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41』 >
『해외편 - 141』
“식사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앞치마를 두른 주혜영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하시던 대로 알아서 해주세요.”
지금까지 가정부로 일을 하면서 음식과 청소, 빨래 등 모든 걸 알아서 척척 해주고 있었기에 나 같은 경우에는 특별히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는 항상 내게 먼저 허락을 구했었다.
다른 때였다면 알아서 미리 생각해놨던 메뉴를 내게 알려주었을 주혜영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난감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내가 먼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주혜영의 눈빛이 랜디 존슨을 가리켰다.
그제야 내가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주혜영은 거의 대부분의 음식을 전형적인 한식으로만 준비했다.
나와 형수가 아무래도 한국 사람이다 보니 양식보다는 한식이 입맛에도 맞았고, 한식 외의 음식은 언제든 구단내의 식당에서 먹을 수 있었기에 집에서만큼은 한식을 선호했다.
자연적으로 주혜영 역시 어제부터 미리 오늘 식단을 한식으로 생각하고 재료를 준비해뒀을 터.
그런데 어제 밤 호텔로 돌아가겠다는 랜디 존슨을 억지로 집에 머물도록 했으니 주혜영 입장에서는 아침에 출근해서 만난 랜디 존슨으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해졌을 수밖에 없었을 거다.
“드시고 싶은 게 있습니까?”
내 물음에 랜디 존슨은 고개를 저었다.
“손님인 내가 먹고 싶은 걸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지.”
“괜찮습니다.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시면 말씀하시면 됩니다.”
“초대를 받았으면 당연히 주인이 내놓는 걸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다. 먹는 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딱히 가리는 음식도 없으니 자네가 먹던 대로 먹어.”
내가 주혜영을 바라보니 그녀 역시 랜디 존슨의 말을 알아들었기에 그럼 준비를 하겠다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것보다도 어제 했던 구종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하지.”
“예.”
“말했다시피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패스트볼 평균 회전수는 38~40회 정도지. 하지만 평균을 상회하는 회전수를 지닌 투수들의 패스트볼을 보면 확실하게 포수에게 도달하는 위치가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자네가 던지는 패스트볼의 회전수를 파악해본 결과 놀랍게도 최저 43회, 최고 55회전까지 나오더군.”
“그렇습니까?”
랜디 존슨 정도 된다면 인맥을 통해서라도 얼마든지 나에 대한 분석 자료를 찾아볼 수 있었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건 나에 대한 분석 자료보다는 내가 던진 포심 패스트볼의 최고 회전수가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55회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프로무대와 일본 프로무대까지 장악했던 전설의 끝판왕 오성훈 선수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최고 55회전수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 할 수 있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바로 자네가 던지는 패스트볼의 회전 각도였지. 보통 평균적인 회전수를 기록하는 투수들의 경우 30도를 유지하지만, 회전수가 높은 투수들의 경우에는 그 각도가 줄어들지. 그런데 자네의 경우에는 놀랍게도 23도 정도 밖에 되질 않더군. 보통 회전수가 45회 이상을 넘어서는 투수들의 경우 10도 정도에 머무는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일이지.”
“어떤 식으로 놀랍다는 건지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공의 회전 각도가 정각, 즉 0도에 가까울수록 회전수가 증가한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자네는 회전 각도가 23도 가량이나 기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회전수가 55회까지 나온다는 건 0도에 가깝게 공을 던질 경우 그 회전수가 얼마나 더 증가할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야.”
“회전수가 더 증가한다면…….”
“착시 효과라 불리는 라이징 패스트볼이 현실이 될 수도 있겠지.”
최상호 코치에 이어서 랜디 존슨도 나에게 라이징 패스트볼을 거론했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고 떠오르는 공, 라이징 패스트볼.
모든 타자들의 스윙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떨어지는 공에 대한 궤적을 그린다.
그런 타자들의 스윙 궤적을 피하는 떠오르는 공을 던지는 투수가 있다면?
어떠한 타자도 칠 수가 없다.
라이징 패스트볼이라는 걸 알고 스윙을 한다 하더라도 몸에 익은 습관은 고치기가 힘들다.
