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53』 >
『해외편 - 153』
안젤라로 보이는, 아니 안젤라가 확실한 그녀에게 아이들이 다가갔고, 그녀는 아이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며 일일이 포옹을 해주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고도 익숙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난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는 빙긋 웃었다.
어제 통화를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그녀는 이탈리아라고 했었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의 화보 촬영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하루 만에 아프리카에서 그녀를 보게 될 줄이야.
“어떻게 된 거예요?”
내 물음에 안젤라가 미안하다는 듯 대답했다.
“척에게 미리 말을 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설마 화가 났나요?”
아이들을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짓던 안젤라의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잘못을 한 아이처럼 긴장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안젤라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났다기 보다는 어째서 안젤라가 지금 여기에 온 건지 그게 궁금할 뿐이에요.”
“그건…….”
“제가 대신 말을 해도 될까요?”
커쇼의 아내, 엘렌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간단하게 설명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이 제가 계획한 일이라고 한다면 믿을 수 있겠나요?”
“예?”
계획한 일이라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혹시, 커쇼 선배님이 날 찾아온 이유부터 절 아프리카에 데리고 온 모든 것들이 부인의 뜻이라는 겁니까?”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엘렌의 말에 나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커쇼가 갑자기 날 찾아온 것부터 좀 의아스럽긴 했었다.
바쁜 시간을 일부러 쪼개가며 날 찾아왔고, 굳이 아프리카까지 날 데리고 가려고 했던 것도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일이긴 했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을 엘렌이 계획했다니.
“자세하게 설명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나쁜 의도는 없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계획에 의해 내가 조종당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 대상이 아무리 커쇼와 엘렌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설명을 해드려야죠. 그 이전에 우선 자리부터 옮길까요?”
엘렌의 말대로 자리가 좋지 않았다.
아이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우리를 관심 있게 쳐다보고 있었으며, 자원 봉사를 온 봉사자들 또한 두 눈에 깊은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예.”
내 대답에 엘렌은 고맙다는 듯 웃어주고는 곧바로 자원 봉사자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사이 안젤라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아왔다.
“척. 혹시 기분 나쁜 가요?”
“솔직히 말해서 좋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해해요. 하지만, 진심으로 척에게 나쁜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을 했던 건 아니에요. 그리고 정말로 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이탈리아에서 화보 촬영을 하고 있었어요.”
“안젤라가 날 기만하려고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지금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울 뿐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을 필요 없어요.”
내 말에 안젤라는 그제야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나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봉사 활동은…….”
“안으로 들어갈까요?”
엘렌이 다가와 그렇게 물었고, 나는 안젤라에게 하려던 말을 잠시 뒤로 미뤄야만 했다.
엘렌을 따라서 건물 안으로 들어간 나와 안젤라는 곧바로 얼굴 가득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호프로 인해 잠시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모녀 사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엘렌과 호프는 사이가 깊었다.
그리고 놀라운 건 호프와 안젤라 역시도 꽤 친한 사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안젤라는 이곳 희망의 집에 한두 번 온 게 아니었다.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일지 예상을 하는 사이 아무런 훼방도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좀 설명이 길 수도 있지만, 이렇게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차근차근 대화를 나누도록 하죠.”
“바라던 바입니다.”
엘렌은 나를 향해 빙긋 웃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가장 궁금한 부분부터 말을 해주죠. 당신이 가장 궁금한 건 역시 여자 친구인 안젤라에 대한 이야기겠죠?”
“편하게 척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렇게 할게요, 척. 안젤라는 벌써 4년 동안 이곳을 찾아오며 봉사 활동을 하고 있어요.”
4년 동안?
내가 놀라서 안젤라를 바라보니 별 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엘렌은 안젤라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안젤라는 정말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마음도 아름다운 여자죠. 단언하건데 척은 정말 좋은 여자 친구를 만난 거예요. 물론, 내 말은 아직까지는 척보다는 안젤라를 더 잘 알고 있으니 하는 말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비교를 당했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진 말았으면 해요.”
“조금도 섭섭하지 않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남편은 척을 무척이나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죠. 자신을 뛰어넘을 수도 있는 위대한 투수가 LA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굉장히 기뻐했어요. LA 다저스에 대한 남편의 사랑은 정말 못 말릴 정도거든요. 어쨌든 그런 척이 안젤라와 만난다는 사실을 알곤 내가 한 가지 꾀를 냈죠. 우리 부부의 뒤를 이을 새로운 커플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이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알 것 같습니다.”
커쇼의 뒤를 충분히 잇다 못해 뛰어넘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 LA 다저스의 투수.
17살 때부터 아프리카에 봉사 활동을 다닐 정도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젊고 아름다운 여자.
커쇼와 엘렌은 과연 내가 자신들처럼 아름다운 선행의 길을 갈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물론, 미끼가 너무 훌륭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였던 커쇼가 던졌던 최강의 커브를 미끼로 날 낚았으니까.
대충 상황이 정리가 되자 문득, 어째서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서야 엘렌과 안젤라가 나타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젤라야 모델 활동을 하느라 바쁘다고 하더라도 항상 커쇼와 함께 봉사 활동을 다녔던 엘렌이 일주일이나 늦게 이곳에 왔다는 게 의문스러워졌다.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제겐 시험의 시간이었던 겁니까?”
내 물음에 엘렌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척의 마음을 확인해볼 필요는 있었죠. 이쪽 일은 누가 억지로 시킨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진심. 그것이 필요한 일이죠. 기쁘게도 남편이 내게 말해주더군요. 척은 진심으로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다고.”
