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69화 (169/221)

< 『해외편 - 169』 >

『해외편 - 169』

195cm의 큰 키를 자랑하는 데니스 플린은 과도할 정도로 오픈 스탠스를 밟고 서 있었다.

배트는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 서서 투수가 공을 던지길 기다리는 타격 자세를 잡고 있었는데, 배트 스피드도 빠르고, 스윙 궤적도 좋은 편에다가 타격시 파워를 제대로 전달하는 요령까지 터득하고 있었기에 장타력이 상당히 좋았다.

타격 실력만 놓고 본다면 확실히 중심타선에 놓을 만했기에 초창기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는 그에게 외야수로 포지션 이동을 요구하기도 했었다.

아무래도 체력 소모와 수비 부담이 많은 2루수보다는 외야에서 수비를 하면서 타격 능력을 조금 더 끌어올리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니스 플린은 2루수비를 고집했고, 그 결과 수비력은 좋은 평가를 못 받지만 2루수 부문에서 타격 능력만큼은 독보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중이다.

딱!

맥스 프리드의 슬라이더를 데니스 플린은 그대로 밀어 쳤다.

타구가 총알처럼 1루수 키를 넘기며 우익수 깊숙한 코스까지 굴러갔다.

평균의 주력을 갖고 있는 데니스 플린은 여유 있게 2루까지 안착했다.

2회 초 선두타자가 2루타를 터트렸다는 건 득점에 대한 기대를 가질만했다.

타석에는 올 시즌이 마지막 은퇴 시즌이라는 생각으로 매 경기마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한 마이크 트라웃이 들어섰다.

어느덧 38살로 노장이 되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좋은 타격과 평균 이상의 수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맥스 프리드로서는 작년이 생각나겠는데?”

곁에 앉아 있던 토렌스의 말에 나 역시 작년의 일을 떠올렸다.

개막전에서 트라웃은 맥스 프리드의 낮은 볼을 그대로 펜스 밖으로 날려버리면서 3점 홈런을 터트렸었다.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맥스 프리드로서는 쉽사리 낮은 볼을 던질 수가 없을 거다.

내 예상대로 초구는 몸 쪽 높은 코스의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주자를 2루에 둔 상황에서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던져 줄 수 없다는 압박감이 있었던 건지, 맥스 프리드의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나면서 볼이 되고 말았다.

‘내가 투수라면 여기서는 바깥쪽으로 살짝 빠지는 유인구.’

현재 트라웃의 머릿속에는 최소한 진루타만이라도 쳐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할 거다. 그렇다면 몸 쪽 코스를 던지기보다는 원하는 바깥쪽 코스를 공략해서 범타나 헛스윙을 유도하는 것이 최상이었다.

내 생각과 일치하게 맥스 프리드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체인지업을 던졌다.

아쉽다면 배트가 거의 돌았다가 마지막에 멈춰서 노스윙 판정을 받았다는 것 정도였다.

2볼 상황에서 맥스 프리드가 선택할 수 있는 구종과 코스는 그리 많지 않다.

트라웃을 거를 것인가?

트라웃 다음 타자는 누구인가?

맥스 프리드와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오스틴 헤지스의 생각이 복잡해질 상황이다.

대기 타석에서는 시즌 초반부터 좋은 타격감을 보여주고 있는 형수가 맹렬하게 배트를 휘돌리고 있었다.

어떤 선택을 할까?

트라웃과 정면으로 승부를 볼 것인가, 거른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유인구 승부를 벌이다가 1루를 채워놓고 형수와 승부를 낼 것인가.

맥스 프리드가 3구를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 예상이 가능했다.

사인을 주고받은 맥스 프리드가 2루 주자, 데니스 플린을 힐끔 바라보고는 빠르게 공을 던졌다.

‘패스트볼, 낮은 코스.’

딱!

트라웃의 배트가 빠르게 나왔지만, 타이밍이 늦고 말았다.

타구가 포수 뒤쪽으로 크게 벗어나며 파울이 되었다.

피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아니, 피할 수도 있지만 눈에 보일 정도로 트라웃을 쉽게 1루까지 걸어 나가도록 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굳이 트라웃을 피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형수의 자존심을 건드릴 필요도 없었다.

역시 맥스 프리드는 노련했다.

1스트라이크 2볼 상황에서 던진 네 번째 공은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들어가는 체인지업이었다.

“스트라이크!”

트라웃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좀 멀지 않았냐는 행동으로 주심에게 어필을 했고, 맥스 프리드는 로진백을 주무르며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1스트라이크 3볼 상황과 2스트라이크 2볼 상황은 분명 다르니까.

