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75』 >
『해외편 - 175』
우레와도 같은 박수 소리.
9회 말, 마운드로 향하는 내게 쿠어스 필드를 가득 채운 모든 관중들이 한 몸이라도 된 듯 기립박수를 쳐주었다.
LA 다저스 원정 팬들은 물론, 콜로라도 로키스의 홈팬들까지도 아낌없는 박수 세례를 주었다.
9회 말.
퍼펙트나 노히트 게임은 이미 진즉에 물 건너갔음에도 관중들의 응원과 격려는 대단했다.
62이닝 연속 무실점.
8회 말까지도 나는 콜로라도 로키스 타자들을 상대로 단 1점도 실점을 하지 않았다.
기존 오렐 허샤이저의 59이닝의 기록을 훌쩍 넘어선 상태다.
이제는 매 이닝, 타자 한 명을 아웃시킬 때마다 새로운 기록으로 작성되고 있었다.
마운드에 올라서서 로진백을 손에 묻혔다.
살짝 체력적으로 부담이 느껴지기도 했다.
쿠어스 필드의 고지대 패널티는 확실히 같은 수의 투구를 한다 하더라도 타 구장에 비해 체력 소모가 높았다.
8회 말까지 던진 투구수는 97개.
타 구장이었다면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투구수였지만, 쿠어스 필드에서는 달랐다.
8회 말을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선 내게 게레로 감독은 9회 말 투수 교체를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체력 소모도 큰 편이고, 62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굳이 깰 필요가 없다 여겼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미 큰 점수차로 인해 승리가 확실해진 시점에서 굳이 내가 무리를 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평소였다면, 다른 때였다면 분명 게레로 감독의 말대로 교체를 받아들였을 거다.
그런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게레로 감독은 62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유지시키기 위해 교체를 제안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비겁하게 도망가는 꼴이 될 수도 있었기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해를 해줄 것이다.
그러나 극소수의 일부 사람들은 내가 기록을 의식해서 투수 교체를 했다는 말을 할 수도 있었다.
대단한 기록을 세우고도 괜한 뒷말이 나오면 내 입장에서도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기에 차라리 기록이 여기서 멈춘다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날 비난이나 비판을 할 수 없게끔 만들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쯤에서 기록이 멈춰진다 하더라도 아쉬움이나 미련도 없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타석을 바라보니 9회 말, 선두 타자로 투수 대신 대타로 타석에 들어서는 호세 파블로의 긴장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외야 백업 선수로 딱히 기억 속에 담아둬야 할 부분은 없었다.
짧게 사인을 주고받고 곧바로 초구를 던졌다.
쇄애애애액!
부웅!
퍼엉!
패스트볼을 노리고 들어온 호세 파블로는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체인지업에 헛스윙을 하고는 더욱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지고 난 이후, 그것이 얼마나 큰 자극이 되었던지,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들은 패스트볼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물론, 극복해야 할 과제로 자리를 잡은 듯 패스트볼을 노리고 스윙을 하는 빈도가 굉장히 높아져 있었다.
2구는 바깥쪽을 살짝 걸치고 들어가는 컷 패스트볼.
초구에 너무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유인구에 속았다 여겼던지 호세 파블로는 지켜보기만 했고, 그대로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으면서 2스트라이크 노볼이 되고 말았다.
볼 카운트가 완전히 궁지에 몰리자 호세 파블로의 표정이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
몸 쪽으로 바짝 붙이는 패스트볼을 요구하는 형수의 사인을 거부하고는 스트라이크 존을 크게 벗어나는 낮은 코스의 12to6커브 사인을 보냈다.
루상에 주자도 없고, 볼 카운트도 여유가 넘쳤기에 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경기에서 딱 3번 던진 공이다.
확실히 커브의 낙폭이 줄어들어 있었지만, 어설프게 스트라이크를 잡겠다고 던지지 않으면 상관없었다.
무엇보다 현재 호세 파블로의 얼어붙은 모습이 12to6커브만큼 효과적인 유인구가 없어 보였다.
천천히 와인드업을 하고는 공을 던졌다.
‘걸렸다.’
