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37』 >
『해외편 - 137』
1회부터 아웃 카운트도 하나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1점을 냈다는 건 그날의 경기가 무척이나 쉽게 풀릴 수도 있다는 징조다.
하지만, 언제나 그 징조가 맞아 떨어지는 건 아니다.
“허무하네.”
형수가 포수 장비를 착용하며 그렇게 말했다.
병살타와 내야 뜬공.
1번과 2번 타자에게 연속 안타를 맞으며 너무나도 쉽게 1점을 내줬던 가렛 글리슨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3번 타자인 코리 시거를 상대로 병살타를 이끌어내며 순식간에 주자를 지워버리고, 아웃 카운트도 2개나 올려버렸다.
이어진 4번 타자 마이크 트라웃이 내야 뜬공을 치며 이닝 종료.
보통의 투수였다면 분명히 크게 흔들렸던 상황이었지만, 가렛 글리슨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상황이 역전되고 말았다.
환상적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깔끔하게 위기 상황을 극복한 가렛 글리슨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선수들은 자신감이 충만해졌고, 기회를 날려버린 다저스의 선수들은 찜찜한 기분을 털어버릴 수가 없었다.
‘상황이 묘하게 변해버렸네.’
마운드에 서서 슬쩍 야수들을 돌아보니 표정들이 심통치 않았다.
1회에 1점을 냈으니 표정들이 밝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 나 역시 기분이 썩 좋다고 할 수가 없었다.
‘분위기를 한 순간에 뒤집어 버리다니.’
시선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가렛 글리슨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1실점을 했음에도 투구수는 고작 14구.
무엇보다도 1번 타자에게 7구를 던졌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적은 투구수다.
투구수가 적다는 건 투수 본인에게도 큰 도움이 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야수들의 집중력을 흩트려 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굉장히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된다.
공격은 길게, 수비는 짧게.
야구의 대표적인 명언이다.
수비의 핵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투수고, 그렇기에 야구를 투수 놀음이라 부르는 이유다.
1점 리드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분명 상황 자체는 다저스보다는 카디널스가 더 좋았다.
다시 상황을 반전 시키려면?
타석으로 천천히 들어서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4번 타자, 헤일리 하비를 쳐다봤다.
‘제물이 필요하겠지.’
내 시선에 눈썹을 일그러트리더니 사납게 노려보는 헤일리 하비의 모습을 보며 글러브 속에 담겨 있는 공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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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아아아!”
“나이스!”
테블릿pc의 화면을 바라보던 아이들이 하나 같이 탄성을 내질렀다.
“또 삼진이야!”
“그냥 삼진도 아니야! 3구 삼진이잖아!”
“진짜 어떻게 저렇게 공을 잘 던질 수 있는 걸까?”
“그러게 말이야. 메이저리그에서 저렇게 쉽게 삼진을 잡는 투수는 솔직히 얼마 없잖아?”
“정말 끝내준다니까!”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저마다 말을 했다.
아이들의 칭찬에 중심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지아야, 너희 오빠 언제 한국에 오는 거야? 시즌 다 끝나면 한국 오는 거야?”
한 여학생의 물음에 미소를 짓고 있던 여학생, 차지아가 곧바로 대답했다.
“아마도 그럴 거야.”
“7월에 안 와? 다저스는 올해 챔피언스 리그에 나가지 않아서 7월 동안 휴가나 다름없을 텐데?”
한 남학생의 말에 아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챔피언스 리그에 나가지 않으면 휴가 받는 거야?”
“보니까 그렇던데? 챔피언스 리그에 나가지 않는 팀의 선수들은 대부분 7월 달에 여행을 가기도 하고,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기도 하더라고. 뭐 그래봐야 일주일 정도뿐이지만.”
자신 있게 말하는 남학생의 모습에 아이들의 시선이 다시 지아에게로 향했다.
“너희 오빠가 아무런 말도 안 했어?”
친구의 물음에 지아는 살짝 눈을 일그러트렸다가 곧바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너희도 TV봐서 알잖아. 우리 오빠의 하루 일과는 항상 야구로 시작해서 야구로 끝나는 사람이라서 휴가가 있다고 해도 쉽게 한국에 올 수가 없어. 더군다나 시즌 중에 한국까지 왔다갔다 하는 일이 쉬운 일도 아니고.”
지아의 말에 아이들이 하나, 둘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MSB 방송국에서 방송된 ‘한국의 영웅, 차지혁! 메이저리그를 정복하다!’라는 특별 다큐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시청률 54.7%.
무려 50%를 돌파해버렸다.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차지혁이 지금까지 세운 각종 기록들만 하더라도 그에 대한 관심은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 거기에다 야구 외엔 각종 언론 방송을 통해 그 모습을 좀처럼 볼 수 없는 신비주의 이미지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야구를 엄청나게 잘 하는 선수라는 건 이미 알려졌지만, 그가 뭘 먹으며, 쉴 때는 뭘 하고, 어떤 훈련을 하는지 등등 대중의 관심은 무척이나 높았다.
