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49화 (149/221)

< 『해외편 - 149』 >

『해외편 - 149』

공개적으로 연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하루 일과는 새벽부터 훈련으로 시작됐다.

데이트 같은 건 실제로 단 한 번도 할 수가 없었다.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세 번째 퍼펙트 게임을 만들었던 밤에 구단에서 마련해 조촐한 파티 자리에서 안젤라를 동료들에게 소개시켜 준 것도 데이트라면 내 생에 첫 번째 데이트이자, 유일한 데이트였다.

대형 소속사에 얽매여 있는 안젤라였기에 그녀는 빠듯한 스케줄을 소화해야만 했는데, 공개적으로 연인임을 밝히면서 의외로 방송가와 언론 등의 섭외가 물 밀 듯이 밀려들어 더욱더 바빠졌다는 말을 전화로만 들을 수 있었다.

나 또한 빡빡한 훈련 스케줄로 인해 시즌 중에는 시간을 내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비록 남들처럼 평범한 데이트를 할 수는 없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시간이 날 때마다 전화 통화를 하며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을 확인했다.

-이번에 지에이치 3편에 정식으로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어요.

“저번에 있었던 오디션에 합격을 한 거네요?”

SF 영화 ‘지에이치’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킨 역대 흥행 성적 1위의 영화다.

한국에서도 지에이치 1편과 2편은 각각 1600만, 1900만의 흥행 성적을 거두며 역대 관객수 1위와 3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 역시 지에이치 시리즈를 무척이나 재밌게 봤고, 3편을 기다리고 있는 관객 중 한 명이었기에 안젤라가 3편에 등장한다고 하면 상당히 기쁠 것 같았다.

-주연도 아니고 그리 많은 역할을 갖고 있는 조연도 아니지만… 솔직히 내가 영화를 찍어도 되나 싶어요.

“연기 레슨도 꾸준히 받고 있고, 당당하게 오디션을 통해서 캐스팅이 된 거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출연 해봐요. 다른 영화도 아니고 지에이치 시리즈잖아요.”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그런데 해외 촬영이 너무 많아서 지에이치 시리즈에 출연을 결정하면 꼬박 6개월 정도는 시간을 낼 수가 없다고 하네요.

“아…….”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금도 바쁜 스케줄로 인해 얼굴을 보기가 힘든데 다시 영화 촬영으로 인해 6개월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허무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 역시 야구 선수로 살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하는데, 안젤라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너무 이기적으로 느껴졌던 거다.

“이번이 안젤라의 인생에 중요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안젤라 자신을 위해서 신중하게 생각해봐요.”

다른 누구도 아닌 안젤라 자신을 위한 결정이라면 나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고마워요. 척.

이후 안젤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이나 하고 나서야 그녀가 촬영을 해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까 안젤라가 보고 싶었다.

멍하니 핸드폰에 찍혀 있는 안젤라의 사진을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안젤라가 현재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듯이 나 역시 내 삶에 충실해야만 그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자가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호시탐탐 내 연애를 이유로 성적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언론들과 일부 팬들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어깨 강화 훈련을 할 때였다.

핸드폰 울림과 함께 문자가 왔다.

당장 핸드폰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하던 운동을 멈출 수가 없었기에 시선만 핸드폰에 둔 상태에서 하던 운동을 마무리하고 재빨리 문자를 확인했다.

문자에는 촬영장에서 찍은 듯 한 안젤라의 사진과 함께 몸 조심히 훈련하고 밥 잘 챙겨먹으라는 제법 긴 장문의 글이 쓰여 있었다.

화보 촬영이라고 하더니 의상과 메이크업이 확실히 평소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가만히 사진을 보고 있으니 이런 아름다운 여자가 내 여자친구라는 사실이 마치 꿈만 같기도 했다.

그렇게 또 다시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다 제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리고 훈련하자!”

스스로에게 기합을 주며 핸드폰을 내려놓고 등을 돌릴 때, 문자 알림음이 다시 울렸다.

내가 보낸 답장을 확인하고 안젤라가 문자를 보낸 건가 싶어 핸드폰을 확인하니 의외의 인물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늦었지만, 세 번째 퍼펙트 게임 축하드려요.

그리고…….

예쁜 여자친구 생긴 것도 축하드려요.

혹시라도 제가 이렇게 연락을 드리는 게 폐가 된다면 더 이상 연락하지 않을게요.

미국으로 유학을 온 정혜영이었다.

