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65』 >
『해외편 - 165』
12월의 날짜는 누군가 허겁지겁 지워버리기라도 하듯 하루, 하루가 빠르게 삭제되어갔다.
집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가지면서 개인 훈련을 했고,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맛있는 것도 먹고, 인근 지역을 구경하러 다녔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알아봐서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지속되긴 했지만, 모두 나를 응원해주는 팬들이었기에 최대한 웃는 얼굴로 사인을 해주고, 사진도 찍으며 팬 서비스에 최선을 다했다.
황금 같은 휴식기를 즐기고 있는 나와 다르게 다저스 구단은 무척이나 바쁘게 움직였다.
우선 다저스 선수뿐만 아니라 언론에서도 예상했던 것처럼 필 맥카프리가 이적을 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필 맥카프리가 이적해 떠나면서 본격적으로 다저스 선발진에 엄청난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여기에 2027년 5선발로 뛰었던 앤디 클레먼트가 마이애미 말린스로의 깜짝 이적을 선언했다. 다저스에서 공을 들여 키운 특급 유망주였고, 선발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무엇이 불만이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이애미 말린스로 이적을 해버린 건 이미 예견되어 있던 필 맥카프리의 이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마지막으로 주전 2루수로 활약을 해오고 있던 웨인 스테인마저 시카고 컵스로 이적하면서 다저스의 맥브라이드 단장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그 외에 불펜과 백업 선수들 중 일부도 다저스를 떠나 새로운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떠난 선수들만 있진 않았다.
우선 작년까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활약을 했던 선발 투수 존 로더키가 새로운 이적생 신분으로 다저스 유니폼을 입게 됐다.
2028년 기준 29살이 되는 존 로더키는 메이저리그 8년 차의 베테랑 투수로 통산 94승을 올린 뛰어난 선발 투수로 매년 두 자리 승수는 책임을 질 줄 아는 든든한 자원이었다.
하지만, 필 맥카프리의 공백을 채우기에는 확실히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 외에도 현재 다저스에서는 쿠엘루 크롬버, 맥스 그레이, 딜런 아담스와 같은 특급 선발 투수들의 이적에 꽤 공을 들이고 있었다.
위에 언급한 세 명의 투수들 모두 매년 13승에서 15승까지는 충분히 책임을 질 수 있는 선발 자원으로 한 명만 이적을 시켜와도 필 맥카프리의 이적을 어느 정도 상쇄시키기에 충분하단 평가를 받았다.
투수 쪽을 제외한 타자 쪽에서는 놀랍게도 2027년 아메리칸리그 신인상을 받은 마이크 테일러의 이적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나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가장 뜨거운 감자 중 한 명이 바로 마이크 테일러다.
나 같은 경우에는 1억 달러를 이적료로 제시하면 얼마든지 선수와 직접적으로 이적 협상이 가능했지만, 마이크 테일러의 경우에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계약 내용 중 바이아웃 조항을 삽입하지 않았기에 구단의 허락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절대 이적 협상 자체를 벌일 수가 없었다.
소문에 따르면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는 절대 마이크 테일러를 이적시키지 않을 거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수많은 언론에서는 순수 이적료로 최고 수준인 1억 달러면 토론토도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이적료로 1억 달러를 써가면서 마이크 테일러를 영입하려는 메이저리그 구단은 당장 다섯 손가락을 넘어갈 정도로 많았다. 그 중 가장 적극적인 구단이 뉴욕 양키스와 텍사스 레인저스, 워싱턴 내셔널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콜로라도 로키스 등이었는데, 맥브라이드 단장이 그 대열에 합류를 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새어나왔다.
마이크 테일러라는 걸출한 슈퍼 신인을 영입만 해온다면 당장 다저스의 타선이 무척이나 강력해지는 건 사실이다.
던컨 카레라스 - 마이크 트라웃 - 마이크 테일러 - 코리 시거 - 장형수로 이어지는 타선은 생각만 해도 막강했다.
