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40』 >
『해외편 - 140』
“한국에서 방송된 척의 다큐를 봤는데, 가끔씩은 일탈을 꿈꾸지 않나요?”
“그런 적 없습니다.”
일탈이라는 단어조차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루, 하루 새벽부터 밤까지 각종 훈련을 하다보면 딱히 별다른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훈련을 하는 목적, 이유가 뚜렷하고 내가 꿈꾸는 목표를 향해 나간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힘들고 지루하다 하더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대단하네요. 사실, 저는 모델이 되고나니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종종 스케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모델이 되고 싶었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의 내 자신이 참 바보 같기도 해요. 내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싶더라고요.”
단지 얼굴이 예뻐서 모델이 된 게 아니었던가?
가끔 TV를 보다보면 단지 예쁘고, 잘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연예인이 된 이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이 데뷔를 하고 인기를 얻기 전까지는 흔하게들 말하는 연습생 시절을 거칠 정도의 노력을 했겠지만, 과연 그 노력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에 비해 높을까 하는 의구심은 있었다.
더욱이 안젤라 쉴즈처럼 나이가 어려보이는 모델이라면 노력보다는 타고난 것들의 도움이 훨씬 더 높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척은 세계 최고의 투수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죠?”
“그렇습니다.”
“부럽네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막연하게 모델이 되고 싶다고 생각을 했죠. 운이 좋아서 모델이 되기는 했는데, 생각해보니 모델이 되고나서 더 이상 뭘 하고 싶은지 꿈이 없더라고요. 소속사에서는 이것저것 내게 시키려고 하는 일도 많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고 말하지만, 솔직히 제가 원하는 것들은 아니거든요. 요즘에는 그냥 평범하게 친구들과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해요.”
안젤라 쉴즈의 말에 나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해봤다.
평범하게.
야구를 하지 않는 차지혁의 삶.
쉽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이런저런 친구들과 어울리며 대학교를 다녔을까?
대학을 가지 못해 재수를 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군대에 입대를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또래의 평범한 이들을 떠올리긴 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명확하지 않고 흐릿했다.
진정한 친구라고 해봐야 형수 한 명뿐이고, 선후배가 있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날 대하기 어려워 할 뿐만 아니라 나 역시 그들에게 연락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으니까.
‘정말 나는 야구를 위해서만 살았구나.’
후회는 없지만, 과연 옳은 걸까 하는 의심은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야구를 할 수 없게 된다면?
내가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야구 선수라고 야구만 하는 건 아니잖아? 보니까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그렇고 국내 선수들도 그렇고 각자 좋아하는 취미나 즐기는 취미가 있던데 오빠는 도대체 야구 외에 할 줄 아는 거나, 즐겁게 할 수 있는 취미라도 있어? 사람이 말이야, 여러 사람하고 어울리면서 함께 좋아하는 걸 즐길 줄도 알고, 놀 줄도 알아야지. 그렇게 맨날 혼자서 야구만 하다가는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
고등학교 방학 때였던가?
지아가 내게 했던 말이다.
하루도 쉬질 않고 야구만 생각하고 야구 연습이나, 그와 관련된 훈련만 하는 나를 두고 지아는 분명히 후회할 날이 올 거라고 말했었다.
당시에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마냥 틀린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어울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던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사람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했다.
“취미가 있습니까?”
내 물음에 햄버거를 먹던 안젤라 쉴즈가 재빨리 입 안의 음식물을 삼키곤 대답했다.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고, 노래를 듣거나 부르는 것도 좋아하고, 햇살 좋은 날 공기 맑은 곳에서 산책하는 것도 좋아해요. 그 외에도 수영도 즐겨하는 편이고, 집에서 맛있는 쿠키를 구워서 먹는 것도 좋아해요. 그리고…….”
쉬질 않고 자신의 취미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나열하는 안젤라 쉴즈였다.
‘정말 많구나.’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것과 취미가 많을 줄은 몰랐다.
랜디 존슨을 바라보며 같은 질문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난 드럼 치는 걸 좋아하고, 음악 듣는 것 또한 좋아하지. 사진을 찍는 것도 마찬가지고.”
무뚝뚝해 보이는 랜디 존슨마저 여러 가지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척의 취미는 뭐죠?”
