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74화 (174/221)

< 『해외편 - 174』 >

『해외편 - 174』

날아오는 공을 바라보는 존 킹슬리의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였다.

‘왔군!’

공의 스피드가 알려주고 있다.

이건 100퍼센트 포심 패스트볼이라고.

차지혁의 포심 패스트볼이라면 이미 수천 번도 더 비디오 분석을 했고, 선발이 예고된 당일 아침부터 점심까지는 오직 거기에 맞는 스윙 훈련만 했다.

타자의 타격은 일정부분 재능, 흔하게들 말하는 감각이라는 게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감각에는 분명 한계라는 게 존재한다.

진짜 제대로 된 타격은 오로지 훈련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고 굳게 믿고 있는 존 킹슬리였기에 항상 정상급 투수들을 상대하기 전에는 철저하게 비디오 분석을 한 이후, 경기 직전까지 스윙 궤적을 몸에 맞춰놓는다.

차지혁의 포심 패스트볼은 빠르고 강하다.

구위가 대단하다.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모든 투수들 가운데 최고 레벨이라고 불러도 좋다.

빠르면서도 묵직한 공은 웬만한 힘을 갖추지 못하고서는 결코 배트로 밀어낼 수가 없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천부적인 타격 감각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워가 부족해서 차지혁의 구위를 이겨내지 못하는 사토시 준의 상대 전적이다.

‘사토시 준과 나는 다르다!’

차지혁의 구위가 대단하지만 충분히 밀어낼 수 있는 파워를 가지고 있다 자부하는 존 킹슬리는 이번 공으로 모든 것을 증명할 작정이었다.

투수를 철저하게 분석해서 거기에 맞추는 스윙 훈련과 구위를 이겨낼 수 있는 파워를 가진 타자는 제 아무리 대단한 투수라 하더라도 결코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하체의 회전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배트가 나왔다.

부드러운 회전력을 아주 강력한 파괴력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게 메이저리그 정상급 타자다.

존 킹슬리는 공을 끝까지 바라보며 배트를 휘둘렀다.

미안한 말이지만, 연속 이닝 대기록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기대는 여기서 끝낸다.

존 킹슬리의 입가엔 승자의 미소가 맴돌았다.

손목에 힘을 담아 공을 덮는다, 마지막 팔로우 스윙까지 깔끔하게 마치면 타구는 그렇지 않아도 타자의 비거리를 늘려주는 쿠어스 필드였기에 단숨에 펜스를 넘기고 말 것이다.

‘넘긴… 뭐야?’

퍼어어어어엉!

미트가 터져버린 것 아닌가 싶을 정도의 강렬한 파열음이 존 킹슬리의 고막을 때렸다.

그리고 뒤이어.

부우우웅!

배트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차지혁이 던지는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에 맞춰서 배트를 빠르게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도 훨씬 빠른 타이밍에 공이 포수 미트에 박혀버렸다.

“주심.”

포수의 작은 외침에 그제야 뭔가에 홀린 듯 멍하니 서 있던 주심이 다급하게 외쳤다.

“스트라, 스윙! 타자 아아아- 웃!”

-우와아아아아아아!

관중석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함성이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형수는 미트에 박힌 공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너무 완벽했다.

타자를 삼진으로 잡으면 투수뿐만 아니라 포수 역시도 적지 않은 희열을 느낀다.

지금이 딱 그랬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희열이 전광판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105MPH

“마, 말도 안 돼…….”

전광판에 찍혀 있는 숫자가 거짓말처럼 보였다.

아무리 쿠어스 필드라는 구속 보정을 받았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105마일, 169km의 공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하나, 둘 관중들도 전광판에 찍힌 구속을 확인하고는 놀란 탄성을 뱉어냈다.

“미, 미친 괴물 새끼…….”

형수는 진심으로 자신의 친구인 차지혁이 같은 인간으로 보이질 않았다.

@

TV를 통해 중계를 보던 랜디 존슨은 입꼬리를 한껏 치켜 올렸다.

“결국은 해냈군.”

분명했다.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라면 누구나 꿈에라도 던져보길 원하는 바로 그 구종.

라이징 패스트볼이 분명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인간이 던질 수 없는 불가능한 구종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눈은 카메라가 아니다.

얼마든지 착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더욱이 항상 스윙 궤적을 체크하며 배트를 휘두르는 타자들이라면 방금 차지혁이 던진 공이 어떤 공인지 똑똑하게 느낄 것이다.

떠오르는 공.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혀진 공이지만, 직접 스윙을 한 타자에게는 귀신에 홀리기라도 할 거다.

중계진에서도 난리가 났다.

처음에는 캐스터와 해설자들이 105마일의 구속에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어진 리플레이 화면에서 공의 궤적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구속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공의 궤적이 중요해졌다.

흥분한 캐스터와 해설자들이 연신 라이징 패스트볼이라는 단어를 언급했고, 이례적으로 방송국에서도 몇 번이나 차지혁이 던졌던 공을 리플레이 시켜주며 공의 궤적을 실시간으로 선까지 그리고 있었다.

