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143화 (143/221)

< 『해외편 - 143』 >

『해외편 - 143』

텍사스 레인저스(Texas Rangers).

1961년 창단을 한 텍사스 레인저스(창단 시에는 워싱턴 세네터스였다)는 강팀이라는 이미지가 심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을 한 적이 없는 팀이다.

1990년대 후반에는 강팀으로서 아메리칸리그에서 돌풍을 일으켰고, 2010년부터 줄곧 아메리칸리그에서 강자로 군림을 해왔지만 언제나 지구 우승과 아메리칸리그 우승에만 만족해야 했던 만년 2인자의 팀으로 팬들은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인들에게는 대박 계약을 성사시키며 한국 선수들을 사랑하는 팀으로도 유명했다.

박호찬과 추진수에게 엄청난 FA 계약을 안겨준 고마운 구단으로 한국인들에게는 LA 다저스 다음으로 친숙한 구단이다.

1승 1패를 사이좋게 나눠가진 상황 속에서 시즌 3번째 경기가 시작됐다.

마운드에 서니 관중들이 저마다 환호성을 내지르며 나의 복귀를 환영해주었다.

각종 플랜카드를 들고 열렬하게 응원을 하는 팬들도 있었고, 내 이름과 번호가 마킹된 유니폼을 입고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는 팬들도 있었으며, 점잖게 희미한 미소와 함께 박수만 쳐주는 팬들도 있었다.

고작 한 경기 결장을 했을 뿐이지만, 팬들의 과분한 환대를 받으니 더욱더 힘이 났다.

로진백을 손바닥 위에서 툭툭 던지며 글러브를 낀 손을 다시 한 번 움직여봤다.

아무런 문제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운드에 올라가기 전까지도 게레로 감독은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조금이라도 통증이 느껴진다거나, 몸에 이상 신호가 느껴지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반드시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라고.

과잉보호인 건 사실이지만, 2억 5천만 달러의 몸값을 생각했을 때 당연한 행동 같기도 했다.

“지혁아!”

포수 마스크를 쓴 형수가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포수 미트에 자신의 오른손 주먹을 때려 넣으며 공을 던지라는 행동을 보였다.

로진백을 내려두고 피처 플레이트에 발을 올려놓은 후 천천히 호흡을 들이쉬고는 와인드업을 했다.

부드럽게, 그리고 마지막은 강하게.

쇄애애애액.

퍼- 어엉!

“오케이! 좋아! 좋아!”

시원스럽게 꽂히는 공에 형수가 만족스럽게 외쳤다.

나 역시 굉장히 가볍게 느껴지는 몸의 상태에 미소를 지었다.

연습투구가 끝나고 주심이 정식으로 경기 시작을 외쳤다.

텍사스 레인저스의 잿빛 원정 유니폼을 입은 1번 타자 오자이노 알비스가 타석으로 걸어 들어왔다.

작은 체구의 오자이노 알비스는 2025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 계약을 맺고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떠나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수비능력과 훌륭한 타격 능력, 정상급의 주루 플레이를 갖추고 있는 오자이노 알비스는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2년 동안 훌륭하게 리드 오프로서의 능력을 보여줬다.

배트를 짧게 쥔 오자이노 알비스를 향해서 초구를 던졌다.

쐐애애액!

퍼- 엉!

“스트라이크!”

바깥쪽을 찌른 포심 패스트볼, 전광판에 찍힌 숫자는 96mph.

파워가 부족한 오자이노 알비스였기에 어렵게 갈 필요 없이 간단하게 생각하고 2구도 낮은 코스의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97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3구는 몸 쪽 높은 코스의 포심 패스트볼.

2스트라이크 노볼이라는 극도로 불리한 카운트 속에서 오자이노 알비스는 힘을 다해서 배트를 휘둘렀지만, 99마일을 찍어버린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에 방망이가 빗맞으면서 유격수 방면으로 땅볼이 나왔다.

언제나 든든하게 믿을 수 있는 크레이그 바렛은 빠르게 움직여 안정적으로 포구를 한 이후, 1루수를 향해 송구를 했다.

“아웃!”

빠른 발을 가진 오자이노 알비스가 있는 힘껏 1루 베이스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지만, 리그 최정상급의 수비력을 가진 크레이그 바렛 앞에서는 무의미한 질주로 남고 말았다.

오자이노 알비스가 떠난 타석에는 2번 타자이자,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붙박이 좌익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제이크 쿠퍼가 들어섰다.

27살의 제이크 쿠퍼는 2020년 드래프트 당시부터 상당한 관심을 받았던 특급 유망주였다.

