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54』 >
『해외편 - 154』
“맛있어요?”
안젤라의 물음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순간적으로 안젤라조차 잊고 음식을 흡입한 모습이 얼마나 추하게 보였을까 싶은 마음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나랑 약속해요.”
“무슨 약속이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먹는 건 잘 먹겠다고 나랑 약속을 해줘요.”
“지금이야 상황이 좀 그러니까 그렇지 평소에는 정말 잘 먹고 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척이 잘 먹었으면 하는 걸 약속해달라는 거예요. 척은 운동 선수에요. 그것도 한창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시기라고요.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고 먹는 걸 소홀히 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몸에 문제라도 생기면 그땐 어떻게 할 거에요? 난 척이 적당히 쉬면서 운동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척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프로는 성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니 적당히라는 말은 용납 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하는 말이에요. 내일부터 식사는 무조건 여기서 하는 거예요? 알겠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 보는 눈도 있고…….”
“척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잖아요? 당장 2주 후면 시즌 후반기가 시작되는데 몸 관리를 철저하게 해놔야죠. 그런 척에게 욕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생각이 그만큼 짧은 거니까 그러라고 내버려 둬요. 남들 시선을 생각하면서 살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요?”
안젤라의 꾸짖음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약속 한 거예요? 알았죠?”
대답을 강요하는 안젤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러겠다고 말했다.
“안젤라는 항상 이 시기에 봉사 활동을 왔나요?”
“모델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딱히 정해진 시기가 없어졌어요. 시간이 좀 난다 싶으면 그때그때 2, 3일이라도 아이들을 만나려고 노력을 하고 있죠.”
“그렇군요. 며칠 후에 다시 돌아가려고요?”
내 물음에 안젤라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척과 함께 일주일 후에 돌아가려고요.”
“바쁘지 않아요?”
“바쁘죠. 그런데 2주 정도 휴가를 받았어요.”
“2주요? 그럼 설마 나와 함께 돌아간다는 뜻은 LA로 간다는 말인가요?”
“맞아요. 이곳에서 일주일, 그리고 LA에서 일주일.”
2주나 되는 긴 시간 동안을 안젤라와 함께 할 수 있다니 기쁜 일이었지만, 바쁜 안젤라가 2주씩이나 휴가를 받았다는 건 그 이후의 후유증이 분명 크다는 뜻이었다.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 휴가인가요?”
안젤라가 왜 그렇게 눈치가 빠르냐는 듯 날 가볍게 째려봤다.
“물으니까 대답을 할 수밖에 없네요. 사실, 이번 휴가가 끝나면 곧바로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요.”
오스트레일리아, 즉 호주로 떠난다는 소리에 곧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에이치 3편에 출연하기로 했군요?”
“맞아요. 제 역할은 그리 많지 않지만 영화사에서는 대략적으로 6개월 정도는 다른 스케줄을 잡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마도 6개월 동안은 척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요.”
말을 하며 미안해하는 안젤라였다.
6개월.
분명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길다고 생각하면 무척이나 긴 시간이기도 했다.
대략적으로 1월 말까지는 촬영을 하고 2월에야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필이면…….’
야구 선수에게 자유로운 휴식이 주어지는 시기는 12월부터 1월 중순까지다.
1년 중 고작 1달하고도 보름 정도의 시간만이 자유로운 휴식기다.
1월 중순이 지나면 전지 훈련이 시작되면서 다시 11월까지 빠듯한 스케줄을 소화해야만 한다. 물론, 포스트시즌에 출전하지 못하면 10월 중순부터 적당한 휴식기가 시작된다고 하지만 어떤 야구 선수도 포스트시즌 출전을 배제하진 않으니 실질적으로 11월까지는 모든 스케줄을 야구에만 맞춰서 계획을 짠다.
이런 짧은 휴식기에 안젤라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 치명적이다.
특히, 안젤라가 6개월이라는 긴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2월은 내게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시기라 마음 놓고 그녀를 만날 여유가 있을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다시 시즌이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인데.
과연 시간적으로 엇갈리는 우리 두 사람의 사이가 튼튼하게 유지가 될까?
솔직히 불안하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안젤라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잘 됐다는 표정으로 축해해 줬다.
