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73화 (173/221)

< 『해외편 - 173』 >

『해외편 - 173』

경기가 시작됐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선발 투수는 작년에 이어 올 시즌에도 에이스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카터 노드윈드였다.

부상으로 작년 시즌 3, 4월을 통째로 날리고도 시즌 13승을 거둔 카터 노드윈드는 특히 쿠어스 필드에서만 무려 9승, 평균자책점 2.32라는 빼어난 기록으로 왜 쿠어스 필드의 철벽이라 불리는지를 입증했다.

덕분에 오늘처럼 많은 언론과 야구팬들의 관심을 받는 경기에서 가장 만나기 싫은 투수를 상대해야 하는 LA 다저스 타자들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물론, 오늘 선발 투수가 카터 노드윈드라는 사실에 누구보다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늘 경기 긴장하지 말고 마음 편안하게 던져라. 내가 득점 지원 팍팍 해줄 테니까. 흐흐!”

다른 타자들과 다르게 형수만이 마운드 위에 서 있는 카터 노드윈드를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3연타석 홈런의 재물, 장형수라는 이름을 메이저리그에 제대로 알린 작년 경기에 대한 짜릿한 쾌감이 아직까지도 형수의 몸에 남아 있는 듯 보였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

여기에 투수들에게는 무덤이지만, 타자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쿠어스 필드에서 형수 역시 성적이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녀석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분명 카터 노드윈드는 타석에 들어서는 형수를 상대로 작년의 굴욕이 떠오를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작년의 일을 되갚아주려고 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투수는 냉정해야만 한다.

조금이라도 흥분해서 섣부르게 공을 던졌다가는 작년의 일이 다시 한 번 되풀이 되는 지옥을 경험할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형수라면…….

‘타석에 들어서면서부터 카터 노드윈드를 자극시키겠지.’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 형수의 모습을 보아하니 내 생각이 왠지 맞을 것만 같았다.

가끔 타자들은 타석에 들어서면서부터 투수를 자극하는 행동이나 표정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매너 없는 짓이라고 욕을 먹을 순 있어도 반칙은 아니었기에 당하는 쪽이 결국은 바보가 될 뿐이다.

일종의 타자와 투수 간의 심리 싸움이라고 보면 된다.

내가 아는 형수라면 그런 쪽으로는 꽤 머리가 굴러가는 녀석이었다.

딱히 특별한 행동을 할 필요도 없다.

타석에 들어서면서부터 카터 노드윈드를 바라보며 실실 웃으면서 얕잡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거만을 떨면 그만이다.

주전 자리도 확실하게 꿰차지 못한 백업 포수가 쿠어스 필드의 철벽이라 불리며 콜로라도 로키스의 에이스에게 자신감을 드러낸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심리적으로 크게 앞설 수밖에 없다.

‘카터 노드윈드가 그런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도 없겠지만.’

결과는 지켜보면 알게 될 일이다.

1회 초, LA 다저스의 공격은 역시 카터 노드윈드의 높은 마운드의 벽을 넘지 못했다.

내야 땅볼 2개와 외야 뜬공 하나로 깔끔하게 3명의 타자만 상대하고 마운드를 내려가는 카터 노드윈드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흐흐흐.”

어느새 포수 장비를 모두 착용한 형수가 내 옆에서 음침하게 웃고 있었다.

두 눈동자는 카터 노드윈드에게 완전히 꽂혀 있었고,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마운드로 향하는 나를 향해 LA 다저스 원정팬과 콜로라도 로키스 홈팬 중 일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큰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쳐주었다.

특히 원정팬들은 저마다 각양각색의 피켓을 들고 있었는데, 그 내용들은 대부분 하나로 이어졌다.

오늘 경기에서 반드시 신기록을 달성해라.

마운드에 올라서자 거짓말처럼 관중들이 조용해졌다.

본래 야구장은 항상 소란스럽다.

경기 시간보다 늦게 입장하는 관중, 야구보다는 먹는 것에 관심이 더 많아서 스낵 코너를 왔다갔다 거리는 관중, 경기 시작 전부터 얼큰하게 취한 관중,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나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떠드는 아이들까지 야구장은 절대 조용한 곳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 경기는 달랐다.

경기가 시작되기 10분 전부터 모든 관중들이 입장을 했고, 벌써부터 취한 관중이나,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서 뛰어다니는 아이들, 야구보다 먹는 것에 더 관심이 많은 관중의 모습이 거의 보이질 않았다.