하지만, 방송 출연은 전무하고 언론과의 인터뷰조차 쉽게 하질 않으니 알 수 있는 정보가 무척이나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기에 이루어진 밀착 취재는 가뭄 속 단비가 아닌 홍수였다.
냉정하게 판단해서 방송 자체는 큰 재미가 없었다.
단조로운 일상, 반복적인 생활의 연속이었기에 크게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특히, 같은 운동 선수들이 보기에도 고개를 절래절래 저을 정도의 훈련을 하루도 빼놓지 않는 차지혁의 끈기와 노력에 그가 어째서 어린 나이에 그토록 막대한 성공을 거두고 있는지 충분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방송 이후, 차지혁은 노력하는 천재의 표본과도 같은 인물이 되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자극을 받았고, 차지혁을 더욱더 사랑하게 됐다.
그동안 언론 노출을 극도로 자제했던 차지혁의 행동을 건방지다며 비난했던 이들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고, 어딜 가더라도 차지혁처럼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찬 이야기들이 꽃을 피웠다.
“하긴, 남들처럼 놀 때 다 놀았다면 지금처럼 됐을 리가 없겠지.”
남학생의 말에 모든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차지혁의 경기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던 아이들이 하나, 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메이저리거는 휴가도 있었어? 하긴, 그래봐야 그 야구 로봇이 휴가를 즐길 리가 없지. 그래도 아쉽네. 8월이었으면 딱이었을 텐데.’
방학이 시작되면 곧바로 부모님과 미국으로 가기로 한 지아였다.
다만, 휴식월에 맞물렸다면 짧게나마 가족 모두가 여행을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을 하는 지아였다.
“아싸!”
책상 서랍에 슬그머니 켜 둔 핸드폰에서는 차지혁이 또 다시 상대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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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군.”
랜디 존슨이 오랜만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그는 진심으로 양 팀 투수들의 호투에 감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차지혁과 가렛 글리슨은 서로 주도권을 쥐기 위한 호투를 펼치고 있었다.
메이저리그를 대표했던 투수로서 활약했던 랜디 존슨이고, 전설이 된 그이기에 현재 LA 다저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분위기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팬들이 보기에는 1회부터 LA 다저스가 득점에 성공하며 주도권을 잡았다고 여기고 있겠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실점 이후, 가렛 글리슨이 호투를 보이며 분위기를 정 반대로 돌려놨었다.
그랬던 분위기가 고작 2회 초가 끝나며 급변했다.
3타자 연속 삼진.
헤일리 하비, 할 매케인, 프래스턴 팰럼보를 2회 초에 연속 삼진으로 잡아내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주춤거렸던 LA 다저스 선수들에게는 힘을 실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가렛 글리슨은 만만하지 않았다.
다시 2회 말, 다저스 타자들을 상대로 또 한 번 병살타를 이끌어냈고, 2루타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쳤다.
분위기가 다시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쪽으로 가나 싶었지만, 3회 초 차지혁은 무섭도록 타자들을 압도했다.
매 이닝마다 투수들의 활약에 따라 주도권이 왔다갔다 거렸다.
이런 경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팬들 입장에서야 점수가 나지 않으니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야구를 보는 눈이 조금이라도 높다면 이 긴장감이 얼마나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지 충분히 알만했다.
“점수가 생각보다 잘 나오지 않네요?”
곁에 앉아 있던 안젤라 쉴즈의 말에 랜디 존슨은 고개만 끄덕였다.
1회, 2회, 3회, 4회, 5회까지 LA 다저스 타자들은 매 이닝마다 안타를 치고 출루했다.
그런데 점수는 고작 1회에 얻은 1점이 끝이다.
굉장히 많은 안타를 치고, 끊임없이 타자들이 출루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득점과는 무관했다.
‘굉장히 효율적인 투구를 하는 군.’
현재 다저스의 공격이 뚝뚝 끊기는 이유는 바로 가렛 글리슨 때문이다.
큰 특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에이스라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 매년 200이닝 이상 투구가 가능한 이유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경기였다.
3개의 병살타를 유도해냈고, 루상의 주자가 움직일 수 없는 타구를 만들어냄으로써 실점을 틀어막고 있는 가렛 글리슨의 투구 내용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투구수였다.
5회까지 마친 가렛 글리슨의 투구수는 64개였다.
1실점, 8개의 안타, 3개의 볼넷, 1개의 고의사구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투구수는 고작 64개뿐이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현 상태를 유지한다면 완투까지도 충분히 노려볼 만하겠군.’
1실점을 하고 있다는 게 아쉽게 느껴질 정도다.
반면 차지혁의 투구수는 5회까지 61개다.
그리고 퍼펙트 게임을 기록 중이다.
5회까지 잡은 탈삼진 개수가 무려 11개.
