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72화 (172/221)

< 『해외편 - 172』 >

『해외편 - 172』

“으흐흐흐흐흐흐!”

저렇게나 좋을까?

“연습 안 해?”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형수는 손목에 찬 반짝이는 금장 시계를 연신 바라보며 좋다고 웃었다.

“하아아아~!”

입김을 크게 불어 넣고 깨끗하게 닦아내는 형수의 행동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벌써 몇 번째 저러는 건지.

저러다가 시계에 구멍이라도 나지 않을까 싶었다.

“크으~ 역시 남자는 시계란 말이야! 어떠냐? 내 손목이 좀 럭셔리해진 것 같지 않아? 이번 시계는 저번에 받았던 것보다 훨씬 괜찮지? 여자들이 아주 끔뻑 죽겠지? 흐흐흐!”

손으로 턱을 만지며 대놓고 시계를 자랑하는 형수였다.

퍼펙트 게임 기념으로 형수가 받은 롤렉스 시계다.

퍼펙트 게임 때마다 시계는 자기가 사겠다고 했던 황병익 대표는 아니나 다를까, 퍼펙트 게임이 끝난 다음날 곧바로 시계를 사왔다.

솔직히 어느 투수가 퍼펙트 게임을 이렇게 많이 달성했겠는가?

덕분에 황병익 대표에게 미안해서 앞으로는 내가 사겠다고 했지만, 그는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차지혁 선수가 부담 가질 필요 절대 없습니다. 이건 우리 에이전시의 자랑입니다. 차지혁 선수가 매 경기마다 퍼펙트 게임을 달성해도 웃으면서 시계를 살 수 있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사온 롤렉스 시계는 작년 형수에게 처음으로 선물을 했던 시계보다 훨씬 더 고가의 제품이었다.

황벽인 대표의 말에 의하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함께 짝을 맞춰왔던 절친한 친구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 너무 평범한 것이었기에 두 번째라도 더 좋은 것을 선물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덕분에 형수는 무려 한화로 1억에 이르는 고가의 호화스러운 시계를 손목에 착용하게 됐다.

물론, 나 역시 형수가 받은 시계보다 3배나 더 비싼 시계가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아직까지도 손목에 몇 억이나 되는 시계를 차고 다닌다는 게 영 불편해서 한국 부모님 집에 고이 모셔만 두고 있는 상태였다.

“시계가 너무 고급스러우니까 기존의 옷들은 좀 어울리지 않겠는데? 휴식일에 시계에 맞는 정장이랑, 구두 좀 사야겠다.”

시계 하나 때문에 옷과 구두를 하겠다니.

“명품으로 사야 할 텐데. 지혁아, 너 혹시… 아니다. 됐다.”

형수는 나를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고는 말을 말았다.

“왜?”

“너처럼 멋대가리 없는 놈이 명품을 알겠냐? 그 비싼 시계를 집에만 꽁꽁 숨겨두고 저가의 전자시계나 차고 다니는 놈한테 내가 뭘 묻겠냐.”

“30만 원짜리 시계거든.”

“어이구! 작년에만 800억을 넘게 번 갑부가 무려 30만 원짜리 전자시계를 차고 다니셨어요? 제가 몰라봤습니다!”

“…….”

“너 임마, 그렇게 돈 벌면서 쓰지도 않으면 사람들이 욕한다. 버는 만큼 돈을 써야지 경제도 돌아가는 거야. 그렇게 아끼면 사람들이 ‘아~ 저 사람은 참 검소하네~’ 이러면서 칭찬이라도 해줄 것 같아? 천만에! ‘돈도 많이 버는 놈이 왜 저러고 살아? 진짜 있는 놈이 더 하네!’ 이런다. 괜히 품위 유지비가 있는 게 아니야. 이건 자랑이 아니라, 스스로의 가치를 유지하는 일이라고. 곰곰이 생각해봐라. 있는 사람들이 왜 다 삐까뻔쩍하게 입고 다니고 먹는지. 내가 정당하게 내 힘으로 번 돈을 내 마음대로 쓰는 건 정당한 일이고, 솔직히 그러기 위해서 돈 버는 거 아니냐? 너도 신경 좀 써라.”

요즘 들어 잔소리가 많아진 형수였기에 알겠다며 대충 넘겨들으며 개인 훈련을 시작했다.

시계에 정신이 팔려있던 형수도 어느새 훈련을 시작했고, 점심이 다 되어서야 흠뻑 땀을 흘리고 난 나와 형수는 각자 샤워를 하고 점심을 먹었다.

“너 콜로라도 원정에서는 어쩔 생각이냐? 거기서는 커브가 다저 스타디움만큼 구사가 되지 않을 텐데. 무엇보다 대기록의 제물이 되지 않으려고 콜로라도 타자들이 어떻게든 5회가 지나가기 전에 점수를 내려고 눈이 벌게져서 덤벼 들거 생각하면 무슨 대책이라도 세워야 하는 거 아냐?”