거기에 일반적인 구종까지 뒤섞는다면?
무적의 투수.
세상 모든 타자들을 발아래 둘 수 있는 무적의 투수가 된다.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기대에 찬 내 물음에 랜디 존슨은 너무나도 쉽게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겠지.”
“조금 전에는 현실이 될 수도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진정한 의미에서의 라이징 패스트볼이 아닌 착시 효과적인 의미에서의 라이징 패스트볼이라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이론적으로 가설을 내세우고 있듯이 라이징 패스트볼이라는 건 인간의 몸으로 던질 수 있는 구종이 아냐.”
헛꿈 꾸지 말라는 듯 냉정한 랜디 존슨의 말투에 잔뜩 부풀었던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반대로 착시 효과적인 라이징 패스트볼에 대한 기대가 살짝 생겨났다.
“착시 효과라는 건 말 그대로 실제와는 다르게 그렇게 보인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다면 결과적으로는 어쨌든 타자의 입장에서는 라이징 패스트볼이나 다름 없는 것 아닙니까?”
“당장은 그렇겠지. 하지만, 말 그대로 착시 효과적인 라이징 패스트볼이기 때문에 타자들에게 지속력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맞는 말이다.
진짜로 떠오르는 공이 아닌 다른 투수들보다 조금 덜 가라앉을 뿐이니까.
실제로 공의 궤적이 떠오르지 않는 이상 시간이 지나면 타자들도 거기에 맞춰서 스윙 궤적에 변화를 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투수 입장에서는 엄청난 이득이 된다.
“제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착시 효과를 지닌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지는 겁니까?”
“우선 순위를 정하자면 그렇겠지. 그 공을 던질 수 있게 된다면 분명 네가 던지고자 하는 새로운 구종에 한 발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랜디 존슨의 말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문제는 착시 효과일 뿐이라 하더라도 명색이 라이징 패스트볼이라는 사실이다.
하루 아침에 던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랜디 존슨은 내 물음에 그걸 왜 자신에게 물어보냐는 듯 황당한 눈으로 날 바라보다 그래도 대답은 해주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재능이 받쳐주고 노력이 뒤따른다면 은퇴하기 전에는 던질 수 있겠지.”
“…….”
황당한 랜디 존슨의 대답에 내가 불만스럽게 한 마디를 하려고 할 때, 주혜영이 다가와 식사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냄새가 무척 좋군.”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랜디 존슨을 바라보며 나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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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 회복을 겸한 휴식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 기간 동안에도 꾸준하게 운동을 하며 당장이라도 마운드에 올라갈 수 있도록 몸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런 내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찰칵!
랜디 존슨은 자신이 찍은 사진을 그 자리에서 확인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봐선 마음에 든 모양이다.
주혜영의 음식 솜씨는 랜디 존슨마저 반하게 만들었다.
3일 일정이었던 LA 일정이 늘어났고, 첫날 이후 계속해서 내 집에서 머물렀으니까.
내가 하는 훈련을 지켜보며 한 마디씩 조언을 하거나, 형수를 대신해서 가볍게 캐치볼까지 해주며 나를 상대해줬다.
하지만, 캐치볼을 하지 않는 시간 동안에는 끊임없이 카메라로 날 찍어대고 있었다.
카메라로 왜 날 찍냐는 질문에 랜디 존슨은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
“돈이 되는 모델은 생각보다 흔하지 않거든.”
메이저리그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랜디 존슨이 돈 때문에 사진을 찍는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누구처럼 도박을 하거나, 사업에 실패를 했거나, 알콜 중독이나 마약에 빠져서 돈을 탕진했다면 모를까?
랜디 존슨은 메이저리그에서 현역으로 뛰며 벌어들인 수입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고, 오히려 안정적으로 투자를 해서 적지 않은 수익을 내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거기에 사진 작가로 활동하며 버는 돈까지 있었으니 파파라치처럼 날 찍어서 돈을 벌겠다는 그의 말은 가뭄에 콩 나듯 들을 수 있는 농담인 셈이다.
