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57』 >
『해외편 - 157』
“드디어 붙었군.”
맥브라이드 단장은 밥 먹는 시간조차 아껴야 할 정도로 바빴지만, 잠시 모든 업무를 뒤로 미루고 단장실에 걸려 있는 대형 TV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이번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의 최고 흥행 카드는 차지혁과 마이크 테일러의 맞대결이다.
양대리그 역대 최고의 신인들의 대결.
무엇보다 투수와 타자의 대결이라 더욱더 흥미로웠다.
물론, 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은 마이크 테일러다.
통상적으로 투수와 타자의 대결은 열 번 중 세 번만 타격에 성공해도 타자의 승리라 부른다. 반대로 투수는 일곱 번을 이겨도 세 번을 지면 이겼다 부르기 힘들다.
하지만, 이번 대결은 단 한 번만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당연히 마이크 테일러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어떤 식으로 승부가 나느냐가 관건이겠지.”
맥브라이드 단장은 단장실 한쪽 벽면에 위치한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셨다.
-모두가 기다렸던 지혁 차와 마이크 테일러의 대결이 시작됐습니다! 내셔널리그를 지배하고 있는 역대 최고의 신인 투수 지혁 차와 아메리칸리그를 초토화 시키고 있는 역대 최고의 신인 타자 마이크 테일러의 대결은 이번 올스타전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중계를 책임지고 있는 캐스터의 음성은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곁에서 해설을 하고 있던 해설자의 음성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캐스터와 해설자 이전에 그들도 양대리그를 대표하는 신인들의 대결에 온 몸이 달아올랐다는 소리다.
-앞서 있었던 아드리안 론돈의 타석에서도 그랬지만, 오늘 마스크를 쓰고 있는 테리 레드메인 포수는 역시나 마이크 테일러를 상대로도 투수인 지혁 차에게 사인을 전혀 내지 않고 있습니다.
-올스타전이니 그럴 수도 있죠. 더욱이 투수인 지혁 차의 실력이야 이미 더 이상 의문의 꼬리표를 달 수 없으니 테리 레드메인 포수로서는 지혁 차의 사인만 받아들여 공만 잡으면 편하게 게임을 할 수 있다 여길 테죠.
-사인을 포수에게 건넨 지혁 차, 천천히 와인드업을 합니다. 제 일구로는 무엇을 던질 것인지… 던졌습니다! 스트라이크! 98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입니다! 타자의 무릎보다 살짝 높은 위치의 스트라이크 존을 관통하는 낮고 빠른 패스트볼! 역시 지혁 차의 패스트볼은 무시무시합니다!
-타자 마이크 테일러 초구에 대한 타격 의지가 전혀 없었다는 듯 조금의 미동도 없군요. 아드리안 론돈 선수가 초구부터 작정하고 타석에 들어섰던 것과는 무척이나 대조적인 모습이군요. 메이저리그 7년 차인 베테랑 아드리안 론돈과 메이저리그 1년 차인 마이크 테일러의 모습이 바뀐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군요.
-부담감 때문 아니겠습니까? 마이크 테일러 선수로서는 이번 첫 번째 대결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집어넣은 지혁 차 선수 두 번째 공에 대한 사인을 포수에게 보내고 와인드업을 시작합니다. 제 이구! 던졌습니다!
타자의 몸 쪽 높은 코스로 송곳처럼 파고 들어가는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낮은 코스 이후 곧바로 이어진 높은 코스.
이번에는 마이크 테일러도 참지 않았다.
딱.
하지만, 타이밍이 맞질 않았다.
직전 98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을 예상하고 배트를 휘둘렀지만, 94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이었으니까.
타구가 총알처럼 빠른 속도에 큼지막한 포물선을 그리며 좌측 노란색 폴대를 크게 벗어났다.
“힘 하나는 정말 엄청나군.”
맥브라이드 단장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차지혁의 포심 패스트볼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형 파울 홈런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살짝 섬뜩한 느낌도 들 정도의 공포스러운 힘이었다.
중계를 하고 있는 캐스터와 해설자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었다.
-…맞는 말이지만, 지혁 차가 전력을 다해서 공을 던진다면 저토록 쉽게 대형 타구가 나오지는 않을 테죠. 94마일의 포심 패스트볼, 거기에 몸 쪽이라고 하지만 높은 코스였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큰 타구가 나올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마이크 테일러의 파워에 대해서는 확실히 지혁 차의 구위보다 조금 더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해설자의 말에 맥브라이드 단장도 인정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들이켰다.
마이크 테일러의 파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메이저리그 최정상급이다.