당시 제이크 쿠퍼를 직접 관찰했던 텍사스 레인저스의 스카우트는 제2의 조시 해밀턴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100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조시 해밀턴의 재능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재능이 상당히 뛰어났던 제이크 쿠퍼는 당시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에 텍사스 레인저스 유니폼을 입으며 입단을 했고, 4년 만에 쟁쟁한 텍사스 레인저스의 외야수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195cm의 큰 키에 100kg에 육박하는 체격을 지닌 제이크 쿠퍼는 배트를 길게 잡고 타석에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체격이나, 타격 능력 등을 감안한다면 결코 2번 타자로는 어울리지 않는 제이크 쿠퍼였지만 그의 뒤를 잇고 있는 타자들이 줄줄이 비슷한 체격 혹은, 그것보다 더 크고 발이 느리다는 이유 때문에 제이크 쿠퍼는 2번 타순에 배치가 된 상태였다.

무엇보다 중심 타선일 때보다 테이블 세터를 맡고 있을 때의 성적이 더 좋다는 게 제이크 쿠퍼가 2번 타자인 결정적이 이유다.

‘빠른 볼에 강한 타자.’

제이크 쿠퍼의 배트 스피드는 굉장히 빠르다.

메이저리그 전체 타자들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다.

섣부르게 빠른 구종으로 승부를 봤다가는 치명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초구는 체인지업인가?’

형수의 사인을 받으며 글러브로 가린 입가가 살짝 양끝으로 올라갔다.

아직까지도 타격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형수였지만, 포수로서의 성장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타자를 상대하는 건 투수지만, 타자를 분석해야 하는 사람은 포수다.

경기 전까지 포수는 상대팀 타자들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머릿속에 입력하고, 경기에서는 타자 바로 뒤에 앉아 버릇과 행동, 자세 등을 실시간으로 파악해서 투수에게 정보를 줘야 한다.

단지 투수가 던지는 공만 잘 잡는 포수는 절대 프로 리그에서 살아갈 수 없다.

항상 분석하고, 공부하며, 팀 전체를 진두지휘하며 조율을 할 줄 알아야 하면서도 개인의 기량을 발전시켜야만 하는 포지션이 포수다.

‘코스는 바깥쪽.’

토렌스가 돌아오기 전까지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느끼게 해주겠다는 듯 상당히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형수였기에 그를 믿고 원하는 공을 던져주기로 했다.

쇄애애액.

부웅!

퍼엉!

“스윙!”

초구부터 노렸다.

제이크 쿠퍼는 2번 타자임에도 공을 길게 볼 생각이 없다는 듯 과감하게 배트를 휘둘렀다.

감독의 작전 지시인지, 제이크 쿠퍼 단독 행동인지 알 순 없지만 중요한 건 초구에 승기를 잡고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2구는 바깥쪽으로 살짝 빠지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어깨가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제이크 쿠퍼의 배트는 나오질 않았다.

3구는 홈플레이트 앞에서 떨어지는 파워 커브를 던졌고, 제이크 쿠퍼의 배트가 나왔지만 중간에 멈춰서며 1루심의 판정으로 노스윙이 되고 말았다.

1스트라이크 2볼.

‘나올 것 같으면서도 잘 참네.’

3개의 공을 던지면서 제이크 쿠퍼가 어떤 마음으로 타석에 섰는지 확인했다.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공에 있어서는 그대로 보내지 않겠다는 상당히 공격적인 자세.

인내하고 참을 줄 아는 타자에 비해 상대하기 쉬운 건 사실이지만, 제이크 쿠퍼처럼 빠른 배트 스피드와 나름 정교한 타격 능력을 갖춘 타자에게는 마음 놓고 던질 수 있는 공이 많지 않았기에 까다로운 점이 없잖아 있었다.

‘파워도 좋은 편이니까 쉽게 갈 수가 없어.’

시즌이 거듭될수록 파워가 증가해서 작년에는 21개의 홈런을 때렸던 제이크 쿠퍼다.

빠른 배트 스피드와 정교한 타격 능력으로 인해 발생한 홈런도 많았지만, 자세가 무너지거나, 억지로 힘으로 밀어 홈런을 날린 것들도 적지 않았기에 기본적으로 파워가 부족한 타자는 아니었다.

네 번째 공에 대한 사인은 컷 패스트볼, 몸 쪽.

아슬아슬하게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공을 던져야만 한다.

어설프게 코스가 중심으로 몰리거나, 너무 타자 몸 쪽으로 붙어서는 안 된다.

최고의 결과는 빗맞은 타구가 발생하며 내야 땅볼로 범타 처리가 되는 것이고, 중간의 결과는 지켜보다가 스트라이크가 되는 것, 나쁜 결과로는 몸 쪽으로 너무 붙어버려 볼 판정을 받는 것, 최악의 결과는 코스 조절 실패로 인한 실투와 피홈런이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제이크 쿠퍼의 모습을 확인하며 공을 던졌다.

손가락 끝에 걸리는 실밥의 감촉이 괜찮았다.

