황병익 대표가 가볍게 웃었다.

“차지혁 선수의 생각은 그렇지만, 마크 앨런 구단주의 생각은 다를 겁니다. 그는 차지혁 선수처럼 순수한 운동 선수가 아닌 사업가라서 그렇습니다. 무엇이 나에게 이득이 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더 큰 명예를 얻을 수 있을지 이리저리 따지면서 재다보면 결론은 간단하게 나옵니다. 그러니 마크 앨런 구단주 입장에서는 차지혁 선수를 잡을 수 있는 최고의 패를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황병익 대표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당사자인 내가 LA 다저스를 떠날 생각이 없는데 여기저기서 나를 두고 경쟁하니 우습기만 했다.

“차지혁 선수.”

황병익 대표가 짐짓 목소리를 낮게 깔며 나를 바라봤다.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은 테이블 위에 올려놨고, 살짝 붉어졌던 얼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만 보였다. 특히, 눈빛이 무척이나 매섭고도 또렷해서 마주보는 내가 위축이 들 정도였다.

“야구장 내에서 차지혁 선수는 스스로 최고의 공을 던지면서 자신의 가치를 온 세계에 증명해냈습니다. 차지혁 선수를 서포트 하는 에이전트로서 전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고 차지혁 선수에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황병익 대표가 잠깐 숨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야구장 밖, 테이블 위에서 메이저리그 구단 관계자들과의 일은 엄연한 비즈니스입니다. 비즈니스는 차지혁 선수의 생각만큼 깔끔하지도, 페어플레이 정신도 없습니다. 무척이나 지저분한 곳이고, 자칫 수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곳입니다. 그런 비즈니스를 대신하기 위해 제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차지혁 선수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경기장에서 보여주셨듯이, 이제부터 제가 테이블 위에서 차지혁 선수의 가치를 똑똑히 증명해내겠습니다.”

< 『해외편 - 176』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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