방송국 카메라로 찍은 초고속 슬로우 화면에 공은 절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까지 던졌던 차지혁의 패스트볼들과 곧바로 비교를 하며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궤적을 체크하니 확실히 높낮이가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었다.

해설자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라이징 패스트볼이라며 연신 흥분한 음성으로 떠들어댔고, 캐스터 역시도 맞장구를 쳐댔다.

정확하게는 반쪽짜리 라이징 패스트볼이라고 불러야 옳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이제 차지혁은 또 하나의 엄청난 무기를 손에 넣은 셈이다.

“네 녀석의 진화는 도대체 어디가 끝일지… 무척이나 기대가 되는군. 하하하하!”

아주 오랜만에 진심으로 기쁜 웃음을 터트리는 랜디 존슨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전설이 차지혁의 중계 방송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세상에나, 척이 저렇게까지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였어요?”

엘렌의 물음에도 커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두 눈만 깜빡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중계진에서 계속해서 라이징 패스트볼이라고 흥분해서 외쳐대니 엘렌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당신이 보기에도 방금 척이 던졌던 공이 라이징 패스트볼처럼 보였나요?”

야구선수의 아내로 십 수 년을 살았고, 아직까지도 야구 선수의 아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는 엘렌이다.

웬만한 야구 지식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갖추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지식 속에 라이징 패스트볼은 불가능한 구종이었다.

“정말… 멋지군!”

한참 만에 커쇼가 벌떡 일어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커쇼의 눈에도 그건 분명 라이징 패스트볼이었다.

물론, 완벽하진 않았지만 분명 어떤 투수도 던질 수 없었던 가장 라이징 패스트볼에 가까운 공을 차지혁이 던졌다.

투수들에게는 꿈과 같은 구종이라 커쇼 역시 꿈을 꿔봤다.

결과적으로 커쇼는 강속구 투수가 아니었기에 일찌감치 미련을 버렸었다.

실질적으로 100마일을 우습게 던지는 투수라 하더라도 결코 던질 수 없는 공이라는 걸 알기에 그저 환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그런 공으로 여겼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어느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라이징 패스트볼을 차지혁이 쿠어스 필드에서 던졌다.

“…쿠어스 필드에서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진다고?”

생각해보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쿠어스 필드에서 패스트볼 구속이 더 나오는 건 사실이고, 라이징 패스트볼은 구속과 무척이나 관계가 깊은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라이징 패스트볼은 구속과 더불어 공의 회전력과도 연관이 깊다.

이론적으로 공의 회전력을 많이 받질 못하면 절대 던질 수 없는 공이 라이징 패스트볼이다.

많은 사람들의 착각 중 하나가 쿠어스 필드에서 강속구 투수가 유리할 거라 생각하는 점이다.

공의 구속이 평소보다 더 나오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이 세상의 모든 구종 가운데 가장 많은 회전수를 가진 공이 바로 패스트볼이다.

그런데 패스트볼이 평소보다 회전력이 덜 먹는다면 어떻게 될까?

기존의 무브먼트가 변한다.

거기에 구속까지 내 의도보다 높아진다면?

자연스럽게 제구력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커쇼 자신이 그랬다.

패스트볼이 무척이나 좋았던 시즌에는 쿠어스 필드에서 오히려 고생을 했고, 슬라이더의 위력이 최고조로 올랐던 시즌에는 쿠어스 필드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물론, 모두 그런 건 아니다.

무브먼트가 변하고, 구속이 증가했음에도 제구력을 잘 잡는 투수들은 쿠어스 필드에서 항상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투수가 바로 콜로라도 로키스의 에이스 카터 노드윈드다.

밋밋한 무브먼트를 가진 패스트볼 때문에 쿠어스 필드만 벗어나면 오히려 평균자책점이 상승하는 투수다.

어떤 의미에서는 쿠어스 필드에 최적화가 된 투수라고 볼 수 있다.

‘적응력은 척도 대단하지.’

차지혁 역시도 강속구 투수였지만 쿠어스 필드에서의 성적은 무척이나 좋다.

자신의 공을 완벽하게 컨트롤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오히려 카터 노드윈드보다 쿠어스 필드에서의 성적이 훨씬 더 좋다.

상대적으로 비교 기간이 짧다는 게 흠이지만, 분명 차지혁의 쿠어스 필드 적응력은 메이저리그 양대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들 가운데 최고라 부를 만했다.

‘정말 대단하군. 어떻게 쿠어스 필드에서 저런 멋진 공을 던질 수 있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도 정말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질 수 있게 된 건가?’

커쇼는 마운드 위에서 로진백을 주무르고 있는 차지혁의 모습이 굉장히 멋있게 보였다.

투수라면 누구나 꿈을 꾸는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지다니.

순간적으로 커쇼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엘렌, 미안하지만 나 LA로 가봐야겠어.”