몇 번이나 이유를 물었지만 그때마다 같은 대답을 하는 바람에 이제는 사진을 찍든, 뭘 하든 상관하지 않고 내 훈련만 묵묵히 소화를 했다.
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마냥 방해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손목이 살짝 비틀리는 게 보이지? 이러면 회전 각도를 줄이기가 쉽지 않아.”
랜디 존슨은 카메라 액정을 내게 보이며 투구폼에 대한 지적도 해주었다.
연속으로 촬영한 장면, 장면에서는 꽤 도움이 되고 있었다.
나는 훈련을 하고, 랜디 존슨은 사진을 찍으며 오전 시간을 모두 소모하고 주혜영의 호출에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향하던 중 한국에 일이 있어 들어갔던 황병익 대표가 반가운 손님을 데리고 나타났다.
“차지혁 선수!”
울의 성대준 대표였다.
반갑게 나를 향해 인사를 하는 성대준 대표에게 나 역시 인사를 건넸다.
“부상은 어떠십니까? 황 대표님께 큰 부상이 아니라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들으신 것처럼 걱정할 필요도 없는 작은 부상입니다.”
“다행입니다! 차지혁 선수는 우리 대한민국의 영웅이자, 야구계는 물론 전 세계의 스포츠계의 보물입니다. 항상 부상 조심하셔야 합니다.”
낯간지러운 성대준 대표의 말에 나는 랜디 존슨이 한국말을 모른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 사이 황병익 대표는 랜디 존슨과 인사를 했다.
성대준 대표까지 가세해서 랜디 존슨과 인사를 마치고 나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점심 드셨습니까?”
내 물음에 황병익 대표와 성대준 대표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계획은 차지혁 선수에게 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드리려고 했는데, 이거 음식 냄새가 너무 좋아서 아무래도 저녁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성대준 대표는 예전과는 다른 넉살을 보여줬고, 결국은 모두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다.
항상 넉넉하게 음식을 하는 주혜영이었지만, 두 명이나 되는 불청객으로 인해 음식이 약간 모자랐다.
추가로 음식을 만들려는 주혜영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을 하고는 간단한 후식 거리를 부탁하곤 거실로 향했다.
“성 대표님께서 미국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성대준 대표는 당연히 날 만나러 왔다고 말을 했지만, 그걸 고스란히 믿을 정도로 난 바보가 아니었다.
“사실은 차지혁 선수로 인해 우리 울 스포츠의 매출이 급증하고 특히 미국 시장에서도 제대로 한 번 사업을 벌여볼까 싶어서 겸사겸사 황 대표님과 함께 비행기를 타게 됐습니다.”
“사업이 잘 되신다니 다행입니다.”
“하하하하! 이게 모두다 차지혁 선수 덕입니다! 차지혁 선수가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은 성공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고맙게 듣겠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틀린 소리는 아니었으니 굳이 겸양을 떨 필요는 없었다.
특히, MSB 방송국에서 방송된 ‘한국의 영웅, 차지혁! 메이저리그를 정복하다!’의 프로를 통해 내가 입었던 의류와 신발 등이 현재 한국에서는 엄청나게 팔리고 있다고 했었다.
오죽했으면 지아마저도 나 때문에 학교 남자애들이 다 똑같은 옷과 신발을 신고 다녀서 꼴보기 싫다고 했을까.
“그리고 다음 달 정도에 차앤울 재단도 설립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문제라면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성 대표님께서 많은 부분을 양보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주신다면 저야 말로 감사합니다. 명색이 대한민국의 국민 영웅인 차지혁 선수의 이름을 걸고 설립하는 재단이니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해서 지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것보다도 이번에 차지혁 선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성대준 대표가 진짜로 날 찾아온 목적을 밝히는 순간이었다.
사업가인 성대준 대표가 내게 제안을 한다면 그건 하나뿐이다.
사업.
내가 사업에 관여를 할 수도, 그럴 시간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성대준 대표가 내게 제안할 것이 무엇인지는 눈치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투자를 바라시는 겁니까?”
< 『해외편 - 14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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