오늘 경기 티켓 가격이 인터넷에서는 정상 가격보다 무려 열 배 이상 폭등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만큼 오늘 경기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단순히 야구를 보며 시간을 즐기겠다는 관중들이 아닌, 역사적 기록의 한 장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말겠다는 진정한 야구광들이 경기장을 찾은 거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가볍게 연습 투구를 했다.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던 컨디션이 지금은 상당히 좋아져 있었다.

부모님과 안젤라의 다정했던 모습, 그들의 진심어린 응원과 격려가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연습 투구를 마치고 나자 대기 타석에서 배트를 휘두르며 타이밍을 맞추고 있던 콜로라도 로키스의 1번 타자 사토시 준이 비장한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믿음직스러운 리드 오프로 작년 루키 시즌(타율 0.304, 출루율 0.376, 86득점, 52도루)을 굉장히 성공적으로 보낸 사토시 준이었지만, 내 앞에만 서면 한 없이 초라하고 작아졌다.

오죽했으면 한국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라는 속담 대신에 ‘차지혁 앞에 사토시 준’이라는 말이 유행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작년에 이어서 올 시즌에도 나에게 단 하나의 안타도 뽑아내고 있지 못한 사토시 준이었다.

지난 경기에서도 7회에 교체를 당했던 사토시 준이었기에 오늘 경기에서는 라인업에서 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사토시 준은 여전히 1번 타자로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고, 1회 말 나를 상대할 첫 번째 타자로 타석에 섰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형성된 천적 관계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

형수와 사인을 주고받고 곧바로 초구를 던졌다.

구위로 찍어 누르기 위한 포심 패스트볼이었고, 초반부터 구속을 끌어올렸기에 최소한 98마일 이상은 찍힐 빠른 공이었다.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는 공을 향해 사토시 준은 배트 손잡이를 몸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오른손을 배트의 헤드 부분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는 빠르게 날아오는 공을 똑똑히 지켜보며 배트를 가져다 댔다.

톡.

“……!”

기습 번트.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선두 타자의 기습 번트에 나 역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1루수비를 보고 있는 케럴 발렌타인도 번트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있질 않았다.

무엇보다 타구의 코스와 속도가 굉장히 좋았다.

번트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교본처럼.

1루 라인을 타고 적당한 속도로 굴러가는 타구였기에 1루수, 포수, 그리고 투수인 나까지도 누가 움직여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빠르게 반응을 한 건 형수였다.

사토시 준이 기습 번트를 대는 순간 곧바로 몸을 일으켜 타구를 쫓았다.

하지만.

“젠장!”

형수는 타구를 잡고 1루를 향해 던지지 못했다.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빠른 발을 가진 선수 중 한 명이 사토시 준이었기에 기습 번트를 예측하지 못한 이상 그를 잡기란 실질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1루 베이스를 찍고 지나가버린 사토시 준의 모습에 나는 물론, 형수마저도 허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사토시 준의 기습 번트에 고요했던 관중석에서 엄청난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일부 홈팬들마저도 사토시 준의 기습 번트에 대한 야유를 퍼부었다.

홈팬들마저 야유를 보냈지만, 사토시 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여차하면 도루를 하겠다는 듯 리드폭을 상당히 넓게 잡고 섰다.

작년 시즌 무려 52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던 사토시 준이었기에 도루에 대한 견제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쉽지가 않네.’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어떻게든 기록을 저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1회 말부터 선두 타자를 그것도 무척이나 발이 빠른 주자를 내보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형수의 어깨가 좋으니까 믿고 던지자.’

지금 상황에서 견제구를 던지면서 사토시 준을 신경 쓰면 그건 끌려가는 일이다.

오히려 도루를 허용한다 하더라도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을 해야 할 때다.

도루를 해도 결국은 2루까지 밖에 가지 못한다.

타자를 상대로 안타를 내주지만 않으면 그걸로 끝이다.

2번 타자 도미닉 리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좌타자면서 발이 빠른 도미닉 리스였기에 내야수들이 평소보다 조금 더 앞으로 이동해서 수비를 준비했다.

나와 형수 역시도 혹시라도 번트 작전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주고받았기에 거기에 대한 대비를 확실하게 했다.

‘초구부터 강하게.’

쇄애애애액.

퍼어어엉!

“스트라이크!”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 존을 확실하게 통과한 공이었다.

작정하고 노렸다면 모를까, 어설프게 건드렸다면 유격수 방면으로 타구가 날아가 순식간에 아웃 카운트를 2개로 늘렸을 거다.

