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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마일-152화 (152/221)

< 『해외편 - 152』 >

『해외편 - 152』

아프리카라니.

커쇼에게 12to6커브를 배우기 위해 결국, 예정에도 없던 아프리카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7월에 아프리카 땅을 밟게 될 줄이야.

목적지는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

한 번의 경유를 거쳐서 도착한 루사카의 첫 인상은 생각 외로 시원했다.

잠비아의 겨울은 6월부터 10월까지다. 5, 6월에서 8월까지는 시원하며 건조하고 그 이후부터는 겨울이라 하더라도 뜨겁고 건조하다 했지만, 나야 어차피 2주 후면 LA로 다시 돌아가야 했기에 이후 날씨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시간이 느리게 가는 곳이 바로 아프리카지.”

공항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에 커쇼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내게 말했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곳이라고?

어떤 의미의 말일까 잠시 고민을 해봤다.

LA와는 비교할 수 없다지만, 높고 화려한 건물들과 너무나도 익숙하게 봐왔던 세계 유명 브랜드의 매장들이 즐비해 있는 도시의 모습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도시의 모습만 본다면 아프리카도 이제는 정말 많이 발전했고,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척박한 환경의 대륙이 아니구나 싶겠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눈에 보이는 극히 일부의 도시들만 발전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 바로 아프리카의 나라들이다.

집중적으로 발전되어 있는 도시를 제외한 곳은 여전히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끊이질 않는 내전으로 아프리카 대륙은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떨어졌고, 그만큼 고통을 받는 이들이 많은 곳이었다.

수많은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여전히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구호 단체와 자선 단체 등이 아프리카 대륙을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다지만, 드넓은 아프리카 대륙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제하기엔 한참이나 모자랐다.

자그마치 15년 넘게 아프리카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커쇼였기에 더욱더 그 실상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커쇼가 한 말의 의미가 조금은 이해가 갔다.

“작년에 아프리카에 왔었다며?”

“…광고 촬영이었습니다.”

순수하게 기부와 함께 봉사 활동을 하는 커쇼 앞에서 유니세프 광고 촬영을 위해 아프리카에 왔었다는 사실이 괜히 부끄럽게 느껴졌다.

“광고는 나도 봤어. 멋지더군. 카메라에 비친 자네의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졌어. 내가 그 나이 때에는 솔직히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일이라 정말 자네가 대단하게 느껴졌지.”

진심으로 칭찬을 하는 커쇼로 인해 부끄럽던 마음이 살짝 가시기는 했지만, 그의 앞에서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 왔군.”

커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달리던 차가 멈춰섰다.

눈앞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의 건물 한 채가 앞에 서 있었고, 큼지막한 간판이 보였다.

Hope's Home

희망의 집이라는 고아원으로 2012년 커쇼가 설립을 한 곳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12명의 어린이들이 살았지만, 지금은 무려 260명이 넘는 아이들이 살고 있는 루사카 최대 규모의 고아원으로 유명했다.

“앞으로 2주 동안 자네가 지내야 할 곳이야.”

동시에 봉사 활동을 해야 하는 곳이다.

커쇼에게 명품 커브를 배우는 조건으로 레슨비 대신 봉사 활동을 하기로 약속을 했으니까.

선천적 에이즈 감염자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던 호프라는 어린 소녀를 위해 설립된 희망의 집은 놀랍게도 어린 소녀였던 호프가 현재 원장으로 260명이 넘는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다소 말라 보이는 작은 체구의 처녀, 호프는 상당히 맑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에이즈 감염자지만, 꾸준히 치료를 받으며 살고 있었기에 정상적인 삶을 살기엔 불편함이 없다고 했다.

“차… 척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하자 그녀가 맑게 웃으며 나를 잘 안다며 이야기를 했다.

커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녀에게는 독실한 신앙심과 함께 절대적인 관심사가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야구였다.

“여기서도 메이저리그 경기는 볼 수 있답니다.”

호프는 자신이 LA 다저스의 오래된 광팬이며, 동시에 나를 무척이나 응원하고 있다고 했다.

