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61』 >
『해외편 - 161』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 3차전.
LA에서 공평하게 1승 1패를 나눠가진 다저스와 카디널스는 절대 물러설 수 없는 3차전을 시작했다.
특히, 오늘의 관전 포인트는 메이저리그 데뷔 첫 포스트시즌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오르는 내가 과연 얼마나 선발 투수로서, LA 다저스의 신형 에이스로서 자기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느냐였다.
시즌 막판 부상을 당하면서 복귀를 하는 첫 번째 경기가 챔피언십시리즈였고, 시즌 내내 막강한 모습을 보였다 하더라도 포스트시즌에만 들어서면 이상할 정도로 와르르 무너지는 선발 투수들이 즐비하는 메이저리그였기에 꽤 많은 언론들이 그런 모습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기도 했다.
물론, 그런 기대를 들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부웅!
파앙!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1번 타자 브라이언 케니시는 94마일의 컷 패스트볼에 헛스윙을 하며 첫 번째 아웃 카운트를 헌납했다.
1회 초, LA 다저스의 공격이 삼자범퇴로 싱겁게 끝나고 1회 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첫 번째 공격이 시작됐지만, 1번 타자 브리아언 케니시가 공 4개 만에 삼진을 당하며 무기력하게 타석에서 물러났다.
오늘 컨디션은 최상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온 몸이 가벼웠다.
무엇보다 부상으로 인해 오랜 시간 마운드에 오르지 못하며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기만을 간절히 희망했던 날들에 대한 은근한 스트레스를 오늘 모조리 풀어 버릴 작정이었다.
퍼- 어엉!
“스트라이크!”
시원스럽게 포수 미트에 꽂히는 공만큼이나 호쾌한 주심의 선언에 내 입가엔 미소가 그려졌다.
반대로 타석에 서 있는 샘 브루노아의 표정은 살짝 굳어있는 게 보였다.
2구는 몸 쪽 높은 코스의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부웅!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나는 높은 볼이었기에 샘 브루노아의 배트가 닿질 못하며 허공을 갈랐다.
‘승부는 최대한 빠르게.’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형수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듯, 좌타자인 샘 브루노아의 바깥쪽을 살짝 걸치고 빠져 나가는 컷 패스트볼을 요구해왔다.
딱.
2스트라이크 노볼이라는 상황이 샘 브루노아의 스트라이크 존을 확장시켰고, 그의 인내심을 바닥으로 끄집어 내렸다.
배트 끝에 살짝 걸리며 타구가 3루 방면으로 튕겨져 나가자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3루수 코리 시거가 빠른 발로 달려 나오며 타구를 잡아 1루로 송구했다.
펑!
“아웃!”
좌타자인 샘 브루노아가 있는 힘껏 이를 악물고 달렸지만, 공보다 빠를 순 없었다.
3번 타자, 더그레이 세인트가 타석에 들어섰다.
2027년 시즌 타율 0.309에 홈런 36개를 날리면서 카디널스의 중심타자 역할을 확실하게 해준 더그레이 세인트는 배트를 길게 잡고 차분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계산기라 불리며 쉽게 흥분하지 않는 더그레이 세인트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형수와 초구에 대한 사인을 신중하게 주고받았다.
낮은 코스의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걸치는 포심 패스트볼.
심판의 성향에 따라서 볼 선언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스트라이크 선언을 받게 된다면 확실하게 이번 승부를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으니 충분히 던져 볼만한 공이었다.
와인드업을 하고 원하는 코스로 공을 던졌다.
퍼엉!
“볼!”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주심은 볼을 선언했다.
형수가 미트를 내민 자세 그대로 멈춘 상태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스트라이크가 아니냐는 행동이었지만, 주심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판정에 조금의 의심도 갖질 않았다.
방금의 판정은 분명 심판의 성향에 따라 스트라이크와 볼을 얼마든지 뒤바꿀 수도 있었지만, 내 예감이 맞다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홈이라는 이점이 더욱더 크게 작용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시즌 경기도 아니고 내셔널리그 챔피언을 가리는 중요한 경기에서 홈 어드밴티지라니.
