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46』 >
『해외편 - 146』
“이러다가 정말 퍼펙트 게임 하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다저스의 에이스 척이잖아!”
“에이스? 하긴! 척이 오고 나서부터는 맥카프리에게 계속 에이스라고 부르기엔 좀 무리가 있지.”
“맥카프리는 이제 완전히 끝났지! 그가 아직까지도 승리 가능성이 높은 선발 투수인 건 사실이지만, 척에 비하면 확실하게 승리를 하는 투수라고 부르기엔 좀 힘든 건 사실이니까!”
“지난 번에 있었던 텍사스 원정에서도 얼마나 무기력하게 강판을 당했어? 그때 난 똑똑히 알았다고. 우리 다저스의 에이스는 맥카프리가 아닌 척이라는 사실을!”
“하하하하! 맞아! 척이야 말로 진정한 우리 다저스의 에이스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맥카프리가 지난 시간 동안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기쁨을 줬었는지를 잊으면 안 돼.”
“물론이지! 다만 이제 맥카프리의 시대가 지나고 척의 시대가 왔다는 것뿐이지!”
“흐음. 그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겠네.”
주변 다저스 홈팬들의 대화를 듣는 안젤라 쉴즈의 얼굴엔 미소가 절로 그러졌다.
자신이 열렬하게 응원하는 선수를 다저스 홈팬들이 이토록 칭찬하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아주 오래전부터 응원을 해왔던 팀이 LA 다저스가 아닌 뉴욕 양키스라는 거였다.
뉴욕에서 태어나고 자란 안젤라 쉴즈에게 뉴욕 양키스는 자연스러운 홈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차지혁 때문이라도 LA 다저스를 응원할 생각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차지혁이 뛰는 팀을 응원하기로 했다.
‘척을 응원한다면 팀 정도야 뭐.’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차지혁이 양키스의 마운드에서 지금처럼 멋진 피칭을 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 안젤라 쉴즈였다.
“저…….”
안젤라 쉴즈는 곁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봤다.
귀엽게 생긴 여자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 부른 거니?”
“안젤라 쉴즈 맞나요?”
“그건 왜 묻는 거니?”
“정말 안젤라 쉴즈가 맞나요?”
“글쎄.”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안젤라 쉴즈의 모습에 여자 아이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사실이 좋은지, 실제로 안젤라 쉴즈가 눈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좋은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팬이에요! 나도 안젤라처럼 예쁜 모델이 되는 게 꿈이거든요!”
여자 아이의 흥분한 목소리에 안젤라 쉴즈는 기분 좋게 웃었다.
과거 자신도 저랬던 때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니 여자 아이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사인 해줄까?”
“네!”
대답은 했지만, 마땅히 사인을 받을 종이가 없다는 사실에 여자 아이의 표정이 난감함으로 바뀌었다.
어디에 사인을 받아야 하나 발을 동동 구르는 여자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안젤라 쉴즈가 선글라스를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혹시 척의 사인이니?”
안젤라 쉴즈의 눈에 들어온 건 여자 아이가 입고 있는 차지혁의 유니폼과 등번호가 마킹되어 있는 등에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는 사인이었다.
“네! 저번에 세인트루이스와의 홈 경기에서 척에게 사인을 받을 수 있었어요.”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여자 아이의 모습에 안젤라 쉴즈가 가만히 차지혁의 사인을 바라보다 말했다.
“괜찮다면 척의 사인 밑에 내 사인을 해줘도 될까?”
“여기에요?”
“그래.”
안젤라 쉴즈의 제안에 여자 아이가 살짝 고민하는 듯 한 모습을 보였다.
“아끼는 옷이라 싫은 거니?”
“아끼는 옷이기는 한데…….”
친구들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인 차지혁의 유니폼이었고, 친필 사인이었다.
특히, LA 다저스를 좋아하고 야구를 즐겨보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인기 아이템이었다. 오죽했으면 돈을 줄 테니까 팔면 안되겠냐는 제안을 몇 번이나 들었을 정도로 여자 아이에게는 소중한 유니폼이었다.
안젤라 쉴즈가 동경하는 모델이라고 하지만 차지혁의 유니폼에 사인을 받는 다는 게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척의 사인 밑에 내 사인이 들어가도 꽤 멋질 것 같은데? 그리고 사진첩도 없는 상황에서 아무 곳에나 사인을 해준다고 한 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데?”
안젤라 쉴즈의 말에 여자 아이가 살짝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야구 선수의 유니폼에 야구 선수가 아닌 모델의 사인이 들어가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모델의 사인이니 우선은 받아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만약 이상하거나 어울리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상황에 따라서는 다음에 다시 한 번 차지혁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펜은 내가 가질 걸 쓸 게.”