희망의 집에서 지내는 2주 동안 어떻게 지내면 되는지에 대해서 호프는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딱히, 조심해야 할 부분은 없었고 내가 하지 말아야 할 행동도 없었다.

부탁이라며 한 말이라고는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며 재밌게 놀아주기만 하면 된다는 거였다.

그리고 또 하나.

“야구를 말입니까?”

“예.”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호프가 말을 이었다.

희망의 집 아이들 특히 남자 아이들은 하나 같이 공통된 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바로 야구 선수가 되어서 메이저리거가 되는 것.

커쇼의 영향이었다.

남자 아이들은 커쇼처럼 훌륭한 메이저리거가 되어서 성공하고 싶고, 자신의 성공만큼 또 다른 아이들에게 베풀고 싶다는 소중한 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한 삶.

희망의 집 아이들은 작은 가슴 속에 아프리카 태양만큼 뜨거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호프와의 만남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창밖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거인처럼 큰 커쇼가 환하게 웃으며 아이들과 뒤엉켜서 뛰어놀고 있었다.

‘봉사는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 아니야. 나 자신을, 내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한 일이지. 누군가를 돕기 위해 봉사를 한다는 마음, 누군가에게 내 선행을 보여주기 위해 하는 봉사, 어떠한 이득을 계산해두고 이뤄지는 봉사는 진정한 봉사가 아니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이들이 결코 쉽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질 않아. 내가 진실 된 마음으로 내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고 정화시키기 위해 아이들에게 내가 도움을 바랄 때, 진정으로 아이들이 내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되어 있어.’

비행기 안에서 했던 커쇼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커쇼에게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위대한 선행을 베푼 선수라고 칭찬한다.

하지만, 커쇼의 선행은 은퇴와 동시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변했고, 무척이나 광범위해졌다.

아프리카에 설립된 아이들을 위한 교육 시설과 고아원이 무려 13곳이었고, 미국과 기타 다른 국가에도 수십 개가 넘었다.

‘나는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고 떠난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비미국인중 최초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되었으며, 중남미 출신 모든 선수들의 경의를 받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영구결번인 21번의 주인공, 로베르토 클레멘테(Roberto Clemente)의 명언처럼 커쇼 역시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척! 이쪽으로 와!”

창밖에서 커쇼가 날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주변 아이들은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보다는 호기심이 넘치는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날 보고 있는 아이들 대부분이 부모를 잃고, 질병에 시달리다 겨우 구제를 받았을 정도로 깊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얼굴 어디에도 어두운 구석이 보이질 않았다.

모두 커쇼의 노력 덕분인 거다.

“내게 커브를 배우기 싫은 거야?”

커쇼의 말에 내가 피식 웃고 말았다.

레슨을 시작하기도 전에 레슨비용부터 지불하라는 건가?

“갑니다!”

딱 2주.

후회 없이 보내기로 작정했다.

@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갔다.

하루에 3시간.

커쇼에게 12to6커브를 배우는 시간은 3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260명이 넘는 아이들에게도 신경을 써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내 훈련만을 위해 커쇼가 모든 시간을 할애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고, 나 역시 개인 훈련과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다보니 그 이상의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하루 3시간, 7일 동안 대략 21시간.

그 시간 동안 커쇼에게 배운 12to6커브는 생각보다 습득이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패스트볼 계열로 빠른 구속을 위주로 공을 던지던 버릇과 습관 때문인지 12to6커브 특유의 큰 포물선을 그리는 각도보다는 구속에 더 많은 비중이 쏠려서 커쇼나 나나 만족스럽다는 말 자체를 할 수가 없을 정도의 괴상한 커브가 던져지고 있었다.

“그런 어정쩡한 커브는 절대로 타자에게 먹히질 않아. 구속을 훨씬 더 줄이고 각을 크게 만들어야해.”

“생각보다 쉽지가 않습니다.”

“당연히 쉽지 않지.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에게 어느 날 갑자기 느린 공을 던지라고 하면 그게 쉽게 되겠어?”

던질 수야 있다.

