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편 - 135』 >
『해외편 - 135』
“오늘 날씨 정말 좋다~!”
옅은 화장기 섞인 얼굴로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늘씬한 동양인 여자의 모습에 반질반질하게 생긴 백인 청년이 곁으로 다가갔다.
“하이~ 내 이름은 조나단인데, 아름다운 여성분의 이름은 어떻게 되는지 물어도 될까요?”
낯선 백인 청년의 접근에 여자가 흠칫 놀라면서도 곧바로 대답했다.
“죄송해요. 이름을 알려주고 싶지는 않네요.”
단호한 여자의 거절에도 백인 청년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어느 팀을 응원하러 왔죠?”
분명하게 거절을 표현했음에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는 백인 청년의 모습에 여자는 살짝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내가 그걸 왜 말해줘야 하죠? 미안하지만, 난 그쪽이랑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요.”
다시 한 번 확실하게 거절을 표현하는 여자였지만, 백인 청년도 만만하지 않았다.
“나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저 오늘 경기를 즐기기 위해 야구장을 찾아온 다저스의 팬일 뿐이에요. 특히, 오늘은 척의 선발 경기라서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 몰라요. 난 척의 광팬이거든요.”
“척?”
“지혁 차! 다저스의 에이스인 척의 광팬이라면 누구나 그를 척이라고 부르죠. 몰랐나요?”
“…예.”
“혹시 척을 좋아하지 않나요?”
“좋아하죠.”
백인 청년의 물음에 여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여자의 반응에 백인 청년의 입꼬리가 살짝 말아 올라갔다.
수줍게 고백을 하듯 말을 하는 여자의 모습에 백인 청년의 눈빛에 득의양양한 표정이 가득했다.
“나랑 같군요! 우리 다저스에 척이 와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그는 우리 다저스의 구세주죠! 커쇼와 류가 떠난 자리를 척이 새롭게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쪽은 모를 거예요.”
계속되는 차지혁에 대한 백인 청년의 과도한 칭찬에 여자의 표정이 점점 풀어졌다.
단호하게 낯선 남자를 경계하던 얼굴은 상당부분 희석되어 있었다.
“오늘 척의 선발 경기를 보기 위해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혹시 괜찮다면 함께 경기를 관람할까요?”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어요. 친구와 함께 왔거든요.”
“친구요? 누구죠? 나도 친구들과 함께 왔으니까 우리 다 같이 모여서 신나게 척을 응원하면 재밌을 것 같은데, 어때요?”
백인 청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에게 관심 없으니까 꺼져.”
동양인 여자만큼이나 아름다운 눈부신 백인 미녀의 등장에 백인 청년의 눈매가 환하게 휘어졌다.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척의 광팬이라서 함께 그의 경기를 관람하며 응원을…….”
“요즘 다저스 경기에서 순진한 동양계 여성들을 유혹해서 나쁜 짓을 한다는 놈들이 있던데, 그쪽이랑 아무런 상관이 없는지 경찰에게 한 번 물어볼까?”
백인 미녀의 냉정한 말투에 백인 청년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더니 이윽고 으르렁거리듯 퍽유라며 욕설을 남기고는 등을 돌려버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동양인 여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백인 미녀에게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백인 미녀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대답했다.
“네가 본 그대로야. 순진해 보이는 아시아계 여자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해서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 있다고 들었어. 특히, 차지혁 선수의 이름을 팔아서 팬인 척 친근하게 군다고 하더라고.”
“뭐?”
자신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듯 놀라는 동양인 여자였다.
“여긴 한국이 아니야. 혜영, 네가 생각하지 못했던 상상도 못할 인간들도 지천으로 널려 있어. 그러니까 조심해.”
“그, 그럴게, 에바.”
“미리 들어갈까?”
“응.”
정혜영과 에바, 그녀들이 LA 다저스의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다저 스타디움에 나타났다.
“참, 아까 들으니까 지혁 씨를 척이라고 부르던데 사실이야?”
“사실이야. 한국 이름은 발음을 하기가 쉽지 않잖아? 다저스 클럽 하우스의 동료 선수 중 한 명이 척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지금은 다저스의 팬들 사이에서 꽤 유명해져 있어. 그 외에도 다른 별명들은 많지만 지금은 거의 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어.”