물론, 형수가 시즌 막판과 포트스 시즌에 보여줬던 화력을 유지해야 하고, 부상으로 시즌 중반에나 복귀가 가능한 미치 네이까지 제 몫을 해준다면 다저스 타선은 양대리그 최강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마이크 테일러가 나와 한솥밥을 먹게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였다. 우선 이적 협상 자체가 굉장히 힘들어 보였고, 마이크 테일러 스스로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셔널리그보다는 아메리칸리그를 더욱 선호한다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갑작스럽게 주전 2루수 웨인 스테인이 이적을 해버리면서 당장 주전으로 기용할 수 있는 2루수를 영입해야 했으니 맥브라이드 단장으로서도 우선 순위를 변경할 수밖에 없음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나 역시 하루도 쉬질 않고 언론에서 이적에 대한 기사가 끊이질 않았다.
명확한 1억 달러의 바이아웃 금액.
확실히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이적료를 무한으로 튕길 수 있는 마이크 테일러보다 이적 협상이 손쉬운 상대인 건 사실이다. 거기에 아무리 넘쳐도 부족하다 여겨지는 최정상급의 선발 투수였으니 메이저리그 구단이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만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나는 LA 다저스를 떠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이미 황병익 대표가 언론을 통해 이적은 없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구단들은 끈질기게 이적 협상을 제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12월이 지났고, 2028년 1월이 됐다.
“새해 복 많이 받고, 올 시즌에는 부상 없이 건강하게 야구하길 바란다.”
작년부터 우리 집은 구정이 아닌 신정을 설 명절로 지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스프링 캠프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집에 머물 수 있는 신정이 가족 모두가 함께 보낼 수 있는 설 명절이었다.
명절이라고 하더라도 딱히 차례를 지내지는 않았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 옷을 차려입고 부모님께 세배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부모님 모두 형제나 자매는 없었고, 양가 친척들이 있기는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왕래가 거의 없었기에 지금도 여전히 연락은 하질 않고 있었다.
지아의 말에 따르면 내가 야구 선수로 성공하고 나서 친척들의 전화나 방문이 잦아졌다고 했지만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그런 속보이는 친척들의 행동에 속아 넘어갈 분들이 아니라 이제는 몇몇 끈질긴 친척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예전처럼 연락 없이 지내는 중이라고 했다.
따뜻한 떡국을 깨끗하게 한 그릇 비우고 나서 가족 모두 미리 싸놓은 짐을 들고 집을 나왔다.
4박 5일 일정으로 차를 타고 강원도 일대를 여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게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밴이라 이거지? 진짜 좋다~!”
가족 여행을 간다는 말에 황병익 대표가 최고급 밴을 집으로 보내줬다.
처음에는 운전기사도 보내주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가족 여행에 다른 사람이 끼어서 좋을 게 없다며 직접 운전을 하시겠다고 해서 직접 운전대를 잡고 여행을 시작했다.
“역시 좋은 차가 운전하기도 편하구나.”
“한 대 사드릴까요?”
내 말에 지아는 좋다고 방방 뛰었지만, 아버지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도 않는 나라에서 이렇게 기름 많이 잡아먹는 차를 타고 다녀서야 되겠냐? 지금 있는 차도 충분히 좋으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라.”
바쁠 것 없었기에 여유롭게 도로를 달렸다.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게 아니었기에 국도를 타고 느긋하게 이동하다 경치가 좋은 곳이 있으면 잠시 멈춰 서서 구경을 했고,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그 유명한 7번 국도를 따라 바닷가를 즐겼고, 싱싱한 회도 실컷 먹으며 태어나서 가장 화려한 휴가를 즐겼다.
“오빠, 운동 쉬어도 괜찮아? 야구 로봇이 훈련을 안 하니까 괜히 지켜보는 내가 더 이상하고 그렇네.”
지아의 말에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날 힐끔 바라봤다.
야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완전히 운동을 쉬고 있었기에 솔직히 몸이 어색하기도 했고, 뭔가 불안한 기분도 들었다. 그렇다고 가족들 모두 만족해하고 있는 여행을 나 한 사람 때문에 망칠 순 없었다.