BA 평가에서도 최고 등급인 80점 만점을 받은 파워였으니 차지혁의 구위가 아무리 대단하다 평가를 받고 있어도 마이크 테일러의 파워에는 견줄 수가 없었다.
이어서 세 번째 공이 차지혁의 손끝에서 떠났다.
88마일이나 되는 빠른 체인지업이었고, 코스는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을 살짝 벗어났다.
볼 판정을 받았지만, 박수를 쳐줄 정도로 훌륭한 유인구였다.
저런 멋진 유인구를 던질 수 있는 차지혁의 실력에 맥브라이드 단장은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투 스트라이크 노 볼이라는 극도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선구안을 발휘한 마이크 테일러에게도 박수를 보내줄 만했다.
네 번째 공.
구종은 파워 커브였으며, 코스는 타자 앞에서 크게 각이 꺾이며 바운드가 될 정도였다.
평소 차지혁이 던지던 파워 커브보다 구속이 떨어졌지만, 각도는 훨씬 더 큰 폭을 그렸다.
“흐음…….”
맥브라이드 단장의 표정이 처음으로 불만족스럽게 변했다.
방금 던진 차지혁의 파워 커브는 시즌 전반기 동안 수많은 타자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것과 너무나도 차이가 났다.
차지혁의 파워 커브의 장점은 빠른 속도와 폭은 좁지만 무척이나 예리하게 꺾이는 각도에 있었다.
그런데 방금 공은 간단하게 평가해서 밋밋했고, 특색이 없었다.
누구도 쉽게 던질 수 없는 차지혁 특유의 파워 커브가 아니라 어떤 투수라도 흔하게 던질 수 있는 평범한 커브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마운드에 서서 로진백을 주무르는 차지혁의 표정도 썩 밝지가 못했다.
의도치 않았던 공이란 뜻이다.
“밸런스가 무너진 건가?”
올스타전이 있기 전, 2주 동안 아프리카에서 클레이튼 커쇼에게 12to6커브를 배웠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맥브라이드 단장은 그 부작용이 지금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성급한 생각마저 들었다.
아프리카에 갔다 온 이후, 팀 전체 훈련에서도 특별한 보고를 받지 못했기에 크게 걱정을 하진 않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차지혁의 밸런스에 문제가 생겼다면?
구단 입장에서 가장 최우선으로 신경 써서 집중 관리를 해야 할 일이 된다.
맥브라이드 단장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차지혁이 다섯 번째 공을 던졌다.
“괜한 걱정이었군.”
전반기 내내 던졌던 차지혁만의 파워 커브였다.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공이 아니었기에 볼 판정을 받았지만, 맥브라이드 단장의 우려를 말끔하게 해소시켜 주는 멋진 파워 커브였다.
“풀 카운트까지 왔군.”
모두가 기대했던 것처럼, 시시하게 끝날 대결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어느덧 2스트라이크 3볼의 풀 카운트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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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카운트.
투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대다수의 투수들은 풀 카운트에서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한다는 압박감과 강박 관념을 갖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설프게 던진 공 하나가 안타로 이어지거나 장타가 될 수 있고, 그렇다고 유인구를 던지자니 타자를 완벽하게 속이지 못하면 출루를 시키니 투수로서는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환상적인 유인구를 던지거나, 타자의 타격 본능을 짓밟는 강력한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한다.
‘어설픈 유인구로는 어려워.’
완벽하다 불러도 손색이 없었던 바깥쪽 빠지는 체인지업에 마이크 테일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허를 찔려서 움직이지 못했다거나, 애초부터 지켜보자는 심정이 아니었다.
투 스트라이크 상황이었으니까.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기본적으로 선구안이 좋다 평가를 받는 마이크 테일러였지만, 리그 정상급이라고 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완벽했던 유인구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지금의 승부에 집중하고 있다는 소리다.
집중하는 타자는 무섭다.
스트라이크와 볼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은 물론이고, 단타를 장타로, 장타를 홈런으로 뒤집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펜웨이 파크라고 하지만 마이크 테일러와 같은 파워를 지닌 타자에게 그린 몬스터 정도는 우습다.
실제로도 좌타자보다 우타자에게서 홈런이 더 많이 나오는 구장이 펜웨이 파크였으니, 그린 몬스터도 진짜 파워를 가진 우타자에게는 그리 높은 벽이라 부를 수가 없다.
‘바깥쪽을 걸치는 컷 패스트볼로 우선 하나 가보자.’
선구안이 아무리 좋은 타자라 하더라도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컷 패스트볼 앞에서는 혼란을 겪는다.