15명의 타자를 상대로 11명을 삼진으로 돌려세웠으니 무시무시한 탈삼진 능력이었다.
‘시즌 3번째 퍼펙트 게임을 달성할 수 있을지도 무척이나 궁금하군.’
투수가 세울 수 있는 최고의 기록 퍼펙트 게임을 한 시즌에 3번이나 달성한다?
랜디 존슨은 그저 웃고 말았다.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이 안 되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차지혁은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 데뷔를 한 신인 투수다.
한국에서 프로 경험을 했다는 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고작 프로 2년차의 햇병아리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랜 기간 메이저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할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현대 야구에서 내세울 수 있는 모든 기록들이 차지혁 한 사람으로 인해 깨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지.’
메이저리그에서 오랜 시간 선수로 뛴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힘든 일이다.
특히, 투수에겐 더욱더 힘들다.
부상과 예기치 못한 사고가 항상 변수처럼 일어나는 메이저리그에서 10년 동안 선수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위대하다 부를만한 일이다.
“척이 오늘 퍼펙트 게임을 할 수 있을까요? 랜디가 보기엔 어때요?”
안젤라 쉴즈의 물음에 랜디 존슨은 마운드에 서서 6회 초 투구를 준비 중인 차지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기대는 해볼만 할 것 같군.”
“그렇죠? 어쩌죠? 나 지금 무척이나 흥분되요! 척의 첫 번째 경기 관람이 퍼펙트 게임이라니~ 무척이나 운명적이지 않나요?”
사춘기 소녀처럼 들떠서 운명적이라 말을 하는 안젤라 쉴즈의 모습에 랜디 존슨은 가볍게 혀를 찼다.
‘여자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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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 초.
어느덧 경기는 중반의 마지막에 도달했다.
5회까지 61개의 공을 던졌기에 투구수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매 이닝마다 전력투구를 하다보니 체력적으로 적지 않은 피로감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가렛 글리슨… 정말 쉽지 않네.’
지금까지 많은 투수들과 맞대결을 벌였지만, 가렛 글리슨만큼 힘든 상대는 없었다.
투수는 타자를 상대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상대 투수와 싸운다.
내가 던지는 공을 치는 건 타자들이지만, 그 결과에 영향을 받는 건 상대팀 선발 투수이기 때문이다.
가렛 글리슨은 무리하지 않고 정말 편안하게 투구를 했다.
안타를 맞아도 흔들리지 않았고, 주자를 출루시켜도 다음 타자를 상대로 가장 효과적인 투구로 최적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그렇기에 다저스 타자들은 많은 안타를 치고, 지속적으로 출루를 하고 있음에도 점수를 내지 못하니 체력 소모는 큰 반면 심리적으로는 허무감에 빠져 승기를 확실하게 잡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 나 역시 카디널스 타자들을 상대로 전력투구를 하며 압도적인 투구 내용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내가 실점을 하게 된다면 다저스 타자들은 조급해지고, 그건 곧 가렛 글리슨이 원하는 방향으로 경기가 끌려가게 된다.
그런 결과를 막기 위해서라도 나는 지금처럼 카디널스 타자들을 압도할 필요가 있었다.
6회 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선두 타자는 지미 곤잘레즈.
작년 0.247의 타율에 13개의 홈런을 때린 지미 곤잘레즈는 놀랍게도 22살의 젊은 나이로 올 시즌이 메이저리그 2년차인 유격수였다.
무엇보다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가지고 있는 지미 곤잘레즈의 수비력은 벌써부터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유격수가 될 거라는 전문가들의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거기에다 유격수라고 하기엔 강력한 파워까지 갖고 있었기에 최종적으로 지미 곤잘레즈를 두고 골든 글러브와 실버 슬러거를 모두 독식하게 될 유격수라는 핑크빛 미래가 예견되고 있었다.
타석에 선 지미 곤잘레즈의 눈빛이 한 마리의 맹수처럼 번들거렸다.
전 타석에서 워닝 트랙까지 날아갔었던 좌익수 뜬공으로 아웃을 당하며 무척이나 아쉬워했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앞선 타석에서 조금만 더 배트에 힘을 실었다면 분명 넘겼을 거라 확신을 하고 있으니 보이는 모습이다.
한 방을 노리고 있겠지.
쥐고 있는 배트, 밟고 선 스탠스, 타격 자세까지 모든 것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홈런을 노리는 타자.
선두 타자를 쉽게 상대할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형수와 사인을 주고받은 후에 초구를 던졌다.
쇄애애액.
포심 패스트볼을 노리고 있었다는 듯 지미 곤잘레즈가 잔뜩 힘이 느껴지는 스윙을 시작했다.
배트가 막 공을 때리려는 순간, 공의 궤적이 살짝 변했다.
컷 패스트볼이었다.
내가 미소를 짓는 순간.
딱!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새하얀 공이 곧장 내 가슴을 향해서 날아왔다.
퍼억!
< 『해외편 - 137』 > 끝
ⓒ 독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