트라웃은 자세를 잡았고, 맥스 프리드는 한결 여유롭게 2루 주자를 바라보다 5구를 던졌다.

딱.

몸 쪽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패스트볼은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났다.

그럼에도 이미 배트가 절반 이상 돌아 나온 트라웃은 유격수 방면으로 타구를 보내면 안 된다는 일념하나로 배트를 억지로 밀어냈다.

수십 년 동안 배트를 휘둘러왔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본능적인 타격이었다.

트라웃의 의도대로 타구가 2루수와 1루수 방면으로 바운드 되며 굴러갔고, 그 사이 2루 주자 데니스 플린은 3루를 향해 달렸다.

“아웃!”

트라웃은 비록 1루에서 아웃이 되고 말았지만, 어쨌든 주자를 3루까지 진루시켰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게레로 감독은 수고했다며 트라웃의 등을 다독였고, 다른 선수들 역시도 모두 박수를 쳐주었다.

이제는 외야로 공만 띄우면 된다.

모두의 기대감을 안고 타석에 들어선 건 형수였다.

다행이었다.

타격 감각도 좋았고, 파워도 있었기에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외야 뜬공 정도는 가능했으니까.

너무 짧지만 않으면 된다.

데니스 플린의 발이라면 득점 기회는 충분했으니까.

딱!

형수는 모두의 기대대로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맥스 프리드의 체인지업을 우익수에게 날려보냈고, 수비 능력이 뛰어난 알렉스 잭슨이라 하더라도 데니스 플린의 주력을 막을 정도의 어깨는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2회만에 1점을 득점하며 리드를 잡을 수 있게 됐다.

7번 타자 빌 맥카티가 3루수 땅볼로 아웃이 되면서 2회 초 LA 다저스 공격이 끝났다.

2회 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공격은 바이런 벅스턴, 알렉스 잭슨, 칼럼 레니로 이어지는 호화 타선이었다.

올스타 외야 출신의 바이런 벅스턴과 알렉스 잭슨이야 설명할 필요도 없는 타자들이고, 칼럼 레니는 작년 시즌까지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활약하던 3루수로 수비와 공격에서 모두 평균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대형 3루수라고 부르기엔 파워에서 부족함이 있었지만, 27살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메이저리그 6년 차의 베테랑인데다가 매년 20개 이상의 홈런과 3할에 근접하는 타율을 기록했으니 어설프게 홈런만 많이 치는 거포 3루수보다는 훨씬 쓰임새가 좋다 부를 수 있었다.

확실히 무게감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타선은 작년과 비교를 거부하고 있었다.

타석에 들어서는 바이런 벅스턴을 바라보며 손에 쥐고 있던 로진백을 내려놨다.

앞으로는 계속해서 만나야 할 상대다.

내셔널리그의 같은 지구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이적을 해왔으니 시즌 내내 지겹도록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더욱이 올 시즌 유독 내가 많이 상대해야 하는 팀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곳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였다.

시즌 스케줄에 따르면 무려 5번이나 선발로 등판해야 했으니 나와 바이런 벅스턴이 부상자 명단에 오르지만 않으면 최소 15번은 투수와 타자로 만나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참고로 올 시즌 내가 가장 많이 만나야 할 구단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총 6번이나 선발 등판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다저스 구단에서 일부러 로테이션을 그렇게 맞춘 것이 아니라 1선발 투수로서 5인 로테이션 스케줄을 짜다보니 시즌 스케줄과 우연찮게도 맞물려버린 거였다.

이런 스케줄 표에 당연히 게레로 감독과 구단 임원진들이 무척이나 좋아했다는 유혁선 선배의 말에 나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8월 올림픽 대표팀 차출로 보름가량 구단을 떠나 있어야 하는데, 이왕이면 지구 순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샌디에이고 파드리드 등의 팀과 자주 맞붙어서 1승이라도 더 쌓으면 심적으로 구단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가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명색이 팀 에이스로서 강한 팀을 상대로 승리를 챙겨야 하질 않겠는가?

쇄애애애액!

퍼어어엉!

“스트라이크!”

시원스럽게 포수 미트에 박히는 공의 구속은 102마일이 찍혔다.

타석에 서 있는 바이런 벅스턴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지는 모습이 보였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로 몇 년을 군림했던 바이런 벅스턴, 이제는 35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로 인해 배트 스피드부터 파워까지 완연한 하락세를 맞이한 타자.