스트라이크 존 중심을 향해 나아가며 타자 몸 쪽으로 짧지만 예리하게 꺾이는 컷 패스트볼.

약 93~94마일 정도로 구속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코스가 좋았고 구속 역시 미리 예상하지 않은 이상 쉽사리 타격에 성공할 수가 없었다.

딱!

간결한 스윙과 함께 포수의 미트로 들어가려는 공을 제이크 쿠퍼는 힘으로 밀어냈다.

‘낙구 지점이…….’

정확하게 스윗스팟(sweet spot)에 공이 맞지는 않았음에도 타구가 순식간에 내야를 벗어나버렸다.

문제는 내야수와 외야수 사이의 절묘한 지점, 흔하게들 말하는 빗맞은 안타, 바가지 안타라고들 말하는 텍사스 안타(texas leagers hit)가 발생할 확률이 무척이나 높았다.

타구를 향해서 유격수 크레이그 바렛과 좌익수 마이크 트라웃이 동시에 달렸다.

두 사람 모두 빠른 발을 가진 선수들이고, 수비 능력 또한 두 말 할 필요가 없었기에 일말의 희망이 보였다.

타구를 보며 앞으로 달리는 마이크 트라웃과 타구를 보며 뒤로 달리는 크레이그 바렛은 누구 한 사람에게 양보할 수 없을 정도로 낙구 지점이 절묘한 곳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뛰어선 타구를 잡을 수 없다 판단이 들었는지 마이크 트라웃이 몸을 날렸다.

동시에 크레이그 바렛은 다이빙을 하는 마이크 트라웃의 외침에 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타구가 바닥에 닿으려고 하는 순간, 마이크 트라웃의 글러브가 아슬아슬하게 공을 잡아냈다.

타구를 잡았다며 글러브를 머리 위로 들고 크레이그 바렛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킨 마이크 트라웃의 모습에 홈팬들은 저마다 벌떡 일어나며 감탄성과 함께 박수를 쳐주었다.

-와아아아아아!

나 역시 마이크 트라웃의 몸을 아끼지 않는 호수비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1루 베이스를 밟고 상황에 따라선 2루까지 달릴 준비를 하던 제이크 쿠퍼마저 마이크 트라웃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는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하나 제대로 빚을 졌네.’

솔직히 잡기 힘든 타구였다.

트라웃의 빠른 발과 과감한 판단력에 몸을 아끼지 않는 열정이 없었다면 고스란히 안타를 내주고 말았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몸을 사리는 선수였다면 무리하지 않고 바운드 되어 튀어 오르는 공을 안정적으로 잡았을 거다.

팀의 리더로서의 역할과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로 마음을 먹고 있는 트라웃이 아니었다면 분명 빗맞은 안타로 끝났을 거다.

‘마지막.’

나는 이제 시작이지만, 마지막을 준비하는 선수들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언젠가는 나 역시 마지막을 준비하게 된다.

그때는 어떤 심정일까?

과연 트라웃처럼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이지만, 분명한 건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삶이 그리 길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그 길지 않은 선수 생활동안 항상 전투적으로 야구를 할 수 있을까?

힘든 일이다.

몸을 돌보지 않고 야구를 하다가는 부상이라는 악령이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대충대충 야구를 할 수도 없다.

적당히 몸을 사려가면서 야구를 해야 하는 건가?

문득, 며칠 전에 걸려왔던 안젤라 쉴즈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힘들지만 카메라 앞에 서면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아무리 바쁜 스케줄로 몸이 피곤해도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요. 이제와서 힘들다고 그만둘 수도 없고, 그러기엔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에는 최선을 다하되 처음 모델이 되어 카메라 앞에 섰을 때처럼 최대한 즐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언제까지 내가 모델로서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후회를 하진 말아야죠. 그래야만 최소한 내가 모델로 활동했을 때에는 정말 내가 그 일을 즐기면서도 최선을 다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더라고요.’

빡빡한 스케줄로 인해 일상 자체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음에도 최선을 다하고 즐기려고 노력한다는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최선을 다하되 즐겨라.

무척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과연 난 야구를 얼마나 즐겼을까?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즐기면서까지 야구를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즐겁다는 감정을 느낀 것과 내가 의도적으로 즐겼다는 건 분명 다른 거였다.

몸에 묻은 이물질들을 툭툭 털어내는 트라웃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호수비를 해서, 많은 팬들의 환호를 받아서, 팀에 공헌을 쌓아서 미소를 지을 수도 있지만, 내 눈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과 후회스럽지 않은 수비를 함으로써 스스로 크나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둘투둘한 공의 실밥을 느끼며 타석에 들어서는 텍사스 레인저스의 3번 타자, 3700만 달러의 메이저리그 최고의 연봉을 받는 현역 메이저리그 최강의 타자 바이런 벅스턴을 바라봤다.

“즐겁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후회 없이.”

< 『해외편 - 143』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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