시간이 날 때, 에바, 형수와 함께 한 번 만나서 밥을 먹기로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특히, 형수는 정혜영이 UCLA에 편입을 했다는 소리에 예쁜 친구 좀 소개시켜달라고 몇 번이나 신신 당부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안젤라를 형수에게 소개시켜 줬던 때에도 형수는 안젤라에게 예쁜 모델 좀 소개시켜달라고 했고, 지금도 나에게 여자 좀 소개시켜 달라고 조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정혜영의 일은 까맣게 잊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안젤라를 사귀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 정혜영과 개인적으로 문자를 주고받는 일이 과연 옳은 건가 생각을 하다 이내 핸드폰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저번에 했던 식사 약속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응원 부탁한다, 공부 열심히 해라 등의 말들을 썼다가 모두 지워버렸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

결국은 이렇게 끝났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끝나고 말았다.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가슴 속 깊이 간직했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 허무하게 끝나버리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수업도 빠졌고, 무슨 일이 있냐며 걱정하는 친구들도 귀찮기만 했다.

속 시원하게 고백이라도 해봤다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한국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갔더라면 내가 그녀 대신 그의 곁에 있었을 텐데.

미국에 왔을 때, 곧바로 그를 만나서 마음을 고백했어야 했는데.

한 편으로는 고백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방적인 짝사랑을 그 사람이 받아줄 리가 없었겠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 사람이 날 알아줄 리가 없었겠지.

공개적으로 연인이 되어버린 그 사람과는 이제 영영 이별을 해야겠지.

그 사람의 연인이 되어버린 그녀에 대한 질투와 분노, 원망도 들었지만, 자신과 비교해서 여러모로 뛰어난 그녀를 보고 있으면 한 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만 보였다.

“에바…….”

-혜영, 괜찮은 거야?

“나… 한국으로 돌아갈까?”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네 자신을 위해서 유학을 결정했던 거 아냐? 고작 남자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정말 그런 마음이라면 당장 가버려! 그리고 다시는 나에게 연락 하지 마!

“…흑!”

그렇게 쏟아냈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소리를 죽여 가며 울음을 삼키는 내게 에바가 그랬다.

-시원하게 울고 모두 잊어버려. 혜영, 넌 충분히 아름답고 똑똑한 여자야. 널 얼마든지 아끼고 사랑해줄 수 있는 멋진 남자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만 기억해. 척은 네가 그저 한 순간 마음을 줬던 야구 선수일 뿐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말고 다시 씩씩하게 일어나. 네가 그런다고 알아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어.

에바의 마지막 말이 너무나 차가웠지만, 사실이었기에 더욱더 슬프게 들렸다.

이제는 정말 모든 걸 잊어야 할 때였다.

“에바… 나 마이애미에 가고 싶어. 나랑 함께 가주지 않을래?”

-마이애미? 그래. 언제 가려고?

“7일.”

-7일? 설마…….

“그 사람의 경기를 보고 마이애미에서 모든 걸 깨끗하게 씻어내고 싶어.”

-…알았어.

마이애미 공항에 앉아서 30분 정도를 기다리니 에바가 도착했다.

에바의 얼굴을 보니 더욱더 감정이 치솟아 올랐지만, 애써 밝게 웃으며 맛있는 음식도 먹고, 아름다운 마이애미의 해안가를 돌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에바의 친구집에서 하루를 머물고 말린스 파크(Marlins Park)로 향했다.

“말린스 팬이신가요? 하필이면 오늘 상대 투수가 퍼펙트 척이라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네요. 오늘도 피쉬는 그냥 낚시나 당하지 않을지… 젠장.”

택시 기사는 쉬질 않고 떠들었다.

에바와 나는 적당하게 대화를 나누고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택시에서 내렸다.

말린스 파크 주변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이 많네.”

에바와 함께 입장 대기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가 입장을 했다.

“에바, 우리 맥주 마실래?”

“내가 사올게.”

“아냐! 내가 사올게. 에바는 앉아 있어. 금방 갖다 올게.”

매점을 찾아 맥주 두 잔과 간단한 안주 거리를 사서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칠 때였다.

툭. 촤악.

“아!”

옆 사람이 갑자기 몸을 뒤트는 바람에 부딪혀서 손에 들고 있던 맥주를 내 앞에서 걸어가던 키가 큰 남자에게 쏟아버리고 말았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어찌되었던 내 실수였기에 당황해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허리부터 엉덩이까지 온통 맥주에 젖어버린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씨발.”

