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62』 >
『해외편 - 162』
-삼진입니다! 삼진! 더그레이 세인트! 차지혁 선수의 96마일 포심 패스트볼에 방망이가 무기력하게 헛돌았습니다!
-투심 패스트볼을 너무 의식한 것 같네요. 반대로 말하면 차지혁 선수가 경기 초반부터 투심 패스트볼을 던짐으로써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타자들에게 혼란을 준 것이 지금까지 경기를 주도할 수 있었다고 보입니다.
-차지혁 선수 정말 대단합니다. 복귀전, 그것도 챔피언십시리즈라는 중요한 경기에서 그 동안 숨겨왔던 투심 패스트볼을 경기 초반부터 선보이면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타자들을 완전히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보통의 투수들이었다면 결정적인 순간 투심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사용하였을 텐데, 차지혁 선수는 경기 초반부터 투심 패스트볼을 던지면서 칠테면 쳐보라는 식으로 배짱 두둑한 투구를 이어나가고 있으니 참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질 않습니다.
-차지혁 선수의 배짱이야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이죠.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과 같이 큰 경기에서는 아무리 베테랑 투수라 하더라도 긴장하기 마련인데, 차지혁 선수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질 않고 있지 않습니까? 저런 대단한 투수가 한국 나이로 21살, 미국 나이로는 고작 만 20세라는 게 믿기지 않을 뿐입니다.
-지난 16일이 차지혁 선수의 생일이었으니 만 20세가 된 것도 5일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차지혁 선수는 만 19세의 나이로 미국 메이저리그 무대에 데뷔해서 내셔널리그 신인왕과 사이영상은 물론 MVP까지 거의 확정지었으니 정말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위대한 신인 투수로 기록될 것이 분명합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5회 초 LA 다저스의 공격이 시작되겠습니다. 선두 타자는 7번 타자 케럴 발렌타인입니다.
케럴 발렌타인은 트리플A에서 콜업되어 온 마이너리그 선수다.
3년 전, 드래프트를 통해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케럴 발렌타인은 고등학교 시절 포수 유망주로는 상당히 유명한 선수였고, 다저스 구단 내에서도 미래를 책임질 포수로 계약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마이너리그 경기 도중 부상을 당했고, 그 결과 무릎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면서 1루수로 전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포수 유망주였던 케럴 발렌타인의 미래는 흙빛으로 물들 수밖에 없었다.
전형적인 수비형 포수로 유명했으니까.
구단 내에서의 평가도 유망주로서의 가치가 없다 판정을 받았으니 계약 기간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방출, 혹은 값싼 트레이드 카드로의 활용 방안 밖에 없었다.
그런 케럴 발렌타인에게 의외의 잠재력이 웅크리고 있었다.
“작년에는 더블A에서 3할에다가 16개의 홈런을 쳤는데, 올해는 트리플A에서도 3할에다가 19개의 홈런을 쳤으니 구단 내에서도 기대를 가져볼 만하겠지.”
덤으로 1루 수비에서도 꽤 수준급의 수비를 보여주고 있었기에 구단에서의 관심이 굉장히 높아진 상태였다.
“미치 네이의 연봉 보조도 문제였지만, 텍사스 측에서 케럴 발렌타인을 덤으로 끼워서 달라고 했기에 맥브라이드 단장이 절대 허용할 수 없다면서 판이 엎어졌다고 하더라.”
나 역시 잘 황병익 대표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다.
LA 다저스는 절대 돈이 궁한 구단이 아니다.
미치 네이의 연봉 보조가 통상적인 수준을 훨씬 벗어나는 범위라 하더라도 맥브라이드 단장의 한 마디면 마크 앨런 구단주가 충분히 허용을 할 수도 있었다.
텍사스에서 케럴 발렌타인까지 가지려고 했기에 트레이드가 무산된 거였다.
덕분에 시즌 후반기에 미치 네이가 몸값을 충분히 해주면서 시즌 종료 마지막까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1위 다툼을 할 수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7월에 미치 네이를 트레이드 시키지 않은 것이 복이 된 건 사실이다.
문제는 포스트 시즌 첫 번째 경기에서 미치 네이가 손목에 이상이 생겨 수술대에 올라갔고, 부상 정도가 생각보다 심해서 내년 시즌 중반까지 복귀가 어렵다는 점이다. 올 시즌 후반기처럼 포스트 시즌에서도 활약을 해주었다면 올 겨울 어떻게든 트레이드나, 이적을 노려볼 수 있었는데 그게 무산됐다는 게 맥브라이드 단장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을 거다.