그런 바이런 벅슨턴을 상대로 주눅들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지는 별, 그리고 뜨는 별.

오늘 그 차이를 확실하게 알려줄 생각이다.

@

-스윙! 알렉스 잭슨 헛스윙 삼진입니다! 오늘 차지혁 선수 대단합니다! 어제 경기까지 평균 8득점이라는 무시무시한 득점력을 자랑했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강타선을 완벽하게 틀어막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파드리스의 중심 타선인 3, 4, 5번 타자들을 상대로 무려 탈삼진 5개를 잡아내며 마운드의 높이가 무척이나 높다는 걸 똑똑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단하네요. 차지혁 투수! 시즌 두 번째 선발 등판임에도 벌써부터 102마일의 강속구를 던지면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타자들을 완벽하게 잠재우고 있네요. 특히, 바이런 벅스턴과 알렉스 잭슨의 경우 두 번씩이나 삼진을 당하면서 완전히 체면을 구기고 있죠.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모두 정면 승부로 두 타자를 압도하고 있다는 점이죠. 차지혁 투수 정말 대단한 배짱과 자신감이네요.

-그리고 현재 5회까지 차지혁 선수는 퍼펙트 게임 중입니다. 아무래도 1회 말에 있었던 케럴 발렌타인 선수의 호수비가 그 원동력이 되질 않았나 싶습니다.

-무척 좋은 수비였어요. 케럴 발렌타인 선수 포스트 시즌부터 빅리그에 입성해서 지금까지 굉장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타격에서는 살짝 기대에 못 미치고 있지만, 수비적인 측면에서는 기존의 미치 네이 선수보다 훨씬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말씀하시는 순간 칼럼 레니 선수의 타구 총알처럼 2루 베이스를 향해 날아갑니다! 아! 크레이그 바렛 선수 다이빙 캐치! 1루로 송구~ 아웃! 아웃입니다! 정말 멋진 호수비가 또 한 번 나왔습니다!

-크레이그 바렛 선수의 수비도 환상적이었지만, 그 이전에 칼럼 레니 선수를 상대로 게레로 감독의 수비 시프트가 제대로 적중했어요.

-5회 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공격이 끝났습니다. 잠시 광고 나간 후에 6회 초, LA 다저스의 공격을 중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태석 캐스터는 카메라가 잠시 꺼지자 재빨리 한 쪽에 놓아두었던 음료를 마셨다. 시원하게 음료를 마시고 난 이태석 캐스터가 살짝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경기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샌디에이고 타선이 워낙 강력해져서 차지혁 선수라 하더라도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역시 차지혁은 차지혁이네요. 휴우~!”

박승태 해설위원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 시작 전까지만 하더라도 7이닝 1실점으로만 막아도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5이닝까지 퍼펙트를 기록하고 있으니 할 말이 없군.”

“설마 이러다가 오늘 퍼펙트 게임 나오는 거 아닐까요?”

5회 말까지 차지혁의 투구 내용이 워낙 완벽해서 솔직히 기대가 가기도 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타선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아. 무엇보다 연속 삼진으로 자존심을 구기고 있는 바이런 벅스턴과 알렉스 잭슨이 이대로 주저앉을 것 같지도 않고. 어찌되었든 7회 말부터 진짜 재밌어 질 것 같군.”

박승태 해설위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6회 말까지도 세 명의 타자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이끌었던 차지혁은 7회 말, 선두 타자인 1번 타자 마누엘 마고에게 1, 2루간을 빠져 나가는 안타를 맞으면서 퍼펙트 게임에 대한 기대를 아쉽게도 날려버리고 말았다.

“크레이그 바렛을 2루에 갖다 놨으면 충분히 잡았을 텐데 너무 아쉽네요.”

“데니스 플린의 수비력은 항상 말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타구의 코스가 너무 절묘해서 딱히 데니스 플린을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마누엘 마고에게 안타를 맞기는 했지만, 이어진 타자들을 상대로 차지혁은 여전히 위력적인 강속구를 무기로 삼진 하나와 땅볼, 뜬공으로 7회를 마쳤다. 그리고 이어진 8회, 9회 말에도 마운드에 올라온 차지혁은 피안타 하나만을 허용하면서 시즌 2승과 두 번째 완봉승을 챙길 수 있었다.

“아쉽다! 7회 말에 안타를 맞지만 않았어도 퍼펙트 게임이었는데!”

이태석 캐스터만큼이나 모든 팬들과 언론이 아쉬움을 남긴 경기였다.

< 『해외편 - 169』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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