한국말?

영어로 죄송하다고 말을 하는 나와 다르게 남자가 분명히 익숙한 한국말로 욕설을 내뱉었다.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190cm가 넘는 큰 키에 약간은 마른 남자의 뺨에는 선명한 흉터가 징그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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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최초의 3억 달러 계약.

바로 마이애미 말린스와 지안카를로 스탠튼의 계약이다.

13년간 3억 2천 5백만 달러라는 믿기지 못할 계약을 2014년 11월에 성사시켰다.

현재 38세인 지안카를로 스탠튼은 아직까지도 마이애미 말린스에서 2500만 달러를 받으며 선수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작년 시즌부터 뚜렷하게 하향세를 타기 시작한 성적으로 인해 2028년 마이애미 말린스에서 구단 계약 선택권을 거부할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았기에 올 시즌 이후 은퇴를 선택할 가능성이 무척이나 컸다.

타석에 서 있는 지안카를로 스탠튼은 전성기 시절과 다르지 않는 탄탄한 체형을 자랑했다.

분명 압박감은 있었다.

흔한 말로 이빨과 발톱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호랑이는 호랑이.

섣부르게 덤벼들었다가는 치명적인 피해를 받을 수 있었기에 신중하게 형수와 사인을 교환했다.

지안카를로 스탠튼의 전반적인 평가는 나이가 들면서 배트 스피드가 떨어져 패스트볼에 대한 반응이 굉장히 느려졌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대다수의 투수들은 지안카를로 스탠튼을 잡기 위해 패스트볼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뚜렷한 약점이 있는데 굳이 어렵게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형수와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 사인을 주고받았다.

쇄애애애액.

퍼엉!

“스트라이크!”

주심의 스크라이크 선언에 지안카를로 스탠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바깥쪽으로 살짝 빠지지 않았냐는 투정을 부려봤지만, 주심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바깥쪽으로 빠지는 컷 패스트볼?’

형수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2구를 던졌다.

딱.

배트 끝에 살짝 공이 걸리며 파울이 되고 말았다.

스트라이크 존으로 집어넣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를 타구였다.

3구로는 다시 한 번 바깥쪽으로 빠지는 체인지업을 던지면서 계속해서 바깥쪽 공에 대한 집중력을 길러줬다.

그리고 결정구로는 몸 쪽으로 꽉 차고 들어가는 포심 패스트볼.

쇄애애애액!

퍼- 어엉!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99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에 꼼짝없이 당한 지안카를로 스탠튼은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운동선수에게 나이가 든다는 건 무척이나 서글픈 일이다.

전성기 시절이었다면 아무리 빠른 공이 날아와도 가볍게 쳐냈을 지안카를로 스탠튼이었지만, 이제는 배트 스피드가 쫓아가지 못해서 무기력하게 삼진을 당하고 말았으니까.

나도 언젠가는 지안카를로 스탠튼처럼 나이가 들어 기량이 떨어지는 날이 올 거다.

마음만 먹으면 100마일의 공을 어렵지 않게 던질 수 있었던 때를 추억하며 씁쓸하게 웃을지도 모른다.

안젤라도 내게 말했다.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시기에 되도록 많은 사진을 남겨두려고 한다고.

나이가 들어 성숙미를 풍길 수는 있어도 젊음의 싱그러움은 절대 되돌릴 수가 없기에 하루, 하루가 힘들더라도 한 장의 사진이라도 더 찍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도 젊음을 마음껏 뽐내라고 했다.

‘척의 경기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무척이나 흥분됐어요. 이제 갓 메이저리그에 데뷔를 한 루키 투수가 수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은 타자들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고 공을 공격적으로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보니까 전율이 일더라고요.’

패기 넘치던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고 했다.

되도록 그런 모습을 오랜 시간 유지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오늘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도 전화를 걸어 멋진 경기 부탁한다고 했던 안젤라였다.

경기장에 오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방송을 통해 열심히 응원을 하겠다고 했다.

중계방송을 보고 있을 안젤라를 위해서라도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를 바탕으로 오늘 경기도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고 마운드에 올랐다.

타석에 들어서는 마이애미 말린스의 타자를 바라보며 글러브 속 야구공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2027년 6월 8일.

LA 다저스 대 마이애미 말린스.

최종 스코어 3:1

승리투수 차지혁(8이닝 무실점), 시즌 13승 무패.

< 『해외편 - 149』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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