쓴웃음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스트라이크 존을 확실하게 잡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1볼 상황에서 두 번째로 던진 공은 누구라도 스트라이크 선언을 할 수밖에 없는 몸 쪽 코스의 파워 커브였다.
더그레이 세인트는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커브가 들어오고 있는 걸 알면서도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다.
확률을 높이는 거다.
내가 던지는 공의 구질과 구속을 조금 더 신중하게 파악하고 난 이후에 확실한 안타를 생산하기 위한 스윙을 하겠다는 계산이다.
그렇다면 더그레이 세인트의 계산을 흔들어 놓아야 한다.
형수의 포심 패스트볼 사인을 거부하고 내가 사인을 보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전혀 다른 새로운 사인.
“타임.”
형수가 주심에게 타임을 요청하고 마운드로 올라왔다.
“진심이냐? 이제 경기 시작했어. 벌써부터 그걸 던지기엔 너무 이르지 않겠어?”
“시작했으니까 던지는 거야.”
“뭐?”
“시작부터 카디널스 타자들을 완전히 흔들어 놔야 오늘 경기가 우리 뜻대로 풀릴 것 같거든.”
내 말에 형수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그렇게 판단을 한다면 믿고 따라가야지. 마음껏 던져봐. 확실하게 잡아 줄 테니까.”
내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를 하고 형수가 마운드를 내려갔다.
1스트라이크 1볼 상황에서 천천히 와인드업을 하고 3구를 던졌다.
쇄애애애액.
자신의 몸 쪽으로 파고 들어오는 날카롭고 빠른 패스트볼에 더그레이 세인트의 배트가 기계적으로 튀어나왔다. 정확한 계산에서 자신의 궤도를 정확하게 그리며 나오는 더그레이 세인트의 스윙은 언제봐도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하지만, 그런 깔끔한 스윙이 언제나 더그레이 세인트의 계산대로 질 좋은 안타를 생산해내는 건 아니었다.
딱.
배트에 공이 맞기 직전 몸 쪽으로 더욱더 꺾여 들어갔다.
배트 안쪽에 공이 빗맞으면서 타구가 어설프게 1루 방면으로 튕겨져 나갔고, 1루 수비를 보고 있던 케럴 발렌타인이 안정적으로 공을 잡고 1루 베이스를 밟았다.
그러는 동안 더그레이 세인트는 1루 베이스를 향해 절반 정도 밖에 달리지 못하곤 멈춰 섰다.
한 손에 배트를 들고 서 있는 더그레이 세인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운 구종, 투심 패스트볼이 그에게 던져준 파문은 생각보다 강렬한 듯 싶었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서자 투수 코치가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멋진 투심이었다. 카디널스 더그아웃에서 난리가 났을 거다.”
투수의 구종은 말 그대로 무기다.
그렇지 않아도 상대하기가 만만하지 않은 차지혁이라는 투수에게 또 다른 무기가 들려 있으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타자들로서는 머릿속에 무척이나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결정적인 순간에 투심 패스트볼을 던진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흔한 말로 필살기로, 결정구로서의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고작 한 명의 타자를 상대하기 위해 훌륭한 구종을 아낀다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타자들에게 새로운 구종을 던지면 그 효과는 당일 경기 내내 이어진다.
혼란이 생기기 때문이다.
카디널스 타자들은 경기 직전까지 내가 던지는 구종을 분석해가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왔을 거다. 그로 인해 나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에 대한 각자의 공략법이 이미 만들어 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경기 초반부터 전혀 없던 구종을 던진다면?
이미지 트레이닝이 무용지물이 되고, 공략법 또한 폐기 처분해야 한다.
무엇보다 투수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면서 편안하게 경기를 주도해나갈 수가 있게 된다.
이런 점들 때문에 1회부터 나는 투심 패스트볼을 적극적으로 던지기로 결정한 거다.
딱!
마이크 트라웃의 타구가 1루수 키를 살짝 넘기며 우익수 방면으로 빠르게 굴러갔다.
평범한 1루타로 끝날 안타였는데, 놀랍게도 수비 실력이 수준급인 더그레이 세인트가 공을 더듬거렸고, 그 사이 트라웃이 2루를 향해 내달렸다.