안젤라 쉴즈가 자신의 펜을 꺼내 들 때 여자 아이의 눈이 그녀의 가방 속에 멋진 포즈가 담긴 사인지가 들어 있음을 확인했다.
당장이라도 사인지에 사인을 해주면 안 되냐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안젤라 쉴즈는 여자 아이의 몸을 뒤로 돌리며 등 뒤에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이, 이게 아닌데!’
등 뒤를 간질거리는 느낌에 여자 아이의 표정이 후회로 물들었다.
“됐다!”
안젤라 쉴즈는 사인을 모두 끝내고 상당히 만족스럽게 자신의 결과물을 확인했다.
“역시 내 예상대로 상당히 멋진 걸?”
“그런 가요?”
이미 마음이 상해버린 여자 아이였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일 어쩔 수 없다는 듯 유니폼을 벗어 확인을 했다.
큼지막한 차지혁의 사인 밑에 적당한 크기의 안젤라 쉴즈의 사인은 꽤나 잘 어울렸다.
텁텁한 모레라도 씹은 것 같았던 여자 아이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 예쁘네요!”
“그렇지? 잘 간직해 줘. 그리고 웬만하면 입고 다니는 것보다는 집에 잘 장식을 해두는 게 어떻까 싶은데? 괜히 술이라도 묻으면 엉망이 되지 않겠어?”
안젤라 쉴즈는 말과 함께 주변을 가리켰다.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성인들은 커다란 일회용 맥주잔을 들고 있었다.
“나도 척의 열렬한 광팬이거든. 그러니까 소중하게 받은 사인이 흉하게 변하는 걸 보고 싶지가 않네.”
비밀이라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하는 안젤라 쉴즈였지만, 여자 아이는 풉 웃으며 대꾸했다.
“안젤라가 척의 광팬이라는 사실은 아마 여기 있는 팬들이라면 다 알고 있을 걸요? 안젤라의 목소리가 그렇게 큰 줄은 몰랐거든요.”
“그랬니?”
“그리고 저쪽에서는 파파라치들이 계속해서 안젤라와 척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고요.”
여자 아이의 말에 안젤라 쉴즈가 어쩌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항상 있는 일이잖아. 저들도 저렇게 해야 돈을 버는데 어쩌겠어?”
“안젤라는 척을 알고 있나요?”
“조금은?”
“혹시 척을 좋아하나요?”
“아마도?”
“세상에!”
“그러니까 그 유니폼 잘 간직해줘. 혹시 알아? 나중에 굉장한 기념적인 유니폼이 될 수도 있을지.”
안젤라 쉴즈의 대답에 여자 아이는 과연 그런 일이 벌어질까 싶었다.
“척~! 파이팅!”
벌떡 일어나서 힘차게 차지혁을 응원하는 안젤라 쉴즈의 모습에 여자 아이는 한 가지만큼은 확신했다.
“스캔들은 확실하게 터지겠네요.”
여자 아이의 말처럼 멀지 않은 곳에서 안젤라 쉴즈를 찍어대는 파파라치의 카메라는 쉴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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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렌스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지만, 몇 번을 다시 생각을 해봐도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이 퍼펙트 게임이라는 건 투수 혼자서 만들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아아~!
홈팬들의 탄식이 그라운드를 뒤덮었다.
불규칙 바운드.
야수들에게 있어서 이것보다 큰 재앙은 없다.
단순히 불규칙으로 튀어 오른 공을 잡지 못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자칫 야수에게 커다란 부상을 안겨줄 수도 있는 폭탄이 바로 불규칙 바운드다.
8회 초, 텍사스 레인저스의 선두 타자인 4번 에릭 오웨인은 몸 쪽으로 파고 들어가는 컷 패스트볼을 있는 힘껏 끌어 당겼다.
배트에 빗맞으면서 3루 방면으로 낮고 빠르게 날아간 타구가 수비를 하고 있던 코리 시거의 앞에서 불규칙으로 튀어 오르면서 아슬아슬하게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글러브를 들어 타구를 잡기보다는 본능적으로 고개부터 돌려야 했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젠장!”
불규칙 바운드로 안타가 만들어지자 가장 먼저 형수가 마스크를 바닥에 패대기치며 욕설을 내뱉었다.
과격한 형수의 행동에 주심이 사납게 노려보자 형수가 재빨리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주심도 딱히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았다.
퍼펙트 게임 중이었고, 불운하게도 불규칙 바운드가 나오며 안타를 내주고 말았으니 형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퍼펙트가 깨져버리자 재빨리 더그아웃에서 투수 코치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괜찮나?”
“괜찮습니다.”
퍼펙트가 날아버렸다는 점이 걱정된 듯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 코치였다.
“미안하다.”