“척을 만나고 싶나보네요?”

“무척이나!”

야구계를 떠난 남편이지만, 그의 야구 사랑과 지대한 관심은 천성이었기에 엘렌도 말릴 수가 없었다.

@

퍼어어엉!

부우웅!

“스윙! 타자 아웃!”

-우와아아아아아아아!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관중들의 함성을 들으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오늘 관중들 평생 잊지 못하겠다!”

형수가 마스크를 벗고 날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완벽하다고 부를 순 없지만 어쨌든 라이징 패스트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을 직접 관중석에서 봤다는 건 엄청난 영광일 거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손목은 괜찮아?”

형수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직까지는.”

말 그대로 아직까지는.

“어차피 콜로라도 타자 놈들 머릿속은 이미 하얗게 질려있을 테니까 굳이 무리하지 말고 다음 이닝부터는 쉽게, 쉽게 가자.”

“다음 이닝부터 신기록인데?”

“아, 그렇네.”

“정말 쉽게 갈까? 뭐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포수가 그렇게 하자고 했다고 인터뷰해도 되겠지?”

“손목 괜찮다고 했지? 아프기 전까지는 빡세게 던져봐. 그리고 나 사인 못 내니까 네 마음대로 던져. 어떻게든 내가 다 받을 테니까. 난 이번에 타석에 서야 돼서 먼저 준비할게. 그럼 쉬어라.”

서둘러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버리는 형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모두가 기대했던 5회를 드디어 넘겼다.

1988년 LA 다저스의 전설적인 투수 오렐 허샤이저가 기록한 단일시즌 연속 무실점 기록인 59이닝과 타이기록을 작성했다.

이제 다음 이닝, 첫 번째 타자부터 새로운 신기록이 작성된다.

막상 59이닝까지 도달하니 더 이상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했다는 해방감마저 들었다.

이제부터는 안타를 맞고, 실점을 한다 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다.

기록이라는 게 참 우습게도 누군가의 기록을 뛰어넘으면 그 이후부터는 더 이상의 부담감이나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전까지는 반드시 그 기록에 도달해야한다는 강박강념이 생기지만 동일 선상까지만 도착하면 끝났다는 해방감부터 맛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그랬다.

“새로운 전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해줘서 고맙네.”

게레로 감독이 내 옆에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좋은 동료들과 유능한 감독님을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기분은 좋군.”

“진심입니다. 동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절대 오지 못했을 겁니다. 더불어 감독님께서 포지션에 맞는 선수들을 배치해놨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진심이다.

맞지 않은 포지션에 선수를 배치해서 어처구니없이 실점을 하는 투수들은 생각보다 많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까지 무실점 기록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동료 선수들뿐만 아니라 게레로 감독의 역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 말에 게레로 감독은 내 어깨를 가볍게 주물렀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내게 무척이나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기록에 연연하지 말고 평상시처럼 자네만의 피칭을 하게. 이제 자네는 어떠한 피칭을 하든 이미 전설이니까.”

이미 전설이라는 말에 살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작 메이저리그 2년차 투수에게 전설이라니.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지고 나자 동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뭐랄까, 못 볼 걸 봤다는 눈빛이라고 할까?

마치 동물원 원숭이가 된 듯 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특히, 투수들은 내 눈치를 계속해서 살피면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행동을 했다.

경기 중이고, 대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라 내게 접근하지 못할 뿐이지 오늘 경기가 끝나면 꽤나 주변 동료들에게 시달릴 것만 같았다.

따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타구가 훨훨 날아갔다.

1회를 깔끔하게 마쳤던 카터 노드윈드는 이미 3회에 강판을 당하고 말았다.

2회 초, 마운드에 올라와서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경기 중간 중간마다 내 쪽을 바라보더니 갑작스러운 제구력 난조로 볼넷과 안타를 지속적으로 허용해 결국은 3회 초에 교체가 되고 말았다.

덕분에 신이 난 건 LA 다저스 타자들이었다.

나를 제외한 선발 전원 안타는 물론, 형수는 홈런까지 하나 기록하고 있었다.

경기의 승패는 이미 완벽하게 기울어졌고, 다시 되돌릴만한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시즌 13승을 달성하기엔 무난하기만 했다.

하지만, 오늘 경기는 단순한 승리 투수가 목적이 아니었기에 이미 승패가 결정 난 경기임에도 관중들의 집중력은 대단히 높았다.

어느덧 7번 타자마저 안타를 치고 나갔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헬멧과 장갑을 착용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안타 하나는 쳐줘야 할 텐데.’

1번부터 8번까지 모두 안타를 친 경기에서 오직 나 혼자만 안타를 못치고 있다 생각하니 괜히 입안이 씁쓸했다.

대기 타석에 서서 배트를 휘두르며 생각했다.

투수가 되길 천만 다행이라고.

만약, 아버지가 나를 타자로 키웠다면?

“군대나 가 있겠지.”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괜히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 『해외편 - 174』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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