나이를 먹었어도 여전히 발이 빠른 트라웃은 전성기 시절의 멋진 슬라이딩으로 베이스에 안착하며 양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충격이 꽤 큰 모양인데?”
토렌스가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 있는 더그레이 세인트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투심 패스트볼에 아웃을 당하고 머릿속에 복잡해진 거다.
이렇게까지 좋은 상황이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2회 초부터 득점 찬스를 잡았으니 선발 투수인 내게는 기쁜 일이었다.
이런 호기를 잡은 타자는 가을 사나이, 형수였다.
확실하게 5번 타자 자리를 잡은 형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선발 투수, 제이 파브로와 맞상대를 시작했다.
초구는 몸 쪽 스트라이크였고, 형수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2번째 공은 낙차 큰 커브였는데 확연하게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유인구였기에 형수의 배트가 나오지 않았다.
1스트라이크 1볼 상황에서 제이 파브로가 선택한 3구는 85마일의 체인지업이었는데, 애초부터 노렸던 공인지 형수의 배트가 타구를 크게 밀어 냈다.
쭉쭉 뻗어나간 공은 아쉽게도 펜스에 맞으면서 홈런이 되지는 못했지만, 2루에 있던 트라웃을 홈으로 불러들이는데 큰 역할을 해냈다.
아쉬운 1타점 2루타를 터트린 형수의 모습에 곁에 앉아 있던 토렌스가 입맛을 다셨다.
타격에서 형수가 워낙 불방망이를 휘두르다보니 토렌스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작아져 있었다.
포수로서의 능력이 미달이라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으니 단기전 승부에서 형수가 토렌스를 밀어내고 선발로 출장하는 일이 잦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게레로 감독의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1점을 실점하긴 했지만, 제이 파브로는 올 시즌 14승을 올린 투수답게 쉽사리 추가 실점을 허용하지 않으며 2회 초 LA 다저스 공격을 막아냈다.
“2점 정도는 더 뽑았어야 했는데.”
포수 장비를 착용하며 형수가 아쉬움 가득한 음성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사 2루 상황에서 3루 베이스도 밟지 못했으니 후속타에 대한 아쉬움이 큰 건 사실이었다.
“1점을 지키면 되잖아.”
내 말에 형수가 멍하니 날 바라보다 이내 크게 웃었다.
“맞네! 지혁이 네 말이 맞다! 까짓것 추가점수 더 못 뽑으면 어떠냐? 메이저리그 신인왕과 사이영상을 동시에 수상할 리그 최고의 투수가 버티고 있는데! 가자! 포스트시즌 퍼펙트 게임 한 번 가보자!”
포스트시즌 퍼펙트 게임이라니.
형수의 호기로운 외침이 허황되다 느껴지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뜨거워졌다.
마운드에 올라서니 여기저기서 관중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응원하는 LA 다저스 원정팬들의 격려도 있었고, 야유를 뒤섞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홈팬들의 악의적인 음성도 있었다.
새삼 오늘 경기의 마운드 높이가 얼마나 높은지 깨달았다.
다른 경기도 아니고 내셔널리그 챔피언을 결정짓는 경기다.
오늘 경기로 결판이 나는 건 아니지만, 중대한 기점이 될 수는 있었다.
“후우우우.”
차분하게 호흡을 고르는 사이 타석에 타자가 들어섰다.
4월 내셔널리그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했던 할 매케인은 타석에 서서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부족한 거다.
고작 단 하나의 공만으로는 확신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당연히 그렇겠지.
데이터에는 전혀 없는 새로운 구종을 갑자기 던졌다는 건 충분히 의심할 만한 일이다.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확인을 위해 인내를 가지고 타석에 들어섰다는 거니까.
고민 없이 초구와 2구를 던졌다.
포심 패스트볼과 컷 패스트볼을 연속으로 던지면서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잡았다.
그리고 할 매케인의 의심이 더욱더 짙어지며 인내심마저 바닥이 날 때, 두 번째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줬다.
부- 웅!
배트가 헛돌며 타자의 의심을 확인시켜주었다.
투심 패스트볼을 던진다.
이 한 가지의 사실을 알려줌과 동시에 너무나도 쉽게 아웃 카운트 하나를 얻어냈다.
< 『해외편 - 16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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