공을 던지고 난 직후 호세 파블로의 하체가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부우우웅!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12to6커브에 호세 파블로는 꼴사나울 정도의 헛스윙을 하고 난 후에야 고개를 떨군 상태로 힘없이 돌아섰다.
62.1이닝 연속 무실점.
완봉승까지 남은 아웃 카운트는 2개.
1번 타자부터 다시 시작되는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이었다.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는 사토시 준.
오늘 경기 첫 타선부터 기습 번트를 성공시키며 내 기록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던 사토시 준이다.
엄청나게 부담이 컸을 작전이다.
대기록이 걸린 경기에서 시작부터 기습 번트를 댄다는 건 미국 메이저리그의 성격상 팬들의 큰 질타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공해도 비난을 받을 수 있고, 실패를 한다면 더 큰 조롱거리가 될 일을 사토시 준은 감행한 거다.
이후 타석에는 기습 번트 작전을 쓰지 않았고, 언제나처럼 삼진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타격 자세를 잡고 선 사토시 준의 모습에 형수와 내야수들은 바짝 긴장했다.
1회를 제외하곤 이후 두 번의 타석에서 연속 삼진을 당한 사토시 준이 악에 받쳐서 다시 한 번 기습 번트를 해올지도 몰랐다.
나 역시 기습 번트를 염두에 두고 초구를 던졌다.
몸 쪽으로 바짝 붙이는 포심 패스트볼이었고, 사토시 준은 건드려봐야 좋을 것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바라보기만 했다.
“스트라이크!”
두 번째 공 역시 몸 쪽으로 파고 들어가는 컷 패스트볼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몸 쪽 공이었기에 볼 판정을 받았지만, 연속으로 몸 쪽을 공략하는 내 투구에 사토시 준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3구도 몸 쪽을 노리고 던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몸 쪽으로 바짝 붙다가 살짝 휘어져서 스트라이크 존을 관통하는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당연히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고, 3구 연속 위협적인 몸 쪽 투구에 사토시 준은 날 죽이기라도 할 듯 노려보고 있었다.
‘몸 쪽에서 끝낸다.’
와인드업을 하고 오늘 경기에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라이징 패스트볼을 꽂아 넣었다.
쐐애애애애애액.
부웅!
퍼어어엉!
몸 쪽에서 가라앉지 않는 패스트볼을 과연 어떤 타자가 칠 수 있을까?
사토시 준은 3연속 삼진이라는 치욕스러운 성적표를 받아들고 타석에서 물러났다.
‘왠지 기분이… 좋은데.’
콜로라도 로키스 더그아웃으로 걸어가는 사토시 준을 바라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진 기분으로 오늘 경기 마지막 타자가 될 수도 있는 도미닉 리스를 바라봤다.
따지고 보면 퍼펙트 게임도 아니고, 노히트 게임도 아님에도 콜로라도 로키스 타자들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긴장과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이 자존심도 상하고, 분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까지 꾸준히 점수를 내지 못했던 다른 선수들을 생각하면 저렇게까지 부담감을 느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어쩌면 투수인 내가 평생 이해하지 못할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왕지사 여기까지 왔는데 깨끗하게 마무리는 해야겠지.’
남아 있는 체력을 도미닉 리스에게 모두 쏟아부었다.
그 결과.
부우- 웅!
“스윙! 타자 아웃!”
허공에 배트를 휘두르는 도미닉 리스.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과도한 리액션을 보여주는 주심.
미트에 박힌 공을 꺼내들며 마운드로 달려오는 형수.
외야 먼 곳에서, 내야 가까운 곳에서, 더그아웃에서 모두 달려 나오는 동료 선수들과 감독 이하 코치들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쿠어스 필드를 진동시키는 관중들의 환호성과 박수소리.
‘해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커다란 성취감이 내 가슴 속에서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왔다.
깨져도 그만이라 여겼던 기록이었기에 이런 내 감정이 크게 당황스러웠지만, 어느새 내 몸은 양팔을 하늘 위로 크게 치켜 올리고 있었고, 내 입에서는 지금껏 들어본 적 없었던 커다란 기합이 내질러지고 있었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아-!”
@
경기가 끝나고 인터뷰가 시작됐다.