에바의 자세한 설명에 정혜영이 그렇냐며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그런데 에바는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아는 거야? 다저스 팬이 아니었잖아?”
“아, 그건… 나는 물론 필리스의 팬이지만, 한국에서부터 차지혁 선수를 응원했으니까.”
“필리스를 상대로 지혁 씨가 선발로 등판하게 된다면 어딜 응원할 건데?”
“그건…….”
에바가 난감하다는 듯 대답을 머뭇거리자 정혜영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냥 해본 말이야. 에바를 위해서라도 그런 불행한 일은 벌어지지 않기를 기도해야겠다.”
정혜영의 웃는 모습에 에바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혜영에게는 그저 재밌는 일이겠지만, 에바에게는 정말 곤란한 일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LA 다저스와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올 시즌 7경기가 예정되어 있었고, 로테이션 상 불행하게도 다저스와 필리스의 첫 번째 경기에서 차지혁은 선발로 등판할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았다.
‘정말 어딜 응원해야 할지…….’
중요한 건 절대 그날만큼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야구를 봐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과격하기로 유명한 필리건들인 가족과 친구들이라면 필리스의 타자들을 상대로 공을 던지는 차지혁을 향해 어떤 말들을 해댈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에바였다.
마음이 불편해서라도 그 자리에 함께 할 자신이 없었다.
“와아~ 여기가 TV로만 보던 다저 스타디움이구나! 저, 저깃다!”
정혜영의 손가락이 다저 스타디움의 한쪽 모퉁이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차지혁이 웃는 얼굴로 장형수와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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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 스타디움은 메이저리그의 모든 구장 중 관중석 규모가 가장 크다.
5만 6천석.
내년 2028년도에는 뉴욕 양키스에서 양키 스타디움을 6만 명까지 수용 가능 하도록 대규모 확장 공사를 준비 중이라고 했지만, 현재까지는 여전히 다저 스타디움이 가장 많은 관중석을 자랑하고 있었다.
말이 5만 6천명이지 실제로 그 많은 인원이 관중석을 가득 채운 모습을 보면 입이 절로 벌어진다.
“휴우~ 오늘도 역시 널 보기 위해 관중석이 꽉꽉 채워졌네.”
형수의 말대로, 내가 선발로 등판하는 날에는 관중석의 빈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만원 관중 동원능력을 자랑하는 선수는 다저스에서는 오직 나와 필 맥카프리뿐이다.
하지만, 원정 경기를 떠나면 나와 필 맥카프리의 관중 동원능력이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수 년 동안 다저스의 에이스로 활약을 하고 있는 필 맥카프리였지만, 원정 경기에서는 나보다 관중들을 끌어 모으는 힘이 부족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가장 큰 임펙트는 역시 두 번 연속 퍼펙트 게임 기록이다.
필 맥카프리가 리그 최정상급의 투수인 건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퍼펙트 게임은 물론 노히트 경기도 해본 적이 없었다.
여기에 신인 투수라는 이점도 분명 있었다.
신인 투수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신인이 어떠한 기록을 세웠느냐에 따라서 분명 차이가 크게 난다.
그렇다보니 굳이 다저스의 원정팬이 아니라 하더라도 상대팀과 메이저리그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경기장을 찾았던 거다.
하지만, 그런 관중 몰이 현상도 4월이 지나면서 약간 시들해져 있었다.
아직까지 무패의 기록으로 양대 리그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지만, 시즌 초반에 보여줬던 핵폭탄급의 활약과는 거리가 좀 멀어진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다저 스타디움에서만큼은 여전히 다저스 팬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고 있었다.
“오늘 선발 바뀐 거 알고 있지?”
“알지.”
“카디널스에서도 오늘 경기는 절대 쉽게 내주지 않겠다는 의도겠지. 오늘 져버리면 내일까지도 분위기가 이어질 수도 있으니 설령 진다하더라도 쉽게 지지는 않겠다는 뜻 아니겠냐?”
형수의 말대로다.
본래 오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선발 투수는 5선발 투수인 스펜서 트레더웨이였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스펜서 트레더웨이가 팔꿈치 통증을 느낀다면서 선발 투수가 바뀌었다.
가렛 글리슨.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1선발 투수이자, 에이스인 가렛 글리슨은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메이저리그 7년 차의 베테랑 선수다.