하지만, 내 축하 인사에 어떤 우려와 걱정이 담겨져 있는지 안젤라는 알고 있는 듯 싶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으려는 걸 억지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나는 샴페인을 주문했다.
“술 먹으려고요?”
깜짝 놀라는 안젤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좋은 일이니까 샴페인을 터트려야죠. 아쉽지만 먹는 건 다음으로 미룰게요.”
주문한 샴페인을 터트리며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가 다시 한 번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하길 기원했고, 덩달아 그녀의 새로운 도전 또한 순탄하게 이어지길 바랐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니 날이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그래도 한 나라의 수도답게 해가 저물었음에도 길거리 곳곳에 세워진 가로등과 건물과 간판들로 인해 짙은 어둠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좀 걸을까요?”
“좋죠!”
내 제안에 안젤라가 기다렸다는 듯 웃는 얼굴로 내게 팔짱을 끼었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었다.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는 나무와 꽃이 많아 따로 화원의 도시라 불렸는데, 그 중에서도 카이로 로드는 나무와 잔디 등으로 굉장히 멋스럽게 잘 꾸며져 있어 산책을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산책을 하며 안젤라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
한국은 어떤 곳인지, 가족들은 어떤 사람인지 등등 안젤라는 나에 대한 것들을 하나라도 빼놓지 않고 알고 싶어했다.
“안젤라는 뉴욕이 집이라고 했죠?”
“맞아요. 5살 때부터 메리 이모네 집에서 살았어요. 태어난 곳도 뉴욕이니 내겐 뉴욕이 고향이죠.”
“이모요?”
부모님이 아닌 이모라는 소리에 내가 살짝 의문을 표하자 안젤라가 곧바로 말을 했다.
“5살 때 부모님은 사고를 당하셨어요. 교통사고였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으셨고, 어머니는 2년간 병원 신세를 지다가 결국 돌아가셨죠.”
“아…….”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하는 사이, 안젤라가 웃으며 날 바라봤다.
“메리 이모는 내게 엄마나 다르지 않아요.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은 흐릿한 모습뿐이고, 7살 때 세상을 떠난 엄마에 대한 기억도 산소 호흡기에만 의지한 상태로 말 한 마디 하지 못하는 상태였으니까요. 덕분에 메리 이모는 결혼도 못하고 날 떠맡아 키웠죠. 사실 나 때문에 결혼도 못한 메리 이모를 생각하면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이모가 혼자서 안젤라를 키웠으면 무척이나 힘들었겠네요.”
“그렇죠. 그래서 지금이라도 좋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에요.”
23살의 나이에 조카를 키웠다고 했다.
안젤라의 미모가 어느 쪽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핸드폰에 저장된 메리 이모의 외모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자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메리 이모의 직업이었다.
“사진작가라고요?”
“그렇게까지 유명한 사진작가는 아니에요.”
“안젤라가 모델이 된 이유가 메리 이모 때문이기도 하겠군요?”
“솔직히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겠죠.”
이모의 손에 키워졌음에도 밝고 건강하게 자란 안젤라가 더욱 대단하게 보였다.
한국 나이로 치면 고작 17살의 나이에 아프리카에 봉사 활동을 올 정도면 메리 이모의 성품이 어떤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만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나중에 뉴욕으로 원정 경기를 오게 된다면 메리 이모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 척을 무척이나 궁금해 하고 있거든요.”
조카를 위해 헌신했을 메리 이모를 생각하면 처음으로 생긴 남자 친구에 대한 호기심과 경계심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죠. 시간이 되면 나도 꼭 메리 이모를 만나보고 싶네요.”
“약속하는 거죠?”
“예.”
이후, 안젤라의 제안으로 즉흥적으로 영화 한 편까지 보고 나서야 희망의 집으로 돌아갔다.
데이트는 잘 즐겼냐며 묻는 커쇼를 피해서 나는 훈련을 시작했고, 안젤라는 엘렌, 호프와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훈련 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피곤했을 텐데도 내가 훈련하는 걸 끝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안젤라는 잠을 자러 들어갔다.