테리 레드메인의 미트질도 훌륭했으니 스트라이크를 볼로 만들 걱정도 없다.
사인을 보내고 공을 던졌다.
딱!
마이크 테일러의 배트가 평소보다 아주 짧고 간결하게 나왔다.
풀 카운트에서 짧은 스윙을 가져가는 건 교타자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행동이지, 마이크 테일러와 같은 장타자들은 결코 자신의 스윙을 버리지 않는다.
자존심이기도 하고, 자만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방금 스윙은 오직 한 가지의 목적뿐이다.
‘커트.’
타석에서 물러난 마이크 테일러는 장갑을 고쳐 끼우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 사납게 기세를 풍기는 맹수처럼 날 쳐다봤다.
오늘의 대결을 나만 기대했을까?
절대 아니다.
투수의 승부욕만큼이나 타자의 승부욕도 크다.
더욱이 마이크 테일러는 미국 태생으로 메이저리그의 본고장에서 야구를 배우며 꿈을 키워온 선수다.
낯선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물 건너온 투수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준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여길 테지.
그렇다면 오늘 경기에서 마이크 테일러가 노리고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뭘까?
‘완벽한 안타, 아니 그 이상의 홈런.’
어설프게 볼넷으로 출루를 하는 것조차도 마이크 테일러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되겠지.
“후우우.”
작게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로진백을 만졌다.
타자인 마이크 테일러가 저렇게 정면 승부를 원하는데, 어설프게 상대를 해서 내가 얻을 이득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 역시 오늘 대결에서 완벽하게 마이크 테일러를 패배시키고 싶으니까.
내가 가진 최고의 공으로 상대를 한다.
포심 패스트볼.
오늘 경기 최고의 공을 던진다.
포수인 테리 레드메인에게 사인을 보내니 마스크 안쪽의 두 눈동자가 당황하듯 크게 커지는 게 보였다.
천천히 호흡을 하며 와인드업을 했다.
‘오늘 승부는 이 공으로 끝낸다.’
힘을 모으듯 웅크리고 있는 마이크 테일러의 모습을 보며 있는 힘껏 공을 던졌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힘이 차근차근 온 몸을 거쳐서 손끝으로 뿜어져 나가는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쐐애애애애애액.
공은 엄청난 회전을 머금고 공간을 뚫듯 날아갔다.
코스는 한 가운데에서 살짝 위쪽.
마이크 테일러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날아오는 공을 향해 마이크 테일러의 배트가 휘어지듯 궤적을 그리며 튀어 나왔다.
부우우우웅!
소름끼치도록 강력한 바람 소리와 함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퍼어어어- 엉!
포수 미트 가죽이 터질 것처럼 엄청난 파열음이 울렸다.
이어진 주심의 호쾌한 콜.
“스윙! 타자 아- 웃!”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래된 펜웨이 파크가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엄청난 함성소리가 관중석에서 터졌다.
헛스윙을 한 마이크 테일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타석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날 향하는가 싶었더니 아니었다.
뒤쪽 전광판이었다.
무엇이 저렇게 마이크 테일러를 넋 놓게 만들까 싶어 돌아보니 나 역시 믿을 수 없는 것이 두 눈에 들어왔다.
104MPH
전광판이 고장 났나?
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절대 고장이 아니라는 듯 흥분한 관중들의 함성이 현실을 일깨워줬다.
지금까지 내가 던진 가장 빠른 공.
104마일.
킬로미터로 변환하면 167.37km.
무엇보다 제구가 잡혀서 던졌던 공이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104마일이나 되는 공을 제구해서 던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한 번이라도 던졌다는 게 내겐 중요했다.
살짝 들뜬 가슴을 진정시키며 몸을 돌리니 여전히 마이크 테일러가 타석에 서 있었다.
더 이상 전광판이 아닌 날 노려보고 있었다.
상처 입은 맹수처럼 나를 노려보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주심이 경기를 진행해야 하니 그만 나가라고 하니 그제야 등을 돌리는 마이크 테일러였다.
복수를 생각하고 있겠지?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는 마이크 테일러의 머릿속엔 온통 나에 대한 복수만이 가득할 거다.
다음에는 절대 질 수 없다는 굳은 의지를 다지고 있겠지.
그런데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고작 한 번 이겼을 뿐이다.
마이크 테일러라는 맹수를 사냥하는 최고의 사냥꾼으로 기억되려면 앞으로도 계속 오늘과 같은 대결이 이어져야만 한다.
< 『해외편 - 15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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