안젤라 쉴즈의 물음에 랜디 존슨도 약간의 호기심을 드러내며 날 바라봤다.
“전…….”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내가 뭘 좋아했고,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몰랐으니까.
지금까지 야구 하나 밖에 할 줄 모르는 내 자신이 괜히 부끄러워졌다.
“취미를 두고 고민을 할 필요가 있나요? 취미는 말 그대로 내가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일들, 내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나, 배우고 싶은 것 등 아닌가요? 척은 야구를 하지 않을 때 무엇을 하죠?”
대답을 망설이는 나에게 안젤라 쉴즈가 물었다.
“그냥 TV를 보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그럼 TV와 영화를 보는 게 취미겠네요.”
안젤라 쉴즈가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렇군요.”
“척은 취미라는 걸 너무 어렵게 생각한 것 같네요. 낮잠을 잔다거나, 따뜻한 오후에 벤치에 앉아서 일광욕을 한다거나, 책을 읽는다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 등. 취미라는 건 결국 그 사람이 얼마나 자연스럽고도 편안하게 할 수 있으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이냐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취미라는 게 굳이 거창할 필요도 없고, 남들에게 내세울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저 방금 또 하나의 취미가 생긴 것 같아요.”
안젤라 쉴즈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야구장에서 햄버거를 먹는 게 너무 즐겁네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웃음을 짓고 있는 안젤라 쉴즈를 보니 그녀가 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연예인인지 알 것 같았다.
문득, 그녀가 이렇고 있을 시간이 있는 건가 싶었다.
“안젤라 양은 바쁘지 않으십니까?”
바쁘기로 따지면 연예인만큼 바쁜 사람도 드물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일탈을 했죠.”
“예?”
한쪽 눈까지 찡긋 거리며 장난스럽게 웃는 안젤라 쉴즈의 모습에 나는 랜디 존슨을 바라봤다.
자신도 잘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젓는 랜디 존슨이었다.
“안젤라!”
잔뜩 화가 난 음성이 커다랗게 울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날카로운 인상의 여성과 두 명의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들켰네요.”
아쉽다는 듯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말을 한 안젤라 쉴즈는 몸을 일으켰다.
“메기가 오기 전에 제가 먼저 갈게요. 괜히 메기가 이상한 말을 척에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앞으로도 척의 경기는 항상 지켜보면서 응원할게요! 파이팅!”
파이팅 포즈까지 취해주고 몸을 돌린 안젤라 쉴즈는 날카로운 인상의 여성에게 달려갔다.
“저 여자가 메기입니까?”
“매니저지. 굉장히 시끄럽고 까탈스러운 여자야.”
랜디 존슨은 대답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안젤라 쉴즈가 왜 서둘러 움직였는지 알 것 같았다.
매니저의 팔을 붙잡고 미안하다는 듯 애교를 부리는 안젤라 쉴즈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소리를 쏟아내는 매니저의 모습을 보니 그녀가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는지, 왜 일탈이라고까지 말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매니저와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들과 등을 돌려 걸어가던 안젤라 쉴즈가 갑자기 내게로 빠르게 달려왔다.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붙이며 귓가에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
태어나서 처음으로 맡아보는 향긋하고도 달콤한 향이 났다.
귓가를 간질거리는 안젤라 쉴즈의 입김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소곤거리며 말을 마친 안젤라 쉴즈는 내 눈을 보고 예쁘게 웃어주고는 등을 돌려 매니저와 경호원에게로 달려갔다.
매니저가 날카롭게 치켜뜬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지만, 안젤라 쉴즈가 그녀의 팔을 붙잡고 걸어가자 따갑던 시선이 끊어졌다.
“마음에 드나?”
랜디 존슨이 날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예?”
“안젤라 쉴즈가 마음에 드냐고.”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일 뿐입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 대답에 랜디 존슨이 피식 웃었다.
“귀까지 빨갛게 변해서 하는 말 치고는 궁색하군.”
귀가 빨갛게 변했을 줄이야.
재빨리 양쪽 귀를 손으로 잡으며 주물렀다.