내일 등판하기로 되어 있었던 가렛 글리슨을 오늘 경기에 앞당겨 올리는 이유는 뻔했다.
쉽게 승리를 내주지 않겠다는 의도다.
충분히 승부를 걸어볼 만한 투수였고, 설령 진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피해로 내일 경기를 위하겠다는 감독의 의지인 거다.
“차라리 안정적으로 내일 경기라도 가져갈 것이지.”
형수가 혀를 차며 그렇게 말했다.
“감독이 따로 생각하는 게 있나보지.”
“그래봤자 소용없다는 걸 오늘 확실하게 보여주자고.”
“카디널스의 타자들은 절대 만만하지 않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필 맥카프리가 그렇게 깨질 줄 누가 알았겠어?”
“하긴, 필 맥카프리 그 자식이 그렇게 무너진 건 좀 충격적이었지. 하지만 오늘 상대는 필 맥카프리가 아니라 다저스의 새로운 에이스 차지혁이잖아. 카디널스 놈들 오늘 밤 잠 좀 설치게 해주자고.”
형수와 그렇게 가볍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 경기 시간이 다 되어갔다.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관중석에서 뜬금없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관중석을 바라보니 놀랍게도 뜻밖의 인물이 관중들을 향해서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뭐야? 랜디 존슨이잖아? 연락을 했었던 거야?”
형수의 물음에 나는 그런 적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5월 중으로 한 번 찾아오겠다고 한 적은 있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옆에 저 여자는 누구야? 장난 아니잖아! 설마… 애인은 아니겠지?”
랜디 존슨의 곁에서 함께 손을 흔드는 여자는 정말이지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여자들보다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흔하게 말하는 엘프 여신이었다.
“와우! 안젤라 쉴즈잖아!”
빅터 페르난도가 그렇지 않아도 왕방울만한 눈을 더욱더 크게 치켜뜨며 탄성을 터트렸다.
“안젤라 쉴즈? 유명한 연예인이야?”
형수의 물음에 빅터 페르난도가 고개를 저었다.
“요즘 가장 뜨겁게 인기를 얻고 있는 모델인데, 조만간 헐리우드에서 볼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어째서 안젤라 쉴즈가 랜디 존슨과 함께 있는 거지? 서, 설마!”
“너도 나랑 같은 생각 했지?”
형수와 빅터 페르난도가 불손한 생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관심도 없었기에 나는 랜디 존슨만을 바라봤다.
‘시간이 있다면 새로운 구종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눴으면 좋겠는데.’
4월 달 이후로 다시 신 구종을 연구 중이었기에 랜디 존슨의 조언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설마 경기가 끝나자마자 가버리는 건 아니겠지?”
안젤라 쉴즈라는 모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그럴 것 같기도 해서 불안했지만, 당장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이라 랜디 존슨과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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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야구장에 오니까 기분이 좋네요.”
밝게 웃는 안젤라 쉴즈의 미모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하지만, 곁에 앉아 있는 랜디 존슨의 표정은 무표정하다 못해 살짝 굳어 있었다.
자신의 유명세만으로도 주변의 시선이 꼬여들어 귀찮은데, 안젤라 쉴즈라는 혹까지 붙어버리니 랜디 존슨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안젤라 쉴즈와 함께 움직이다보니 괜한 오해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할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그런 랜디 존슨과 다르게 안젤라 쉴즈는 오랜만에 느끼는 홀가분한 기분에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하루 10분의 여유조차 없는 빡빡한 살인적인 스케줄에서 벗어난 것도 좋았고, 요즘 가장 좋아하는 야구 선수인 차지혁의 선발 등판 경기를 직접 관전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무척이나 그녀의 기분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오늘 경기에 데리고 와줘서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오늘 일은 반드시 보답할게요. 그런데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될까요?”
랜디 존슨은 안젤라 쉴즈가 할 부탁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안다는 듯 단칼에 거절했다.
“엉뚱한 소문으로 그의 머릿속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는 것이 좋아.”
“전 순수하게 팬으로서 그를 만나고 싶을 뿐인걸요?”
“그 순수함을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기자와 파파라치들은 순수하지 않다는 게 문제지.”
“알죠. 하지만, 전 정말 척을 무척이나 만나보고 싶어요.”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 안젤라 쉴즈의 모습에 랜디 존슨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 『해외편 - 13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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