“만약 진심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인연이 아니라 생각할 뿐이죠. 남편과 나는 척을 LA 다저스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희망적인 에이스라 보고 있어요. 그 사실 만으로도 남편과 나는 척을 응원할 거고, 마땅히 팬이 되어 줄 거예요. 봉사 활동은 별개의 문제일 뿐이죠. 물론, 아쉬움은 남았을 테죠.”
엘렌의 말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인의 잣대에 맞춰져서 시험을 당했다는 사실이 기분 나쁜 건 사실이지만, 커쇼 부부의 행동을 욕할 순 없었다.
커쇼 부부는 어떠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엾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내 진심을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미안해요. 척의 기분이 어떨지는 충분히 이해가 가요. 하지만, 고통 받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척에게 몇 번이나 사죄를 할 수 있어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엘렌의 모습에 나는 알겠다는 듯,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안젤라가 어째서 이곳에 왔는지만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내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사죄를 해왔으니 내 입장에서는 찜찜함을 느끼지 않아 좋았고, 엘렌으로서는 뒤끝을 남기지 않아 개운할 것 같았다.
내 기분이 살짝 풀어졌다는 걸 확인한 엘렌은 안젤라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라는 뜻으로 조용히 방을 나갔다.
엘렌이 나가자 곁에 앉아 있던 안젤라가 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기분이 좀 풀렸나요?”
“나쁜 뜻으로 한 행동이 아니니 내가 여기서 더 화를 내고 기분만 상해 있으면 나만 꼴이 우습게 되잖아요. 기분이 풀리지 않았어도 안 그런 척 하고 있어야 하질 않겠어요?”
내 말에 안젤라가 빙긋 웃더니 갑자기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왔다.
촉촉한 입술의 감촉과 코끝으로 전해지는 아찔한 향기가 내 머릿속을 찌릿하게 만들었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안젤라가 내게 말했다.
“여기 아이들은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들에 크게 감사하고, 웃음 지으며 행복해하죠. 난 그런 아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요. 솔직히 난 척도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했으면 좋겠어요.”
“만약, 내가 안젤라와 뜻이 다르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죠?”
내 물음에 안젤라가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너무나도 간단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고치도록 해야죠.”
“그게 쉽지 않으니까 문제죠.”
“쉽지 않겠죠.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안젤라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어쩌면 평생을 함께 할지도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
“나와 척은 많은 사람들에게 응원을 받으며 그 사랑으로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는 거잖아요? 난 우리가 가진 것들을 반드시 누군가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들보다 좋은 집에 살며,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좋지만, 그건 한 순간일 뿐이잖아요? 불편 없이 살면서 많은 아이들을 돕는다면 그것만큼 큰 마음의 행복은 없다고 봐요. 난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고 싶다고 꿈꾸고 있었어요. 이런 내 꿈이 싫은가요?”
싫을 리가.
다만, 나와 같은 나이의 안젤라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의외일 뿐이었다.
“좋아하시겠네요.”
“무슨 말이에요?”
“우리 부모님이 안젤라를 좋아하겠다고요.”
“정말요?”
활짝 웃으며 기뻐하는 안젤라의 모습을 보니 나 역시 불쾌하고 찝찝했던 기분이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돌아온 커쇼는 그 누구보다도 엘렌에게 달려가 결혼 17년차 부부로서는 보이기 쉽지 않은 닭살 애정으로 주변 자원 봉사자들의 눈총을 샀다.
엘렌과의 애정 행각을 마치고 나서야 커쇼는 봉사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고, 마지막으로 안젤라와 따듯하게 포옹을 하며 친분을 과시했다.
모두와 인사를 마치고 나서야 커쇼가 나를 불러 엘렌과 똑같은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
엘렌과 안젤라로 인해 마음이 다 풀어져 있었기에 커쇼의 사과를 쿨하게 받아들였다.
“이제야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찝찝한 기분을 털어낼 수 있게 됐군. 하하하!”
사과를 받아주자 커쇼가 밝게 웃었다.
이후,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었다.
희망의 집에 와서 유일하게 날 괴롭히는 것이 음식이었다.
“입에 잘 맞지 않아요?”
“아무래도…….”
아프리카의 음식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에 내 입에는 당연히 맞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커쇼와 호프가 내 입을 생각해서 루사카 내에 존재하는 음식점들을 통해서 최대한 맞는 음식들을 찾아주려고 했지만, 나 혼자 따로 음식을 먹는 다는 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사양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자 이제는 한계 상황에 도달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억지로 음식을 먹던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안젤라가 커쇼와 엘렌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커쇼와 엘렌이 날 바라보며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젤라가 다시 자리로 돌아오더니 내 손을 잡고는 일으켰다.
“일어나요.”
“예?”
안젤라는 주변 눈치를 살피는 행동을 보이고는 날 끌고는 식당 밖으로 나갔다.
“지금이 비시즌도 아니고 시즌 중인데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향해 화를 내는 안젤라의 모습에 적지 않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있어도 제 몸 하나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누굴 돌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궁색한 변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안젤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금 내 손을 잡고는 커쇼가 타고 다니던 차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안젤라, 어디 가요?”
“밥 먹으러 가야죠.”
“예?”
“뭐해요? 어서 타요.”
어느새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걸고 있는 안젤라였다.
조수석에 앉자 안젤라가 곧바로 엑셀을 밟으며 차를 몰았다.
< 『해외편 - 15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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