새벽에 일어나 개인 훈련을 하고, 아침을 먹기 직전 안젤라와 가볍게 산책을 하고 아침 식사 후에는 커쇼에게 레슨을 받고, 이후엔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거나 함께 놀아주다 점심을 먹기 위해 안젤라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식당에서 밥을 먹는 건 나 혼자였다.
안젤라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두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
둘이 들어와 혼자 밥을 먹기가 민망해서 함께 먹길 권하니.
‘척은 시즌 중의 프로 선수니까 당연히 몸에 맞는 음식을 먹어야 하지만, 나는 봉사 활동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두고 온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밖에서 따로 좋은 음식을 먹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자신은 봉사 활동을 하기 위해서, 나는 어디까지나 명목상 커브를 배우기 위해서라는 안젤라의 주장에 나는 결국 묵묵히 식당에서 입에 맞는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전까지는 점심을 먹고 나면 개인 훈련을 하다가 틈틈이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일손이 필요한 일에 도움을 줬지만, 안젤라가 오고 나서는 그녀와 함께 행동했다.
대신, 저녁을 먹고 나면 온전히 나만의 개인 훈련 시간을 가졌다.
무엇보다 엘렌과 자원 봉사자들이 오면서 한결 시간적인 여유가 생긴 커쇼가 함께 파트너가 되어 가볍게 캐치볼을 하거나, 이런저런 코칭을 해주는 것이 또 하나 달라진 점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빠르게 지나갔고 약속했던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모두 흘렀다.
돌아가는 길은 안젤라를 비롯해서 몇몇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였다.
커쇼는 내게 빠르게 던지는 습관을 버려야만 진정한 12to6커브를 던질 수 있게 될 거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애초부터 내년 시즌을 목표로 익힌 12to6커브였기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2주간의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알아야 할 부분들은 충분히 익혔으니 아쉬움도 없었다.
의외로 떠나는 나를 향해 눈물을 짓는 아이들이 모습이 날 뭉클하게 만들었다.
나와 다르게 아이들은 내게서 야구를 배우고, 함께 즐겁게 놀다보니 든 정이 생각보다 깊은 듯 싶었다.
다음에도 꼭 와달라는 아이들의 눈물 그렁그렁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코끝이 찡해졌고, 나도 모르게 그러겠다며 약속을 하고 말았다.
“착한 어른은 약속을 꼭 지킨답니다.”
떠나는 내게 마지막으로 한 호프의 그 말이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다가왔다.
비행기를 타고 한 번의 경유를 거쳐서 LA로 돌아오니 어느새 IBAF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앞두고 있었다.
“워싱턴 내셔널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결승이라니. 정말 의외네요.”
20일부터 시작되는 IBAF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은 의외의 대결이 성사 되었다.
워싱턴 내셔널스야 워낙 저력이 있는 구단이니 충분히 결승에 올라갈만한 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깜짝 결승 진출이었다.
특히 8강과 4강에서 각각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꺾는 이변을 연출해서 어쩌면 IBAF 챔피언스 리그 최초로 메이저리그의 구단이 아닌 다른 리그의 구단이 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전문가들의 예상까지도 있었다.
일본 프로 야구 최고의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만약 워싱턴 내셔널스마저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면?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자존심에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될 테지.
자신들보다 하위 리그라 여기는 구단에게 우승을 빼앗기는 꼴이니까.
“척은 어느 팀이 우승할 것 같아요?”
소파에 나란히 앉은 안젤라가 TV에서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만만한 팀은 아니지만, 그래도 워싱턴 내셔널스가 이기겠죠.”
“그렇겠죠?”
전문가들의 예상이야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흥미를 이끌기 위함일 뿐이다.
과연 진심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우승할 거라 예상하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었다.
무엇보다 결승 1차전 워싱턴 내셔널스의 선발 투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루카스 지올리토였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최고라 평가를 받는 그가 요미우리 자이언츠 타자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예상이었다.
안젤라와 TV를 보며 오랜만에 편안한 휴식을 만끽할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새카맣게 탄 형수가 요란스럽게 등장했다.
“지혁아~ 나 왔다!”
우렁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던 형수는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나와 안젤라의 모습을 보더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10여초를 아무런 말없이 서 있다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내가 호텔로 가야겠지?”
< 『해외편 - 15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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