2구는 방금 던졌던 코스에서 살짝 떨어지는 체인지업.

도미닉 리스의 눈에 익숙하도록 만들어 놓고 스윙을 유도한다.

패스트볼이라고 여기고 타격을 한다면 열에 여덟, 아홉은 범타가 나오고 타구의 방향은 유격수나 3루수 쪽으로 향한다.

당연히 더블 플레이를 노리고 던지는 공이다.

예측은 정확하게 맞았다.

딱!

타구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수비수인 크레이그 바렛에게로 향했다.

그는 타구의 바운드를 계산해서 몸을 움직이며 타구를 잡아냈고, 곧바로 2루를 향해 던졌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왼쪽 주먹을 꽉 쥐며 입가에 미소를 그려냈다.

하지만,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다.

2루수 데니스 플린이 공을 잡고 베이스를 찍은 후에 1루를 향해 송구를 하는 그 순간 사토시 준이 송구를 방해하는 슬라이딩을 했고, 거친 슬라이딩에 움찔한 데니스 플린의 송구가 악송구로 변하고 말았다.

베이스를 포기하고 송구를 잡기 위해 케럴 발렌타인이 다급하게 몸을 움직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악송구가 되자 1루 베이스를 찍은 도미닉 리스가 재빠르게 2루까지 이동했다.

간단한 더블 플레이가 악송구로 이어지면서 결국은 아웃 카운트 하나를 날려먹은 것도 모자라 주자를 2루까지 보내고 말았다.

종종 발생하는 흔한 일이지만, 공교롭게도 대기록을 눈앞에 둔 오늘과 같은 경기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기에 허탈한 심정과 아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1사 주자 2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건 존 킹슬리.

작년 시즌에도 3할의 타율을 마크해내면서 8년 연속 3할 타자라는 엄청난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번 시즌 역시도 저번 경기까지 타율 0.334를 지켜내고 있었으니 9년 연속 3할 타율의 타자가 될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았다.

절대 만만하지 않은 타자에게 득점권에 주자를 내보냈다는 건 투수인 내 입장에서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초구는 커브다.’

초구에 스트라이크를 넣고 시작하느냐, 넣지 못하느냐는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였기에 우선적으로 존 킹슬리를 상대로 어떤 공을 던져야 상대적으로 쉽게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얻어낼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생각 끝에 내려진 결론은 커브다.

그것도 12to6커브.

물론, 지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경기를 통해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과 선수들은 내가 12to6커브를 던진다는 걸 알게 됐다.

당연히 콜로라도 타자들 또한 그 부분을 생각해왔을 거다.

더불어 지난 경기를 몇 차례나 돌려보면서 분석을 했겠지.

하지만, 득점권에 주자를 두고 존 킹슬리를 상대로 초구부터 12to6커브를 던진다?

허를 찌르는 거다.

기존의 내 피칭 스타일이라면 무조건 패스트볼로 우선 무력시위를 했을 테니까.

형수도 내게 패스트볼을 요구했지만, 이내 내가 다시 사인을 보냈다.

잠시 머뭇거리던 형수는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트를 활짝 벌렸다.

몸 쪽으로 바짝 붙이는 커브를 던져야 한다.

구속 따윈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제구에만 중점을 둬야 한다.

2루 주자를 한 번 바라보고는 곧바로 공을 던졌다.

퍼엉!

“스트라이크!”

확실히 샌디에이고 전에서 던졌던 것보다 변화의 각폭이 줄어들었지만 12to6커브 특유의 큰 낙폭은 여전했다.

살짝 눈을 찌푸리는 존 킹슬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2구는 체인지업.

예상대로 패스트볼을 기다리고 있던 존 킹슬리는 또 다시 눈뜨고 당하고 말았다.

이제 3구가 중요하다.

유인구를 던질 것인가, 빠르게 승부를 볼 것인가.

내가 고민을 하는 사이 형수가 사인을 보내왔다.

그걸 던져.

나와 형수만 아는 또 다른 특별한 사인.

마스크를 쓰고 있는 형수의 눈은 불이라도 토해낼 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쿠어스 필드라면 어쩌면…….

고개를 끄덕이고 야구공의 실밥을 움켜잡았다.

제구가 완벽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형성되어 들어가면 되니까.

“후우우우.”

호흡을 차분하게 내뱉고는 빠르게 세트 포지션에서 공을 던졌다.

쐐애애애애애애액.

< 『해외편 - 173』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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