경기 직후 그라운드에서 이뤄지는 단순한 수훈 선수 인터뷰가 아니었다.
콜로라도 로키스 구단 측에서 제공한 정식 인터뷰실에서 대대적인 인터뷰가 시작됐다.
타 구단 선수였지만, 메이저리그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전설적인 기록을 달성한 선수이니 콜로라도 로키스 구단에서도 협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300명은 너끈히 수용할 수 있는 인터뷰실이 꽉 찼다.
미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등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방송관계자들은 물론, 세계적인 언론사부터 소규모의 작은 지역 언론사와 인터넷 언론, 야구계의 관계자와 전문가들까지 모두 모여들었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서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차지혁이 인터뷰실로 들어서자 곧바로 번쩍거리는 카메라 플래쉬가 초단위로 수십 번씩 터졌다.
몇몇 방송사들은 실시간으로 인터뷰를 실황 중계하기도 했고, 인터넷 전문 방송국 역시도 지금의 모습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이곳저곳에서 관련 관계자들이 모여들어 있었지만, 인터뷰는 사전에 약속된 언론사와 몇몇 전문가들만이 가능했다.
인터뷰의 시작은 당연히 대기록 달성에 대한 소감부터 시작됐다.
차지혁은 경기장에서 포효를 내질렀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차분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동료 선수들에 대한 고마움, 곁에 앉아 있는 게레로 감독에 대한 감사, 자신을 믿고 응원해준 야구팬들과 가족, 여자 친구에 대한 언급까지 경기 직후 이뤄진 인터뷰였기에 미리 질문과 답을 맞춰볼 시간이 없었음에도 제법 깔끔하고 조리 있게 말을 했다.
대기록에 대한 인터뷰가 끝나자 아직까지도 인터넷과 TV 방송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화제의 구종, 라이징 패스트볼에 대한 언급이 시작됐다.
-오늘 경기에서 던진 구종이 정말 라이징 패스트볼이 맞습니까?
이 한 마디의 질문에 등장과 동시에 쉬지 않고 터지던 카메라 플래쉬도 잠잠해졌다.
적막감이 흘렀다.
인간이 던질 수 없다 여겨졌던 환상의 구종, 라이징 패스트볼이 맞는가?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고 차지혁의 대답을 기다렸다.
“모든 분들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라이징 패스트볼이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차지혁의 대답에 침묵이 혼란으로, 혼란은 곧 소란스러움으로 변했다.
약속되어 있던 언론사 기자와 전문가들이 아닌 인터뷰실에 모여든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차지혁의 대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급기야 인터뷰 진행을 맡은 사회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소란스러워진 사람들을 진정시켰고, 소란이 잦아들길 기다렸다는 듯 차지혁이 설명을 시작했다.
차지혁의 설명은 모두의 혼란스러운 머릿속과 다르게 간단했고, 명쾌했다.
한 줄로 요약하면, 착시 효과에 의한 패스트볼.
즉, 미완성의 라이징 패스트볼이라는 의미에 인터뷰실에 모인 절반의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일부는 그렇다 하더라도 라이징 패스트볼이 아니냐고 떠들었고, 극소수는 언제고 완벽한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질 수 있지 않겠냐는 희망을 드러냈다.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든 차지혁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전달했고, 더 이상의 논란을 끌어낼만한 말이나 행동을 자제하며 라이징 패스트볼에 대한 언급을 마쳤다.
사람들의 관심은 라이징 패스트볼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차지혁 스스로 언급을 자제하니 점점 인터뷰 내용이 겉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려 1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인터뷰가 이어졌다.
언제나처럼 언론과의 인터뷰에 있어서만큼은 적당하게 거리를 둔 차지혁으로 인해 언론사 관계자들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조금 더 자극적이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말이나 태도가 있었다면 좋겠지만, 차지혁에게 그런 걸 바라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인터뷰가 끝나고 차지혁은 인터뷰실을 빠져나갔다.
그 시간부터 TV 방송과 인터넷에서는 라이징 패스트볼, 차지혁, 메이저리그 신기록이라는 세 가지의 키워드가 온 세상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 『해외편 - 17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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