“그냥 평소대로 하는 거지 뭐.”

“그래도 그건 아니지. 이게 보통 기록이냐? 40년 만의 기록이고, 솔직히 여기서 네가 얼마나 더 기록을 쌓느냐에 따라서 향후 100년이 지나도 다시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지도 모르는데. 대책 정도는 당연히 세워야 하질 않겠어?”

열변을 토하는 형수의 모습에 그저 웃고 말았다.

“그렇게 웃지만 말고! 어차피 쿠어스 필드에서는 변화구보다는 패스트볼 승부를 벌이는 게 더 낫잖아? 그러니까 그걸 던지자! 패스트볼 구속도 더 잘 나오는 곳이니까 결정구로 한 번씩만 섞어서 던지면 콜로라도 타자들 완전 당황하지 않겠어? 거기에다 대기록을 달성한 라이징 패스트볼! 크으~ 완전 전 세계가 깜짝 놀라겠다!”

흥분한 얼굴로 밥알까지 튀겨가며 과도한 리액션을 보여주는 형수였다.

“생각해보고.”

“생각해보고 자시고 할 게 어딨어? 그냥 던져! 내가 확실하게 잡아 줄 테니까! 이왕이면 나도 2연속 퍼펙트 게임 포수 좀 되보자. 엊그제 퍼펙트 게임 했을 때, 토렌스 표정 봤지? 흐흐!”

애도 아니고 몸살감기로 컨디션이 떨어져 있는 토렌스를 상대로 그러고 싶냐는 말을 해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너 정말로 황 대표가 했던 제안은 생각이 없는 거냐?”

롤렉스 시계를 사온 황병익 대표는 내게 한 가지의 제안을 했다.

나이키에서 나에게 후원 계약을 제안했다는 거다.

거기에 나를 메인 모델로 삼고 새로운 캐릭터 브랜드를 런칭하겠다는 뜻까지 밝혔다.

쉽게 설명하면 에어 조던(Air Jordan)과 같은 걸 다시 한 번 만들겠다는 말이었다.

상식적으로 야구화를 평상시에도 신고 다닐 순 없으니 조던 시리즈처럼 엄청난 성공을 생각할 순 없다. 그러나 단순히 야구화뿐만 아니라 의류, 운동화, 모자 등으로 확장시키면 분명 또 하나의 캐릭터 브랜드가 생겨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다른 곳도 아닌 세계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사인 나이키였으니 그 성공 가능성은 무척이나 높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울 스포츠를 대표하는 모델이고, 대표 주주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에만 얽매일 필요는 없잖아? 솔직히 네가 나이키 후원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울 스포츠와 계약 위반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울 스포츠를 키워놨는데 뭐라고 하면 그것도 웃기는 일이잖냐. 후원 규모도 그렇고 무엇보다 널 메인 모델로 새로운 브랜드까지 만들겠다는 데 이 정도면 오히려 네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너도 알지? 조던 시리즈로 아직까지도 매년 마이클 조던이 얼마나 많은 로열티를 받고 있는지? 네가 지금은 돈에 대한 욕심이 없어도 운동 선수는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다른 것도 아니고 스포츠 브랜드 후원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건 스포츠 스타로서 좀 아니라고 본다.”

황병익 대표에게도 들었던 말이다.

나이키의 조건이라면 울 스포츠의 성대준 대표도 납득을 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아직은 모르겠어.”

당장은 결정을 할 수가 없는 문제다.

지금은 시즌 중이고, 이틀 후에는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원정 경기에도 선발로 등판해야 한다.

형수에게 했던 말과는 다르게 솔직히 대기록에 대한 심적 부담이 생각보다 심해지고 있었다.

형수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콜로라도 원정, 그것도 투수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쿠어스 필드에서의 투구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그것만 생각하기에도 머리가 복잡한 상태였다.

“누릴 수 있을 때 누리라는 말만 기억해라.”

@

“시간이 된다고요?”

-역사적인 날이 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빠지겠어요? 아, 혹시 부담이 됐다면 미안해요. 척에게 부담을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에요.

“나도 알아요. 안젤라가 그날 경기장에 온다고 하니 해둘 말이 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그날 부모님께서도 경기장에 오시기로 했어요.”

-정말요? 잘 됐네요. 언제 오시는데요? 이왕이면 경기 전에 미리 만나 뵙고 식사라도 하고 함께 척을 응원하면 좋을 것 같네요.

“예?”