그렇게 미치 네이가 빠진 자리를 급하게 메우기 위해 맥브라이드 단장은 작년에 이어 올 시즌마저 트리플A에서 좋은 활약을 한 케럴 발렌타인을 메이저리그로 승격시켰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트리플에서 아무리 잘 나갔어도 메이저리그는 호락호락하지가 않지. 거기에다 시즌 경기도 아니고 포스트 시즌이니 적응하기 쉽지 않겠지.”
삼진을 당하며 축 늘어진 어깨로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케럴 발렌타인을 바라보며 형수가 아쉽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지금이야 형수가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시즌 초반만 하더라도 케럴 발렌타인과 입장이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니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거다.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더 힘내!”
케럴 발렌타인을 향해 진심으로 격려를 해주는 형수의 모습을 바라보다 재빨리 헬맷과 배트를 들고 대기타석으로 걸어 나갔다.
대기타석에서 배트를 휘두르며 마운드를 바라봤다.
올 시즌 14승을 올린 카디널스의 3선발 투수 제이 파브로는 1실점 이후, 단 한 점도 추가 실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올해 서른 살의 제이 파브로는 메이저리그 생활 7년 동안 78승을 올렸고, 최근 4년 동안에는 항상 13승 이상을 거뒀으며, 포스트 시즌 경험도 풍부해서 좀처럼 쉽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무서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비교적 젊은 선수들로 세대교체가 이뤄졌다고 하지만 포스트 시즌 경험은 결코 적지 않았기에 큰 경기에서도 절대 긴장하지 않고, 오히려 집중력 있는 모습으로 팀의 응집력을 보여주니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게임은 끝이 난다.
딱.
몸 쪽으로 휘어져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제대로 타격하지 못하면서 웨인 스테인의 타구가 유격수의 글러브에 잡히고 말았다.
2아웃 상황에서 내가 타석에 들어서니 제이 파브로의 표정이 한결 여유롭게 변했다.
지명 타자가 없는 내셔널리그의 특성상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면 마운드에 서 있는 상대팀 투수는 누구라도 긴장이 풀어지고,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는다.
포심 패스트볼,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제이 파브로가 던지는 구종들 중 나는 커브를 노리기로 했다.
96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이나 85마일의 슬라이더를 어설프게 타격하기보다는 차라리 조금이라도 눈에 보이는 80마일 초반의 커브를 노리는 편이 그나마 확률적으로 안타를 치고 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어설프게 공을 쫓아 타격을 하기보단 어차피 삼진을 당하더라도 하나의 구종을 노리는 편이 타격 재능이 떨어지는 내게 어울렸다.
쇄애애액.
퍼엉!
“스트라이크!”
한 가운데로 들어온 포심 패스트볼에 너무 쉽게 스트라이크를 내주고 말았다.
시즌 타율 0.116의 나를 상대로 굳이 어렵게 승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강하겠지.
그건 내가 제이 파브로의 입장이 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퍼엉.
“볼!”
공을 던지고 난 제이 파브로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유인구라고 하기 보다는 체인지업의 제구가 살짝 벗어나면서 볼이 된 것 같았다.
세 번째 공이 날아왔고, 슬라이더가 다시 한 번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며 볼이 됐다.
초구를 너무 쉽게 스트라이크로 잡았던 것에 비해 불필요한 2구를 낭비한 셈이다.
3구는 분명히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온다.
아무리 만만한 타자라 하더라도 굳이 1스트라이크 3볼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칠까?’
제구가 흔들린 체인지업이나, 방금 던졌던 슬라이더를 던질 가능성은 낮다.
제대로 스트라이크를 잡으려면 패스트볼이다.
스트라이크 존을 들어오는 패스트볼을 칠 것인가?
고민을 하다 이내 생각을 털어냈다.
처음부터 노렸던 커브만 친다.
굳게 마음을 다잡고 제이 파브로의 4구를 기다렸다.
와인드업을 하고 네 번째 공을 던지는 제이 파브로, 그리고 눈에 확연하게 들어오는 공의 궤적.
‘커브.’
내 예상을 완전히 어긋나는 커브로 카운트를 잡으러 왔다.
유인구가 아닌 스트라이크를 넣기 위한 커브, 타자의 허를 찌르겠다는 커브였다.
보통의 타자들이었다면 여기서 패스트볼을 노리고 있었겠지.
공의 궤적이 눈에 또렷하게 보였다.
한 가운데에서 살짝 낮은 코스.
원하는 공이 날아오니 고민 할 것도 없고, 주저할 것도 없었다.
있는 힘껏 하체를 조이면서 허리를 틀어 배트를 휘둘렀다.
따- 악!
손 안에서 울리는 아주 작은 울림.
기분 좋은 시원스러운 타격음.
1루로 달리기보다는 내가 때려낸 타구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좌중간으로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타구는 누가 봐도 홈런이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LA 다저스 원정팬들의 함성 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1루 베이스를 밟고, 2루로 향하는 내 눈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제이 파브로의 얼굴이 들어왔다.