“괜찮아. 최상호 코치님도 이렇게 한 번씩은 완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셨으니까.”
“하긴, 십 수 년을 훈련만 해온 몸인데 고작 며칠 쉰다고 뭐 어떻게 되겠어?”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억지로 참으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여행의 마지막 날 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조용히 펜션에서 빠져나와 주변을 뛰어 다녔다.
차가운 밤공기를 잔뜩 들이키며 있는 힘을 다해 달리니 그제야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온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땀을 흠뻑 흘릴 정도로 뛰고 나서야 펜션으로 돌아오니 문 앞에서 아버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뛰었나 보구나.”
“잠이 안와서 좀 뛰었어요.”
“좀이 쑤셔서 못 견디겠지?”
“…….”
아버지는 빙긋 웃고는 점퍼 주머니에서 이온음료 하나를 꺼내 건네줬다.
“고맙습니다.”
갈증을 해소하고 나니 기분이 더욱더 상쾌했다.
“많은 걸 해주지도 못했는데 남들보다 열심히 운동하는 널 보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엄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항상 하는 말이 아들 하나는 정말 잘 낳았다고 한다. 혼자 미국에서 그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걸 보면서 아버지로써 얼마나 뿌듯하고 네가 대견스러운지 넌 잘 모를 거다.”
아버지의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지혁아.”
“네.”
“지금처럼만 몸 건강하게 부상 없이 운동해줬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 시선에 휘둘려서 힘든 야구만 하지 말아라. 네가 정말 즐기고, 행복한 야구를 하면 된다. 우리 가족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널 믿고, 응원하고 있으니까 그것만 기억하고 있어주면 좋겠다.”
“네. 아버지.”
내가 최고의 선수가 되어서 부모님은 기쁜 게 아니다.
건강하게 부상 없이 내가 원하는 야구를 할 수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응원할 수 있다는 게 진심으로 기쁘신 거다.
“감기 걸리면 큰일이니 들어가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펜션으로 들어갔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푹 잠을 잘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며칠을 더 가족과 함께 보내고 나서야 다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스프링 캠프까지는 아직 많은 날이 남아 있었지만, 제대로 몸을 만들어야 할 시기가 되었기에 나태해질 수 있는 한국보다는 미국이 편해 서두른 감이 없잖아 있었다.
때마침 형수도 미국으로 돌아온다고 했기에 함께 훈련을 하기로 했다.
미국에 돌아오니 생각보다 집이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나와 형수가 미국을 떠나 있는 사이 유급 휴가를 받은 주혜영이었지만, 일주일 간격으로 한 번씩 집에 들러 깨끗하게 청소를 해놨던 거였다.
“가족 분들과는 즐거운 시간 많이 보냈나요?”
“예. 지금까지 가장 즐거운 휴가였던 것 같아요. 혜영 누님도 소은이하고 휴가 잘 보내셨죠?”
“덕분에 소은이가 그렇게 바라던 디즈니랜드에도 가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엄마 노릇을 할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주혜영은 진심으로 나와 형수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하면서 다른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받고 있었고, 때때로 보너스까지 챙겨주고 있었기에 주혜영은 이전처럼 다른 아르바이트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도 나와 형수가 따로 휴가비까지 제법 챙겨줬는데, 얼마나 고마워하던지 처음으로 눈물까지 보이며 감사하다고 했을 정도였다.
형수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피칭 훈련은 하지 않고 체력 훈련에만 집중했다.
원래 투수의 훈련은 70~80퍼센트가 체력 훈련이었기에 며칠 피칭 훈련을 하지 않는다고 큰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한국에서도 나름 열심히 훈련을 했다 생각했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제대로 훈련을 시작하니 몸의 피로도가 빠른 속도로 쌓이며 그 동안의 훈련량이 부족했다는 걸 절감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훈련으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얼굴이 시커멓게 변한 형수가 돌아왔다.
< 『해외편 - 16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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