코리 시거가 내게 사과를 했다.
“아닙니다. 불규칙 바운드였으니 시거가 내게 사과를 할 필요는 없는 일이죠.”
내 말에 코리 시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얼굴 한 구석에 찜찜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시간 좀 끌어 줄까?”
투수 코치의 물음에 나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퍼펙트 게임이 날아가 버리긴 했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괜히 시간만 끌어서 아쉬움을 되새기기보단 경기를 속개해서 빨리 이닝을 마치는 일이 내겐 더 중요했다.
수고하라는 말과 함께 투수 코치와 내야수들이 마운드를 내려가자 홀로 버티고 서 있던 형수가 분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거기서 엿 같은 불규칙이 나오냐! 젠장!”
“아직 너한테 시계 선물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건가 보다.”
“젠장! 웃음이 나오냐?”
“어쩌겠어? 이미 깨져버린 퍼펙트인데.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도 없는 문제고. 앞으로 우리에게는 무수히 많은 시간, 경기가 남아 있잖아. 얼마나 많은 퍼펙트 게임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후회해서 뭐해? 진정하고 남은 이닝이나 잘 마무리하자.”
내 말에 형수가 크게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그나저나 너 참… 변한 것 같다.”
“그래?”
“솔직히 약간은 승부에 집착하는 성격이었잖아? 그런데 지금은 여유가 보인다. 이미 최고라 이거냐?”
“헛소리 그만 하고 얼른 가라. 주심이 너 째려본다.”
“알았다. 망할 퍼펙트는 깨졌지만 완봉은 반드시 가자.”
형수가 마운드를 내려가고 경기가 계속됐다.
에릭 오웨인에게 불운의 안타를 맞기는 했지만 이후 후속 타자들을 범타 처리하면서 8이닝을 마칠 수 있었다.
이어진 8회 말, 4점차의 리드 속에서 타석에 들어선 형수는 퍼펙트 게임을 날려버린 것에 대한 분노의 홈런을 때리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물론, 그 이전까지 2개의 삼진과 내야 땅볼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것에 대한 감독과 팬들의 실망도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저 자식은 그냥 1루로 가면 안 되나?”
홈런을 치고 손을 번쩍 들며 베이스를 도는 형수를 바라보며 토렌스가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포수가 아니면 은퇴를 하겠다는데 어쩌겠어요?”
“미친 놈!”
토렌스가 진심으로 질렸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형수의 솔로 홈런으로 1점을 더 달아난 다저스의 8회 말 공격이 끝나고 마지막 9회가 시작됐다.
8번과 투수를 대신해서 대타로 나온 9번 타자까지 삼진 하나와 외야 뜬공으로 막아내고 오늘 경기 최후의 타자일 수도 있는 텍사스 레인저스의 1번 오자이노 알비스와 대결을 시작했다.
퍼- 어엉!
“스트라이크!”
98마일의 빠른 포심 패스트볼에 오자이노 알비스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고, 홈팬들은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다.
나는 아직도 체력에 문제가 없다는 무력 시위로 초구를 넣어두고 파워 커브와 체인지업을 적절하게 섞어 던졌다.
부웅!
“스윙! 타자 아웃!”
오자이노 알비스의 헛스윙 삼진으로 경기가 끝나고 형수가 마운드로 뛰어왔다.
“지혁아! 완봉승 축하한다!”
나를 끌어안으며 형수가 축하를 해주었고, 나 역시 형수에게 수고했다고 말했다.
“괴물 같은 놈! 벌써 몇 번째 완봉이냐?”
“아마도 여섯 번째일 걸?”
“미친 놈! 넌 정말 미친 놈이야! 전반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여섯 번이나 완봉승을 해내다니! 에라이! 너 혼자 다 해먹어라!”
형수의 말에 나는 웃고 말았다.
내가 생각해봐도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성적이기는 했다.
13게임에 선발로 등판해서 11승을 거뒀고, 그 중 6번이나 완봉승을 따냈으며, 퍼펙트 게임도 2번이나 했다.
언론에서는 후반기 성적 따윈 의미가 없을 정도로 신인왕이 확실하다 떠들었고, 일부 언론에서는 MVP까지도 내심 가능하지 않겠냐고 할 정도의 예측을 하고 있었다.
언론에서 뭐라고 평가를 해도 난 이제 메이저리그에 발을 내딛은 데뷔 신인이다.
그리고 이제 시작했다.
나는 그 누구도 가지 못했던 가장 위대한 투수의 길을 향해 고작 한 걸음 내딛었을 뿐이다.
“가봐라! 너랑 인터뷰 하려고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형수가 내 어깨를 툭 쳤다.
< 『해외편 - 146』 > 끝
ⓒ 독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