커브를 던지면서 타자의 허를 찌르며 쉽게 카운트를 가져갈 수 있으리라 여겼겠지.
나 역시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올 걸 예상하고 패스트볼을 노리고 있었다면 커브에 완벽하게 속아서 어쭙잖은 헛스윙이나,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겨 멍하니 카운트를 내줘야만 했을 거다.
타석에 들어섰을 때의 다짐을 잊지 않고 밀고 나갔기에 지금처럼 최상의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홈 베이스를 밟으니 기다리고 있던 던컨 카레라스가 오른쪽 주먹을 내밀었다.
나 역시 오른 주먹을 내밀어 마주치고는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니 누구보다도 형수가 가장 먼저 나를 향해 하이파이브를 해왔다.
“복귀전 한 번 진짜 화려하네! 포스트 시즌 첫 홈런 축하한다!”
“고맙다.”
이어서 선수들 모두 내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멋진 홈런이었네.”
게레로 감독도 활짝 웃으며 날 축하해줬다.
선수들과의 축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축하할 일이 터졌다.
따- 악!
제이 파브로의 몸 쪽 낮은 코스의 포심 패스트볼을 던컨 카레라스가 그대로 담장 밖으로 날려버린 거였다. 올 시즌 풀타임 출전을 하고도 고작 6개의 홈런 밖에 때려내지 못한 던컨 카레라스의 홈런이라 그 의미가 더욱더 컸다.
백투백 홈런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감독이 마운드로 올라갔다.
제이 파브로의 교체보다는 그의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고, 예상대로 감독 홀로 다시 마운드를 내려가며 경기가 이어졌다.
-9회 말에도 차지혁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8회까지 차지혁 선수의 투구수가 97개인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9회까지도 믿고 맡겨 볼 수 있을 겁니다. 단기전 승부에서 상대팀에게 추격의 발판을 절대 내어줄 수 없다는 걸 감안하면 게레로 감독으로서는 차지혁 선수로 하여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타자들의 기를 완전히 꺾어놓기로 작정할 수도 있죠.
-그렇습니다. 오늘 경기가 이대로 끝이 난다면 내일 있을 4차전에서도 LA 다저스가 확실하게 상승세를 이어나갈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8회까지 차지혁 선수는 단 하나의 안타만을 내주면서 아쉽게도 퍼펙트 게임과 노히트 게임을 날렸습니다만, 포스트 시즌 완봉승이라는 것만 하더라도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죠. 데뷔 첫 해에 포스트 시즌에서 완봉승을 따내는 투수는 결코 흔하지 않죠. 더욱이 오늘 경기는 지난 9월 3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경기 이후 무려 48일 만의 복귀전이니 이런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기립 박수를 받을 만한 일입니다.
-말씀하시는 순간, 세바스티안 로버츠 선수의 타구가 내야 높이 떴습니다! 유격수 크레이그 바렛 선수 주변 선수들에게 콜 플레이를 하며 안정적으로 타구를 잡아냈습니다! 원 아웃! 차지혁 선수의 완봉승까지는 단 두 개의 아웃 카운트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크레이그 바렛 선수 참 안정적으로 내야 뜬 공을 처리하네요. 올 시즌 LA 다저스의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면서 6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골드 글러브 수상자답게 올 시즌에도 명품 수비를 수없이 보여줬죠.
-내셔널리그 골드 글러브 수상이 유력하질 않겠습니까?
-내셔널리그 유격수들 가운데 가장 골드 글러브 수상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소리는 있습니다만, 결과는 지켜봐야 할 테죠.
-삼진! 차지혁 선수 오늘 경기 열다섯 번째 삼진을 잡아냈습니다! 이제 경기 종료까지는 단 하나의 아웃 카운트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브라이언 케니시의 배트가 허공을 가르고, 주심의 외침이 경기장을 관통하고, 형수가 벌떡 일어나 마운드로 달려오는 것으로 경기 종료를 알렸다.
최종 스코어 3:0.
48일만의 복귀전에서, 내셔널리그 챔피언을 가리는 중요한 경기에서 9이닝 완봉승을 따냈다.
경기 최종 성적은 9이닝 무실점, 16탈삼진, 총 투구수는 107개.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 전적은 2:1로 LA 다저스가 앞서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마운드에 오를 때는 두 가지의 경우뿐이다.
26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 최종 7차전이거나.
10월 30일 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메이저리그 월드 시리즈 1차전이거나.
하지만 최악의 경우도 존재한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연속 3연패를 당했을 경우.
그때는 내게 주어진 2027년의 야구가 끝났을 때다.
< 『해외편 - 16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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