문제는 그렇게 던진 공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버린 밸런스는 물론, 제구력부터 시작해서 도미노 현상처럼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망가져버릴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와 커쇼 역시 그 부분을 우려해서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보통 투수들은 제대로 된 변화구 하나를 경기에서 써먹을 정도로 손에 익히려면 1년 정도를 꾸준히 훈련해야만 한다.

그러니 당장 2주 동안 커쇼에게 12to6커브를 배워서 시즌 후반기에 써먹을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더욱이 지금 현재 나는 12to6커브 이전부터 투심 패스트볼과 새로운 구종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서 해오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3가지나 되는 새로운 공을 배우고 익힌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욕심이다.

자칫 모든 걸 다 망쳐버릴 치명적인 위험성마저 있는 셈이다.

현재 투심 패스트볼의 경우 시즌 후반기에는 시합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도달했기에 앞으로 1주일 후에 LA로 돌아가면 다른 것들을 다 잊고 오직 투심 패스트볼 컨트롤 조정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

애초부터 커쇼를 따라서 이곳 아프리카까지 온 이유는 12to6커브를 던지는 방법과 그만의 노하우를 얻기 위함이고, 커쇼 역시 투수이기에 내 목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너무 패스트볼 계열에 특화되어버린 내 신체적 밸런스와 정신적인 부분의 문제가 심하다는 것뿐이었다.

“방법은 어차피 척, 네가 스스로 찾아야 해. 이건 어느 누구도 해결을 해줄 수 없는 부분이야. 공을 던지는 그 순간까지도 네 몸은 패스트볼에 익숙해져있어. 그 익숙함을 버려야 해. 12to6커브는 단순히 완급 조절만으로 던질 수 있는 공이 아니야. 똑같은 투구 모션에서 전혀 다른 공을 던질 줄 알아야 하지.”

커쇼의 말이 맞다.

이건 앞으로 내가 해결해야 할 나만의 문제다.

한 번 틀이 잡혀버린 몸의 균형을 새롭게 잡는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서서히 아주 조금씩 틀을 새롭게 짜맞춰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커쇼의 말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어딜 그렇게 바쁘게 다니시는 겁니까?”

3일 전부터 커쇼는 나에게 커브 레슨을 마치면 꽤 바쁜 사람처럼 외출을 했다.

“시장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커쇼의 모습에 희망의 집 문제로 루사카 시측과 어떠한 문제가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심각한 문제입니까?”

“아냐, 거의 다 해결이 되어가고 있어. 아이들을 돈으로 바라보는 탐욕스러운 어른의 투정이라고 보면 돼.”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 커쇼는 몸을 돌리다가 할 말을 잊었다는 듯 날 돌아봤다.

“잊을 뻔 했네. 점심시간 전에 엘렌과 함께 자원 봉사자들이 올 거야.”

“예? 갑자기 무슨…….”

내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커쇼는 급하게 사라졌다.

엘렌이라면 커쇼의 아내다.

커쇼를 자원 봉사의 세상으로 끌어들이고,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들어 준 천사와 같은 여인이다.

항상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커쇼였기에 두 사람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 매번 느낄 수 있었기에 엘런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기대감이 들었다.

홀로 개인 훈련을 충분히 한 이후 깨끗하게 몸을 씻고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칠 때였다.

버스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버스의 모습이 익숙한 아이들은 곧바로 환호성을 지르며 버스를 향해 달려갔다.

버스가 멈춰서고 문이 열리면서 가장 먼저 금발 머리의 환한 미소가 무척이나 아름다운 30대 후반의 여인, 엘렌 커쇼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아이들을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엘렌 커쇼가 아이들과 포옹을 하며 인사를 하는 동안 버스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내렸다.

대부분 젊은 남녀들이었고, 미국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버스에서 내린 사람이 내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긴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화장기 없는 맨얼굴로 간편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모습 자체가 한 폭의 화보와도 같은 아름다운 여자.

“안젤라?”

이탈리아에서 화보 촬영 중이라고 했던 안젤라가 분명했다.

< 『해외편 - 152』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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