“두 번 작업을 해봤는데 좋은 여자더군. 저 정도의 인기를 얻게 되면 세상을 다 가진것마냥 우쭐해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는데, 그녀는 다른 모델들과는 분명 다르더군. 하지만, 그녀와의 만남에 대해서는 상당히 진지하게 생각을 해봐야 할 거야. 두 사람 모두 대중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안젤라 쉴즈 정도라면 사람들 입소문에 시달리더라도 뜨겁게 사랑을 해볼만 하겠지.”
랜디 존슨의 말에 나는 그럴 리 없다고 못 박듯이 대답했다.
“저는 아직 메이저리그에 대한 적응도 끝내지 못했습니다. 여자를 만나는 건 사치나 다름 없습니다.”
“양대 리그를 통틀어 최고의 활약을 벌이고 있는 투수의 입에서 적응도 끝내지 못했다는 소리가 나오다니. 기자들이 알면 꽤나 좋아할 말이군.”
내가 한 말은 진심이지만, 랜디 존슨이 한 말 또한 사실이었다.
“투수든, 타자든 시즌이 끝나야만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종종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평가를 받는 투수와 타자들도 있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하는 랜디 존슨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훼방꾼도 사라졌으니 진지하게 대화를 시작하지.”
“예.”
지금까지 가볍게 웃고 떠들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랜디 존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모두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더욱이 랜디 존슨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소중한 조언인 내게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정말 귀중하게 쓰여야만 했다.
“우선 그 동안 자네가 보여줬던 투구 패턴들에 대해서 내가 느낀 것들을 말해주지.”
랜디 존슨과의 대화는 무척이나 길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LA 다저스의 시즌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도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기에 결국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도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경기 운영 방식, 타자들을 상대할 때의 태도, 구종에 대한 평가와 신구종에 대한 토론까지 랜디 존슨은 무척이나 꼼꼼하게 말을 했고, 나 역시 받아들일 것들과 그렇지 않을 것들을 자체적으로 분류해서 머릿속과 가슴에 담았다.
그렇게 모든 대화를 끝내고나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LA 다저스의 시즌 마지막 경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다저스가 이기겠군.”
랜디 존슨의 말대로였다.
8회의 스코어가 3:8이었다.
아무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타선이라고 하더라도 경기 막판에 5점 차이를 뒤집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올 시즌 들어 역전을 당하는 일이 거의 없는 LA 다저스 불펜진을 생각하면 이미 승부의 추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해도 이르다고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다저스가 이익을 볼 수 있는 트레이드일지도 모르겠군.”
TV를 보던 랜디 존슨이 그렇게 말했다.
마침 TV에서는 형수가 깔끔한 2루타를 터트리고 있었다.
마리아 파헬슨이라는 초특급 유망주와 트레이드를 한 형수에 대한 다저스 팬들의 평가는 아직까지도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랜디 존슨의 말처럼 결과는 언제든 뒤집힐 수가 있었다.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 있는 내 말에 랜디 존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띠링.
랜디 존슨이 자신의 핸드폰 울림에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나에게 말했다.
“안젤라 쉴즈가 자네 전화번호를 원하는군.”
“예?”
‘척의 취미가 영화라니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함께 영화 봤으면 좋겠네요. 오늘 척을 만나서 정말 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부상에서 회복되면 이전처럼 멋진 피칭 응원할게요. 참, 햄버거 너무 맛있었어요. 다음에는 내가 맛있는 샌드위치 사줄게요.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내게 속삭였던 안젤라 쉴즈의 말을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메이저리그 1년차 데뷔 신인이 여자나 만나고 다닐 수는 없었다.
“전화번호는 주지 않으셨으면…….”
“이미 줬어.”
“…제 의견을 묻기 위해서 했던 말 아니었습니까?”
“내가?”
그런 적 없다는 랜디 존슨의 태도에 나는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너희 두 사람의 문제로 내가 귀찮아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랜디 존슨의 단호한 말에 그가 왜 내 전화번호를 안젤라 쉴즈에게 알려줬는지 알만했다.
알려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알려달라고 할까 싶어 사전에 미리 해결을 해버린 거다.
자신의 일이 아니니 상관없다는 듯 태평스럽게 TV를 보고 있는 랜디 존슨이었다.
< 『해외편 - 14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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