-뭘 그렇게 놀라는 거예요? 아, 척이 없는 상황에서 척의 부모님과 내가 만나는 게 한국에서는 예의에 어긋나는 건가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안젤라의 말이 의외라서요. 보통은 그러지 않잖아요. 내가 있어도 우리 부모님을 만난다는 게 쉽지 않는데, 내가 없는 자리라면 대부분은 피하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니까요.”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척의 부모님이면 제게도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잖아요. 학창 시절부터 친구들 부모님 찾아뵙는 걸 좋아해서 딱히 부담스럽다거나, 불편한 건 없어요. 다만, 척의 부모님이 미국분들이 아니라 언어 문제랑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요.

“언어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간단한 대화는 될 거에요.”

-다행이네요. 그럼 부모님과 상의를 해서 약속을 정하고 다시 내게 알려줘요.

콜로라도 원정 경기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새로운 대기록이 달성될지도 모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덕분에 한국에서도 부모님이 직접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오시기로 했는데, 안젤라까지도 날 응원하기 위해 스케줄까지 취소했다고 하니 고맙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나를 응원해주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좋은 경기가 되어야 할 텐데 하는 걱정도 들었다.

우선은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 안젤라와 통화한 내용을 알려드렸다.

두 분 모두 무척이나 반가워하셨다.

딱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안젤라에 대한 궁금증이 굉장히 컸던 모양이었다.

황병익 대표를 통해서 부모님과 안젤라가 만날 장소를 알아봤고, 시간도 맞췄다.

경기도 경기지만, 내가 없는 자리에서 부모님과 안젤라가 첫 만남을 가진다고 하니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황병익 대표가 직접 부모님과 안젤라의 만남을 주선하며 만남 장소부터 경기장까지의 모든 부분을 책임져주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부모님은 안젤라를 어떻게 생각할까?

마찬가지로 안젤라 역시 우리 부모님을 어떤 시선으로 보게 될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고, 혹시라도 양쪽 모두 서로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한참을 뒤척거리다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고 이틀 뒤.

아침부터 떠들썩한 날이 시작됐다.

TV, 인터넷, 신문 할 것 없이 온통 나에 대한 이야기로 미국 전역이 시끄러웠다.

당연히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런 시끄러운 상황 속에서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부모님과 안젤라의 첫 만남이었다.

혹시라도 안젤라가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부모님이 문화적 차이를 생각하지 못하고 안젤라에게 해선 안 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건 아닐까 등등 걱정이 하나, 둘 쌓여 머릿속이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부모님과 안젤라를 경기 후에 나와 함께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건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다가 너 경기 망친다. 부모님도 그렇고 안젤라도 그렇고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니까 쓸 때 없는 걱정하지 말고 경기에만 집중해. 황 대표도 함께 있는 다면서? 말이 통하지 않아서 오해가 생길일도 없으니까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마라. 너 그러다가 경기 망치면 부모님이나 안젤라가 두고두고 얼마나 후회를 하겠냐?”

형수의 따끔한 말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모님과 안젤라의 관계야 나중에라도 다시 되돌릴 수 있지만, 오늘 경기는 두 번 다시 되돌릴 수가 없다는 걸 생각하니 마음이 차분해지고,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컨디션을 조절하고 몸을 풀었을 때, 구단의 배려로 인해 식사를 함께 하고 경기장에 도착한 부모님과 안젤라가 날 찾아왔다.

내 걱정이 괜한 기우였고, 쓸모없는 생각이었다는 걸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안젤라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내 앞에 나타났다.

“얼굴이 왜 이렇게 까칠해? 어디 안 좋은 거야?”

어머니의 말에 차마 내가 어떤 걱정을 했는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았으니까.

“괜찮아요. 식사는 잘 하셨어요?”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 황 대표도 그렇고 안젤라 양도 그렇고 오랜만에 아주 즐거운 식사 자리라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쉽게 볼 수 없는 아버지의 기분 좋은 대답에 내 시선이 저절로 안젤라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부모님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사실이다.

마음만 같아서는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지만, 차마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는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고맙다는 눈빛만 전해주었고, 안젤라 역시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예쁘게 웃음을 지었다.

“오늘 경기 잘 해요. 사람들 시선은 생각하지 말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척의 방식대로 척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경기를 해요. 설령 결과가 좋지 않아도 척은 아직 메이저리그 2년 차의 투수라는 걸 생각해요.”

안젤라의 응원에 저절로 힘이 났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과묵하게 내 어깨를 다독이는 것으로 날 응원했고, 어머니는 내 얼굴을 몇 번이나 쓰다듬으며 몸이 아프지 않냐는 걱정만 하셨다.

“참, 지아가 경기장에 직접와서 응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래.”

경기 시간이 되어 부모님과 안젤라는 구단에서 직접 마련해준 관람석으로 향했고, 나는 최종 점검을 마치고 클럽 하우스로 향했다.

< 『해외편 - 172』 > 끝

ⓒ 독고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